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진첩
그 날의 초상(肖像)

  • 나의 사진첩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그 날의 초상(肖像)

 

2003년의 가을과 겨울, 나는 아내와 함께 체코의 프라하에서 한 철을 보냈다. 명목상으로는 프라하대학(카렐대학) 한국문학부의 초청 교수였지만 실제는 그곳의 한국학 연구 상황을 견문하고 프라하대학과 서울대학의 학술 교류를 모색하는 일 이외 달리 특별한 과업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는 프라하대학 한국학 교수들과의 집담(集談)을 제외하면 대체로 시간이 자유로웠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내킬 때마다 배낭 하나를 걸치고 유럽 각지를 보헤미안이 되어 돌아다녔다. 직접 차를 몰거나, 플로렌스 터미널에서 국제 버스나, 흘라비니역에서 기차를 타고…… 지나놓고 보니 참으로 행복했던 내 인생의 한 컷이 아니었던가 한다.
사진은 프라하에 있는 성 비투스 사원의 언덕에서 시내를 굽어본 장면이다. 더 좋은 사진이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찾아보니 제대로 된 것이 없다. 평소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은 탓도 있으나 찍은 사진을 다시 꺼내 볼 정신적 사치가 없어 그리된 것이니 누굴 책망하랴. 또 이 나이에 사진을 오래 간직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만 당시 프라하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던 중 내 프라하 체류를 자상하게 돌봐주었던, 지금은 한국외대 체코·슬로바키아학과의 유선비 교수와 인증샷 한 장을 남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오세영
오세영
시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42년생
시집 『바람의 아들들』 『북양향로』, 시조집 『춘설(春雪)』, 학술서적 『시론』 『한국현대시인연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