오늘의 화제작
영웅은 그대 품 안에

-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이 깨워주는 자기영웅(self-hero&heroine)

  • 오늘의 화제작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영웅은 그대 품 안에

-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이 깨워주는 자기영웅(self-hero&heroine)


 


“그대의 연예인이 되어 항상 즐겁게 해 줄게요. 연기와 노래, 코메디까지 다 해줄게.
그대의 연예인이 되어 평생을 웃게 해 줄게요. 언제나 처음 같은 마음으로.”

가수 싸이(PSY)의 <연예인>이라는 노래 가사 일부이다. 글로 풀어놔서 차분한 사랑 고백 같지만 의외로 빠른 비트의 댄스곡이다. 가사 자체가, 내가 내색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걸 상대방이 알아서 해주겠다는 의미여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설사 말뿐이라 할지라도 없던 사랑이 생겨서 주변인들에게도 전파하게 될 것 같은 가사라고 생각한다.
나 대신 내가 바라는 것을 해주겠다니, 이 얼마나 달콤한가.
우리는 살면서 혼자 모든 일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누군가와 함께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의지를 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지’란 내 일을 몽땅 전가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 어떤 ‘대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심리 상담에서 자주 나오는 개념인 ‘자기대상(self-object)’이다.
이 자기대상은 세 가지로 나뉘는데 바로 거울 자기대상, 이상화 자기대상, 쌍둥이 자기대상이다. 단어만 봐도 어떤 의미인지 유추가 가능한데 세 가지 다 내 몸과 마음이 힘들 때 나 대신 내가 바라는 뭔가를 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대상을 만들어서 의지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보통 어릴 때 부모님을 이상화 자기대상으로 삼고 심리 상담을 할 때는 상담해주는 사람을 자기대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늘 그렇듯, 이런 식으로 설정한 자기대상은 깨지기 쉽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가 세상에서 힘이 제일 셀 수 없고 어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요리를 잘 할 수 없다는 건 커가면서 알게 되며, 상담해주는 사람 역시 신이 아니라는 것도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정세랑 作) 속 주인공 은영은 겉으로 보기에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아니 오히려 좀 이상한 사람이다. 깔때기 칼과 비비탄총을 가지고 다니며 우스꽝스럽게 엉덩이를 쭉 빼고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게 평범하게 보일 리는 없으니까. 은영은 그녀를 깊이 알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원한, 나쁜 짓 등의 사념 덩어리를 볼 수 있다는 거다. 사람은 누구나 속으로만 가지고 있는 생각이 있는데 그게 지나쳐서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칠 정도가 되면 은영이 눈치채고 미리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물론 소설 속의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는 죽은 사람의 사념도 종종 등장한다).
여기서 은영의 역할은 쉽게 말해 세상을 평안하게 해주는 영웅인데 그 의미가 남다르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영화인 <어벤저스> 속 영웅들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본인의 능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세상을 돌보는 건 당연한 권리와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은영은 가진 능력 자체도 그리 탐탁지 않아 할 뿐 아니라 영웅이라는 직업 이외에 평범한 간호사와 보건교사로 사는 삶 자체를 피곤해한다. 이 얼마나 재밌는 상황인가? 영웅이 사는 게 피곤하다니! 여기서 나는 은영에게 나를 투영했다. 피곤하게 사는 내가 가진 탐탁지 않은 능력과 하고 있는 일이 어쩌면 세상을 좀 더 평안하게 하는 데 일조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이 소설을 읽는 이들은 아마 그런 식으로 은영에게 이입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고 일어나면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하는 걸 지나서 확진자 수를 확인하는 지경에 이른 지금, 우리가 크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없다. 다만 각자의 자리에서 피곤하지만, 할 일을 성실히 하는 자체가 세상을 평안하게 하려는 시도이다. 은영은 그 위치에서 할 일을 함으로써 은연중에 우리의 피곤함과 대단함을 알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서 또 다른 축을 담당한 한문 선생님 인표는 어떨까. 그 역시 평범하지만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다. 모든 학교에 하나쯤은 있을 법한 지루한 선생님이지만 어릴 때 사고로 인해 한 쪽 다리를 저는 몸을 갖고 살고, 의외로 학교 재단의 후계자인 남자. 이런 캐릭터가 은영의 특이한 능력을 빠른 속도로 받아들인다는 게 좀 의외였지만 그는 본인도 모르는 보호막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은영을 보호하고 도와주기도 한다. 가끔 은영을 빈정 상하게 하는 것도 잊지 않으며. 이 얼마나 ‘그냥’ 자기 삶에 충실한가? 서브 캐릭터지만 메인 캐릭터와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본인이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귀찮아하며 평범하고 ‘성실히’ 산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고, 남성 위주의 영웅 시장에 흔하지 않은 여성 영웅과 영웅을 보조하는 남성을 등장시킨 포맷에 약간의 B급 정서를 바탕으로 흥행에 성공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것도 당연히 맞는 말이다. 다만 출간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책이 최근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건 다른 시대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걸 ‘평범함이 영웅이다’로 감히 풀이해본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독자들이 평범하게 살기 힘든 세상을 살며 안은영을 각자의 자기대상으로 인식했다는 생각도 해본다. 누군가는 에너지를 줘야 한다. 안은영이 유한한 에너지를 가진 실제 사람이 아닌 캐릭터라는 건 이런 의미에서 아주 좋은 자기대상이 될 수 있다. 힘이 된다는 말이다. 더욱이 넷플릭스에서 훈훈한 연예인이 연기하는 은영과 인표를 생각하면 더욱 소설에 몰입할 수 있고 에너지를 받을 것이다. 굳이 <연예인>의 노래 가사 속 직접적인 달콤함이 아니라도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자기영웅(self-hero&heroine)은 탄생한다.
오늘도 평범한 우리는 열심히 살고 있다. 살짝 힘에 부칠 때면 『보건교사 안은영』을 떠올려보자. ‘나 이래도 되는 건가?’라는 질문을 하면 영웅 안은영이 본인의 이름 초성으로 대답할 것이다. “ㅇㅇㅇ”
박훌륭
박훌륭
약사, ‘아직 독립 못 한 책방(아독방)’과 푸른약국 출판사 대표, 1981년생
공저서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우연한 사랑, 필연적 죽음』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 사람과 사물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