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쓰기의 스승
맹인 김씨 아저씨와 국어선생과 아, 이성복 시인

  • 내 글쓰기의 스승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맹인 김씨 아저씨와 국어선생과 아, 이성복 시인



돌이켜보면 문학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40여 년 세월이 아득하다 못해 아찔하다. 단 한순간도 이 세상에 철퍼덕 주저앉지 못하고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서 오금 저리는 날들이었다. 가당치도 않은 전업시인이라니! 언제나 가난한 살림살이야 이미 오래 낯익은 얼굴이니 새삼 서러운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결실이 미미하고 한심하다는 점이다.
나름대로 세상의 부름에 어깨 걸고 장구 치고 춤을 추며 짱돌을 던지느라 10년을 보내고, 그 사이 죽거나 떠나간 이들을 생각하며 무릎을 꺾고 자책의 묵념을 하느라 다시 10년을 보냈다. 투쟁과 절망의 상상력으로 온몸의 더듬이를 곤두세우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지리산까지 흘러들어와 3만 리를 걷고, 미친 듯이 사진으로 야생화와 별을 담다 보니 어느새 23년이 흘렀다.
내 문학의 첫 번째 스승은 고향 하내리에서 구멍가게를 하던 맹인 김 씨 아저씨다. 그는 언제나 안 보이는 눈으로 하내리의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었다. 한겨울밤이면 눈 내리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며, 그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싸리비를 들고 아직 캄캄한 새벽길을 쓸 줄 아는 사람이다.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와 경운기 엔진 소리만 듣고도 그게 누구인지 다 알아챘다. 하루 종일 구멍가게 의자에 앉아서 먼저 인사를 했다.
맹인 김 씨의 안 보이는 눈을 통해 하내리의 하루하루가 빠짐없이 필사되었던 것이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10년쯤 지난 뒤에 찾아갔을 때, 일부러 짐짓 모른 체하며 “아저씨, 레종 담배 한 보루 주세요?” 말을 걸었다. 잠시 안 보이는 눈을 깜빡이더니 “혹시 원규? 이실네 막내아들 원규 아이라?” 되묻는 것이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린 시절의 내 목소리까지 기억해 내는 ‘하내리의 신’을 다시 만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문득 앞길이 캄캄할 때마다 내 고향 하내리의 맹인 김 씨를 생각한다. ‘시인의 자세 혹은 시 창작의 태도는 맹인 김 씨의 예감인가, 예감과 직감과 실천의 암수한몸인가’를 두고 나는 여전히 우왕좌왕하는 둔재로 살아왔다.
그리고 내게 또 한 분의 스승이 있으니 가은중학교 3학년 담임 조욱현 시인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교과서 밖의 시를 처음 본 것이 그의 시였다. 어느 날 교실 뒤편 환경미화 게시판에 압정으로 꽂힌 이백 자 원고지, 칸칸이 단아한 글씨로 채워진 「파계사」라는 시였다. ‘과하마 과하마 찰거머리 뒤따르지 않는 마음인양’ 이란 구절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본인은 전혀 시인 행세나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그 당시 막 창간한 『세계의 문학』 1호 등단자였다. 내가 겨우 시인이 된 것도 선생의 살가운 품성을 엿보며 ‘사람은 무엇이고, 또 시인은 무엇인지’ 오래 생각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1982년에 대구에서 이성복 시인을 만난 것은 뜻밖의 엄청난 행운이었다. 당시 나는 계명대 경제학과 신입생이었다. 고교 1학년 때 자퇴하고 만덕사에 있다가 1980년 소위 ‘10.27 법난’ 때 끌려내려 왔다. 어렵사리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겨우 대학생이 되었다. 그때 계명대 사회과학대와 외국어대가 같은 건물에 있었는데, 나는 신동집 시인이 맡은 문학강좌를 도강(盜講)하고 있었다. 그는 계명대 영문과 교수이자 외국어대 학장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강의가 중단되었다. 2주 정도 지난 뒤에 문학강좌가 다시 열렸는데 그때 이성복 시인이 ‘땜빵 강사’로 나타난 것이다.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을 깨는가』(1980)를 내면서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시적 선언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 유명한 ‘문단의 대스타’가 바로 눈앞에서 강의를 했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성복 시인은 주로 프로이트와 칼 융의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에 대해 강의했는데, 당시 경제학과 신입생에게는 너무 특별한 강의였다. 그다음 학기에는 수강신청을 해 정식으로 강의를 들었다. 당시 김용락 시인은 영문과 4학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불문과는 아니지만 자칭 이성복 제자가 되어 고 여종구 시인 등과 자주 술을 얻어 마셨다. 그러고 보니 이성복 시인에게 별을 팔아본 적도 있다. 불문과 연구실에 불쑥 찾아가 16절지에다 북두칠성 같은 별자리를 그린 뒤에 ‘이 별자리를 선생님께 분양합니다’ 서명을 한 뒤에 날도둑놈처럼 우겨서 술값을 뜯어내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엔 날카롭고 깐깐해 보이지만 한없이 따뜻한 분이었다.
그런데 불문과 교수가 뜻밖에도 김소월과 한용운, 그리고 주역에 심취해 있었다. 한번은 중문과에 개설된 주역 강의를 들으러 갔는데, 맨 뒷자리에서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는 이성복 선생과 마주쳤다. 교수가 중문과 학부생들 틈에서 공부하고 있었으니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후에 『남해금산』, 『그 여름의 끝』 등의 시집이 나온 뒤에야 선생의 깊은 뜻을 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민중문학에 깊이 경도돼 있었지만, 그의 장인 정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이성복 시인이 슬그머니 고백하던 말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시집 원고를 출판사에 넘길 때 말이야, 그때 나는 이미 다른 세계에 가 있어. 그러니까 나의 신작시집에 대해 누군가 이러니저러니 평을 할 때 나는 이미 전혀 다른 시를 쓰고 있는 거지. 나는 오래 살 거야. 요절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시를 쓸 거야.”

이원규
이원규
시인, 1962년생
시집 『달빛을 깨물다』 『강물도 목이 마르다』 『옛 애인의 집』 『돌아보면 그가 있다』, 시사진집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육필시집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