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④잠시 중지된

  • 기획특집
  • 2021년 봄호 (통권 79호)
④잠시 중지된

나는 은빛 돗자리 옆에 서 있다. 해바라기를 올려다본다. 해바라기는 나보다 크다. 해바라기는 고개를 떨구고 있고, 샛노랗던 꽃잎은 메말라 있고, 새카만 씨앗들이 드러나 있다. 나는 침을 삼킨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 105호 아주머니가 돗자리에서 일어난다. 해바라기 씨앗을 하나씩 똑똑 따낸다. 손톱으로 꾹 눌러 씨앗 껍질을 벗겨낸다. 하얀 씨앗 알맹이를 내게 건넨다. 나는 그것을 오독오독 씹어 먹는다. 햇빛에 잘 익은 맛이다. 매년 여름마다 나는 해바라기 씨앗을 얻어먹기 위해 뛰어나가 양갈래 머리를 펄럭이며 그곳으로 갔다. 그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이들이 거의 그랬다.
나는 5층짜리 열세 동으로 이루어진 주공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다. 모두 540세대가 살았다. 현관문을 열고 나와 일층으로 내려오면 곧장 놀이터가 나왔다. 놀이터는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에는 낮은 구름사다리가, 2층에는 소방관처럼 타고 내려올 수 있는 봉과 미끄럼틀이, 3층에는 비밀기지 같은 작은 오두막들이 있었다. 오두막에는 밤비나 인어공주 같은 벽화가 있었다. 3층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았던 걸 보면 그다지 높지 않았던 듯하지만, 그때의 내게는 놀이동산만큼이나 커다랗게 느껴졌다. 그 옆에는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토끼풀꽃이 아주 많았다. 나는 그곳에서 동네 아이들과 부메랑을 던지거나 야구를 하곤 했다. 잔디밭을 조금 더 걸어가면 롤러스케이트나 스케이트보드를 탈 수 있는 자그마한 광장과 약수터가 있었고,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가면 슈퍼와 약국, 문구점과 도서 대여점이 모여 있는 상가가 있었다. 바깥에서 급하게 통화를 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때, 나는 아무 가게로 들어갔다. 어느 가게에서든 내게 사십 원을 내줬다. 나는 동전을 넣고 공중전화에서 통화를 했다. 가게의 주인들은 내가 어떤 과자나 어떤 장난감을 좋아하는지, 얼마나 오래 축농증을 앓고 있는지 따위를 잘 알고 있었다. 상가 옆에서는 매일 자그마하게 장이 열렸다. 할머니들이 바닥에 앉아 직접 캐 온 쑥이나 냉이 같은 것들을 바구니에 담아놓고 팔고 있었다. 금요일이면 뻥튀기 장수가 찾아왔다. 그 시장에서 길을 건너가면 와동 주공아파트 단지가 나왔다. 와동 주공아파트 옆에는 연축 주공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건물 외벽 색깔이 다르다는 것만 빼고는 내가 사는 아파트와 다를 것이 없었다. 비슷한 평수와 구조로 된 주공 아파트였다. 세 개의 주공아파트 단지를 삼각형으로 이었을 때, 가운데 자리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그 초등학교의 아이들은 대부분 주공아파트에 살았다. 연축 주공아파트에는 비디오 대여점이 없다든가, 우리 주공아파트 약수터에서는 두꺼비 말고 사자의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온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가 가장 좋다고 우기는 일은 잦았으나, 그런 얘기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은 자전거에 자물쇠를 걸지 않았다. 그래서 자주 도난당했으나, 일주일이면 도난당한 자전거를 찾을 수 있었다. 누가 어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지 다 알고 있었으므로,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은 다른 동네의 신축 빌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집에는 거실과 안방이 따로 있었다. 화장실은 두 개나 있었다. 거실 천장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조명이 달려 있었다. 조명 위에서 민트색 팬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새집 특유의 냄새가 났다. 지나치게 넓게 느껴지는 집에서 익숙한 요를 깔고 누웠던 첫날, 엄마는 내게 말했다. 너무 안 좋은 집에서 너무 오래 살게 해서 미안했다고.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아닌데. 우리집 되게 좋았는데.”
나는 그때 우리 가족이 먹고 잠드는 열세 평의 공간만이 집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해바라기와 105동 아주머니, 오두막이 있는 3층 놀이터와 토끼풀꽃이 무성한 잔디밭, 상가 이웃들과 동네 아이들. 어린 시절에 나는 이 모든 것을 ‘우리집’으로 여겼다.

