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명품 위에 쓴 시,우리가 웅덩이를 안다 해도 갈 데가 없다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②명품 위에 쓴 시,우리가 웅덩이를 안다 해도 갈 데가 없다

이쪽에서 보이지만 저쪽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여름에는 바람만 보였는데 겨울에는 나무가 잘 보였다.
나무는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나무에서 나온 빛은 어디로 가는가?
나는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다.
침묵보다 더 긴 이야기를 움켜쥐고 싶다.


명품 위에 쓴 시

곰발바닥, 자라냄비요리, 오르톨랑, 푸아그라, 펑깐지, 싼쯔얼, 카오야장, 샥스핀 따위 먹지 말자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여, 먹은 것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여 하루 한 끼, 물을 베어 씹어 먹자 물 없이는 청산에서도 살 수가 없다

그렇게 물을 마셔댔으면서도 마신 게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여 굶주림과 비만 사이 우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는 물맛을 영원히 잊거나 기억하기 위해 자꾸 절벽이나 돌에 빗소리를 새기는 것이다

물에 긁힌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물비늘 잔뜩 붙이고서 다시 일어서지 못한 사람인데, 지느러미 없는 그림자가 휘어져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자꾸 침만 흘린다

미식 축제, 거기엔 별별 지옥이 어룽거렸지만 아무도 모른다 끝까지 모르니까 죽을 때까지 뜯고 씹는 것이다 나는 물에 긁혀 돌아온 사람, 눈을 흐려 뜨면 보인다 무엇을 먹어야 다시 서게 될 것인지를, 피 흘리는 몸이 왜 행복한지를, 그러나 너무 늦게 깨닫기에 돌거미같이 핏줄이 말라 죽는 것이다


우리가 웅덩이를 안다 해도 갈 데가 없다

1
어쩌면 여기가 마지막 웅덩이일지 모른다 우리가 줄곧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면 웅덩이는 줄곧 더럽혀지지 않았으리라

2
침 범벅, 아가미 범벅, 함께 있어야 사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다
끌고 다닐 그림자가 없으니 나방과 잠자리 알은
풀이나 비 냄새를 맡지 못했다

3
그리고 가끔 서로의 입속을 들락거리는 거품이 되곤 했다
등껍질과 꼬리와 실눈은 물결이 어떻게 빛나는지
외진 우연을 버리고 와서야 알았다

4
새벽이슬이 굴러야만 은하수가 물금을 만든다
우리는 숨을 빚는데도 밤새 타죽지 않으려고
소금쟁이 깨금발로 오는 안개비 속에서 발끝을 세웠다
숨구멍으로 음(音)을 만들고 체온으로 악(樂)을 풀었다

5
웅덩이가 줄어들면
물방울 눈동자를 가진 짐승이 운다고 했다
그런 새벽, 꿈에도 잊지 못할 생땅 냄새가 났다

6
우리는 비와 번개를 몸에 붙이고 사는 악어떼
그러나 그것마저 밤의 태양에게 빼앗겼으니,
우리는 기꺼이 물의 사다리를 만들면서 죽는다
거기에 비가 있다 비를 몰아가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그걸 아는 짐승은 아무도 없었다
이병일
이병일
시인, 1981년생
시집 『옆구리의 발견』 『아흔 아홉개의 빛을 가진』 『나무는 나무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