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의심을 품자,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①의심을 품자,

삼십여 년 동안 한 동네에서 살고 있다. 그동안 소방도로를 내느라 몇몇 집이 사라졌고, 비탈진 골목길이 조금 넓어졌다. 집주인들은 대체로 강 건너 사람들이다. 재개발을 기다리다 지쳐 아예 이사 온 이웃들도 있는데, 대체로 만족스러워 보인다. 이곳은 경복궁과 가깝지만 날마다 야채와 과일을 파는 트럭이 오고, 이웃들은 시골처럼 서로의 집을 오가기도 한다. 얼핏 보면 이웃들의 삶은 무미건조한 것 같으나 하나같이 따뜻하고 애잔하다. 길가 집인 내 공간엔 그들이 내는 온갖 생활 소음이 들려온다.


의심을 품자

안면을 때리며
길이 곤두선다
내겐 흔한 일이다

나 한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인간이 왜?

사력을 다해
걸어온 길과 닿은 하늘이
틈 없이 닫혔다가
천천히 열린다

언젠가는 내가
안개 자욱한
이 길의
심장으로 뛰었다

언젠가는 내가 길의
혀처럼 굴었다
개울물처럼 재잘댔다

나는 또
낯선
길 위에 있다



지금은 사월

늙은이는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가까이 있어서 뻔한 그것

젊은이는 죽음을 말한다
멀어서 관대한 그것

이른 아침 청와대에서 날아오른
헬리콥터가 창을 흔든다

지존의 비상
먼지도 빛난다

먼지는
호루라기 같은 웃음소리에도
날아오른다
속을 다 비우는 듯
새로 가득 채우는 듯
옆집 사람들 떠들썩하게
골목을 벗어난다

지금은 사월
나뭇가지에 바람 돌돌돌 감기고
태양은 발그레
나뭇잎은 연초록

오래된 나무는
삶을 버티느라 어둡고
새싹들은 삶을 까발리며 빛난다
수없이 경신해온 먼지들
거침없이 가볍다

조 은
조 은
시인, 1960년생
시집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 『무덤을 맴도는 이유』 『따뜻한 흙』 『생의 빛살』 『옆 발자국』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