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체험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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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체험 학습

“나, 안 갈래.”
주호 한 마디에 분주하게 움직이던 엄마가 그대로 멈춰 섰다.
식탁에서 김밥을 먹던 아빠도 젓가락을 내려놓고 주호를 쳐다보았다.
“형 체험 학습이라고 엄마가 김밥까지 쌌는데.”
동생 성호가 나섰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픈데 어떡해.”
주호가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셔보자. 아빠가 머리 주물러 줄게.”
아빠가 물을 가지러 일어섰다.
“그래봤자 소용없어. 안 가.”
주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프다는 것 거짓말이지? 또 가기 싫어서 그러는 거잖아.”
성호가 이죽거렸다.
“내가 아픈지 안 아픈지 네가 어떻게 알아?”
주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집에 있으면 심심할 거야. 후회할 텐데.”
아빠가 한 번 더 설득했지만, 주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선생님께 전화해 줘. 엄마 귀찮게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주호가 선언을 하듯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와 성호는 가방을 챙겨 조용히 집을 나갔다.
엄마는 커피 한 잔을 내려 식탁에 앉았다. 주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봐야 했지만 당장은 움직일 힘이 없었다.
식탁 위에는 어수선하게 펼쳐진 김밥 재료들과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일거리들이 놓여 있었다.

주호는 체험 학습을 기다렸다. 수원 화성이라 더 가고 싶었다. 하지만 체험 학습 날이 가까워지면서 자신이 없어졌다. 모둠 아이들이 주호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기분 나쁘게 웃었기 때문이다. 왜 웃는지 이유도 말하지 않고 번번이 주호의 의견을 무시했다. 급기야 버스에서 셋이 제일 뒷자리에 앉을 거라고 했다. 주호는 멀미가 심해 뒷자리에 같이 앉을 수도, 그렇다고 혼자 따로 앉을 자신도 없었다. 등교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니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는 말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버스 출발 시간이 지나자 두통은 사라지고, 후회가 밀려온 게 문제였다. 선생님에게 얘기하든지 아니면 모둠 아이들에게 따지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무시해야 했다.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을 생각을 하니 답답했다.
주호는 거실로 나왔다. 일단 뭐라도 먹어야 시간이 갈 것 같았다. 다행히 엄마는 일에 빠져 있었다. 주호는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이동해 냉장고와 음식 보관장을 열어 우유와 시리얼을 꺼냈다. 그릇에 시리얼과 우유를 담았다. 그릇을 들고 주방을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손에서 그만 그릇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쨍그랑. 그릇이 깨지고 우유와 시리얼이 사방으로 튀었다.
엄마가 주방으로 달려왔다. 엉망이 된 바닥을 보고 엄마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럴 줄 알았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엄마 입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아침 내내 잘 참았다 싶었는데 그릇과 함께 인내심도 조각나고 말았다. 주호는 미안한 마음에 휴지를 들고 주변을 서성거렸다.
“저리 가! 도움 안 돼. 아!”
엄마가 그릇 조각을 치우다 손을 움켜잡았다. 오른손 손가락 끝에서 피가 흘렀다. 깨진 그릇 조각이 손을 찌른 모양이었다. 주호가 안방으로 달려가 약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엄마, 여기!”
주호가 밴드를 내밀었다. 난처해하는 주호의 얼굴을 보자 엄마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닥을 꼼꼼히 닦은 후 예쁜 그릇에 시리얼과 우유를 담아 주호에게 건넸다.
“미안해. 엄마가 심하게 말해서.”
“괜찮아.”
“김밥 먹지, 왜 시리얼을 먹으려고 해?”
엄마가 물었다.
“엄마 김밥 맛없잖아.”
주호는 그렇게 말하며 시리얼을 맛있게 먹었다. 엄마는 주호의 솔직한 말에 웃음이 나왔다. 마음을 잘 숨기지 못하는 아이였다. 때로는 상대방 마음과 상황을 고려해서 적당히 감추거나 돌려 말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주호는 그러지 못했다. 누군가에겐 자연스러운 일이 주호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눈치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런 점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겉돈다는 걸 엄마도 알았다. 엄마와 가족들도 주호의 말에 가끔 당황할 때가 있었으니까.
“애들은 도착했겠지? 아! 화성 보고 싶었는데.”
“그러게, 왜 안 갔어?”
엄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모둠 애들이 자꾸 치사하게 굴잖아. 내 말을 자꾸 무시하고.”
“나빴네.”
“그래도 그냥 갈 걸 그랬어. 나도 무시하면 되는 건데. 안 가니까 나만 손해야. 너무 심심해.”
“주호가 엄마보다 낫네.”
“비 오면 좋겠어.”
“왜?”
“그래야 우리 모둠 애들이 재미있게 못 놀지.”
주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남은 우유를 후루룩 마셨다.
“영화나 볼까?”
“아니. 엄마는 일해. 바쁘잖아.”
주호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 엄마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런 날도 일은 해야 했다. 일이란 그런 것이고, 가끔은 일이 마음을 지켜주기도 했다. 그런데 강한 햇빛 탓에 컴퓨터 화면이 흐리게 보였다. 커튼을 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이 없었다. 너무 맑은 날이었다.
“그래, 비나 오면 좋겠다.”
엄마도 하늘을 보며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주호는 수시로 거실과 주방을 들락거렸고, 엄마는 결국 컴퓨터를 꺼야 했다. 주호와 엄마는 무작정 나와 지하철을 탔다. 둘이서 수원 화성에 가 보려고 검색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멀었다. 대신 한양 도성을 걷기로 했다. 여러 구간을 검색한 끝에 낙산 공원 구간을 선택해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렸다. 혜화문을 찾고 근처에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 입구로 가는 계단을 찾았는데, 거기에 한 무리의 아이들과 선생님으로 보이는 어른이 함께 있었다.