일곱살 때 주공아파트 놀이터에서   

이사를 간 동네는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북쪽에는 1천300세대짜리 1급 브랜드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남쪽에는 언덕을 깎아서 만든 비스듬한 지대에 다세대 주택과 오래된 단독주택들이 모여 있었다.
북쪽과 남쪽의 아이들은 따로따로 등하교를 했다. 북쪽의 아이들은 다마고치나 삐삐 따위를 갖고 놀았다. 그 아파트 단지의 부모들 사이에서는 중국 스타일 롱치마와 프릴 스커트를 아이에게 입히는 것이 유행이었다. 남쪽의 아이들은 남쪽 동네를 가로지르는 철로에 동전 따위를 올려놓으며 놀았다. 남쪽 동네의 부모들은 숫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는 럭비티셔츠를 아이에게 자주 입혔다. 남쪽 동네에 있는 유일한 옷가게인 ‘또래끼리’에서 옷을 사주는 부모가 많기 때문이었다. 북쪽과 남쪽은 학군도 서로 달라서, 가게 될 중학교도 달랐다. 어쩌다 서로의 지역에 놀러 가는 일은 있었으나, 말 그대로 ‘어쩌다 한 번꼴’로 있는 일이었다. 나는 남쪽 언덕 동네에 사는 아이였다. 내가 사는 빌라는 서른두 평이나 되었고, 천연소금을 넣는 연수기가 설치되어 있었고, 베란다에는 모과가 열리는 나무가 있었지만, 나는 남쪽 동네에 사는 아이였다. 놀이터나 잔디밭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내 또래 아이가 많지 않았다. 내가 사는 빌라에 또래 아이가 한 명 있긴 했다. 그 아이와 나는 학교에서 마주칠 때에는 인사를 했다. 동네에서 마주칠 때면 서로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똑같은 럭비티셔츠를 입고서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서로 피해 다녔다. 남쪽의 아이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은 담배 연기가 자욱한 PC방과 성인용 오락실이었다. 그곳에는 ‘형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누군가는 어린 나이부터 형들과 어울렸고, 누군가는 형들을 피해 다녔다. 형들을 피해 다니게 된 다른 아이들처럼, 나도 집 안에서 오래 지내게 되었다. 밖을 나오지 않았다. 우리집은 아주 넓었는데, 우리집은 내게 너무 좁았다. 누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곤란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열아홉 살이 되어갈 무렵, 나는 처음으로 가족을 떠났다. 내가 살 집을 내가 골랐다. 집을 고르는 기준은 단 하나였다. 좋은 동네일 것. 마포구 상수동에 방을 얻었다. 고작 두 평 반짜리 방이었지만, 도보 10분이면 홍대 거리가 있었다. 도서관은 물론이고 공연장과 맛집이 밀집해 있었다. 반대편으로 걸어가면 한강이 나왔다. 지하철역은 3분이면 걸어갈 수 있었다. 성인이 되어 서울에 관광을 온 동창들은 내게 전화를 하곤 했다. 홍대 어느 곳이 유명한지를 물어왔다. 가게 안에 벚나무가 심어져 있는 일식집과 연예인이 운영하는 포장마차를 나는 소개할 수도 있었다. 내가 복도형 고시텔에서 살고 있다는 것, 공용 부엌에 있는 끔찍하게 지저분한 프라이팬으로 매일 요리를 해서 먹는다는 것, 공용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을 서로 훔쳐 먹는 사람들이 내 이웃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고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일 년 정도 지났을까. 어느 날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밝게 켜져 있는 형광등이 보였다.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손바닥을 천장으로 향했다. 내 손바닥 안에 형광등의 밝은 빛이 고여 있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밝았는데, 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나 밝은데 왜 이렇게 어두운 것 같을까. 내 몸에 오랜 시간 어둠이 번져왔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아챘다. 내 방에 창문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낮 시간에 하는 아르바이트는 시급이 적었다. 월세와 식비를 해결할 정도는 되었으나, 겨울옷을 사거나 미용실에 가기는 어려웠다. 나는 호프집 밤 아르바이트를 선택했다. 밤 9시에 출근을 해서 새벽 5시까지 서빙을 했다. 집에 돌아와 씻고 나면 아침이 되어 있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밥을 챙겨 먹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방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 출근 시간이 되어 있었다. 한 달에 며칠이나 햇빛을 보았을까. 나는 그 방에서 삼 년을 살았다. 마지막 육 개월 동안은 매일 일어나자마자 한강에 나갔다. 햇빛을 듬뿍 쬐고 싶었다. 지칠 때까지 걷고 싶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지고 싶었다. 아무리 걸어도 잠이 오질 않았다. 햇빛 부족으로 인해 시작되었던 불면증은 만성이 되어 있었다.
이후로 1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녔다. 20대 내내 서울을 전전하며 알게 된 것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20대가 ‘살 만한 집’은 서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불법 증축으로 만든 옥탑방이든, 장마철마다 곰팡이와 전쟁을 치르는 반지하든,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중 무엇인가가 누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누락은 얼마나 오래, 얼마나 지독하게 지속되느냐에 따라 한 인간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있었다.
30대가 되면서 나는 서울에서 사는 것을 그만두었다. 나는 ‘작가’라는 직업을 가졌고 어딘가로 출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지역에서 살든 상관이 없었다. 집에서 일을 했고 집에서 쉬었다. 나의 능력으로 ‘작업 공간’이라는 것을 확보할 수 있는 집을 얻으려면 탈서울을 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지난 4년 동안 나는 내 집을 재택근무에 적합한 공간으로 조금씩 바꾸어왔다. 자그마한 공간이었으나 적어도 작업 공간과 잠자는 공간을 깔끔하게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프리랜서 작가로서 나는 코로나 시대에도 지내왔던 대로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있던 모임이 사라졌다는 것, 마트에서 직접 보던 장을 인터넷을 통해 보게 되었다는 것, 그 정도가 달라진 점이었다. 사람을 만날 일이 없으니 서울에 갈 일이 없어졌다. 버스를 타고 기차역에 들어가 KTX를 갈아탄 이후, 다시 지하철을 타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로서 살아가면서 나는 일정한 소득이 없고 언제 일이 끊어질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일정 정도의 불안감을 품고 살아왔다. 정규직이 누리고 있는 혜택으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불안감이 내게는 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불안감이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잠시 중지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을 나는 혜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불길한 징후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은 잘 알지 못한다.
임솔아
임솔아
소설가, 시인, 1987년생
장편소설 『최선의 삶』,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겟패킹』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