“자, 5학년 3반! 뛰지 말고 천천히 걸으면서 도성을 잘 살펴봅니다.”
선생님이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아이들에게 외쳤다.
“어, 5학년이래. 체험 학습 왔나 봐.”
주호가 엄마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막 계단을 뛰어 올라가 5학년 3반 무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선생님은 제일 뒤에서 천천히 걸어가면서도 원하는 아이들이 들을 수 있게 한양 도성에 있는 사대문과 사소문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어찌나 설명을 재미있게 하는지 엄마도 자연스럽게 선생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자, 3반!”
한참을 걸어가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불러 세웠다.
“도성의 여기 부분은 어느 왕 때 쌓은 걸까요?”
선생님이 질문했다.
“숙종! 숙종!”
선생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호가 큰소리로 대답을 했다. 엄마가 깜짝 놀라 주호를 데리고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아이들이 주호를 보며 수군거렸다.
“왜? 재미있는데. 태조 때는 돌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세종 때는 돌이 조금 커지긴 하지만 여전히 모양이 제각각이야. 숙종 때는 돌을 30~40센티미터 정도로 잘라서 썼고, 순종 때는 돌이 더 커졌어. 선생님이 아까 다 설명하셨는데. 심지어 표지판에도 설명되어 있어.”
주호는 나오면서도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너희 반 수업이 아니잖아. 기다려야지. 다른 애들 수업을 방해하는 거야.”
엄마의 싸늘한 말투에 주호가 엄마 손을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먼저 걸어갔다.
주호는 화가 났다. 아는 게 나와서 말했을 뿐인데 뭐가 잘못됐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말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래놓고 정작 엄마와 다른 이들은 걸핏하면 주호에게 상처를 주었다.
혼자서 정신없이 걸어가다 낙산 공원 표지판과 함께 성벽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했다. 주호는 문을 통과해 성안으로 들어갔다. 꽤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낙산의 꼭대기에 만들어진 공원이었다. 산 아래로는 시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탁 트인 전경을 보니 기분이 약간 나아졌다.
“와! 여기에 이런 풍경이 숨겨져 있었네.”
어느새 따라온 엄마도 주호 곁에 서서 산 아래를 보며 감탄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하늘과 산, 건물 사진을 찍었다. 주호 팔짱을 조심스럽게 끼고 셀프 카메라 모드로 두 사람의 사진도 찍었다. 주호는 화난 표정을 짓긴 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고마워, 같이 찍어줘서.”
엄마가 주호와 찍은 사진을 보며 웃고 있을 때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5학년 3반 아이들이 공원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곳곳에 나눠 앉았다. 그리고 도시락을 꺼내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우리도 맛없는 김밥 가져올 걸 그랬나?”
엄마가 말했다.
“아니, 다음 체험 학습 때는 제일 김밥에서 사줘. 나는 거기 참치 김밥이 맛있어.”
엄마가 주호를 노려보자 주호가 막 웃었다.
“그만 가자.”
엄마가 주호 손을 잡았다. 하지만 주호는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철퍼덕 앉았다.
“더 있을래.”
그리고 아이들이 밥 먹고, 이야기 나누고, 사진 찍고 장난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몇 번이고 가자고 재촉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엄마도 하는 수 없이 주호 근처에 앉았다. 주호는 다른 아이들이 노는 걸 구경하고 엄마는 그런 주호를 구경했다.
잠시 후 선생님이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모았다. 아이들은 각자 자기 짐을 꾸리고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공원을 빠져나갔다. 시끌벅적하던 공원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이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주호가 일어나서 엄마 곁으로 왔다.
“우리도 이제 가자.”
주호와 엄마도 공원을 나와 걷기 시작했다.
“우리 반은 ‘역사 퀴즈 대회’ 할 시간이야. 선생님이 점심 먹고 나면 화성 곳곳에 역사 관련 질문 쪽지를 숨겨두신다고 했어. 제일 많은 문제를 푸는 모둠이 문화상품권을 받아. 내가 갔으면 우리 모둠이 1등인데.”
주호가 입을 열었다.
“지금쯤 너희 모둠 애들 후회하겠다.”
“맞아.”
내리막길이었다. 주호는 속도를 내서 걸어가다 성벽에 뚫린 구멍에 얼굴을 대고 성 밖 풍경을 바라보기도 하고 분홍색 철쭉을 만나면 멈추어 서서 향기를 맡기도 했다.
“엄마!”
앞서가던 주호가 큰 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저기가 흥인지문인가 봐.”
주호 손가락 끝에 낙산 공원 구간의 도착지인 흥인지문이 보였다.
“흥인지문 주변에는 옹성이라는 게 있어. 다른 사대문에는 없대. 적으로부터 문을 보호하는 성이야. 흥인지문 주변이 지대가 좀 낮아서 옹성이 필요했다는 설이 있어.”
주호가 엄마에게 다가와 자신이 아는 걸 열심히 설명했다.
“엄마가 주호 덕분에 오늘 많이 배웠다. 체험 학습 제대로 했어.”
엄마 칭찬에 주호가 쑥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어!”
주호가 갑자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엄마를 봤다.
“왜?”
“빗방울 하나가 얼굴에 떨어졌어.”
엄마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맑았던 하늘이 어느새 흐려져 있었다. 순간 엄마 손등에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엄마와 주호는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엄마, 뛰어!”
주호가 달렸다. 엄마도 뒤따라 뛰었다. 주호가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엄마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전수경
전수경
동화작가, 1974년생
장편동화 『우주로 가는 계단』 『별빛 전사 소은하』, 역서 『난 곤충이 좋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