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서리뷰
‘다름’에서 ‘공감’으로

- 일역 황정은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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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다름’에서 ‘공감’으로

- 일역 황정은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최근 일본의 젊은 여성층을 중심으로 K-문학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에세이와 소설이 일본에서도 잇따라 높은 판매고를 올리면서 일본의 서점가와 출판계에 적지 않은 변화가 생기고 있다. 대형 서점의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코너가 마련되는가 하면, 일본 유수의 출판사에서 연이어 한국문학을 출간하고 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대형 서점의 한국 관련 코너가 ‘혐한’ 관련 도서로 도배되다시피 했던 것을 상기하면 놀라운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단의 신데렐라’로 떠오르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큰 주목을 받고 있는 황정은 작가의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가 오영아 번역으로 2020년 쇼분샤(晶文社)에서 출간되었다. 황정은의 소설은 일본에서 지금까지 다섯 권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사이토 마리코가 번역한 『아무도 아닌』(2017)을 필두로, 『야만적인 앨리스씨』(2018), 『디디의 우산』(2020) 그리고 최근에 『연년세세』(2022)가 출간되었다. 이처럼 한 작가의 작품이 연이어 출간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황정은 작가의 일본 내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황정은의 소설을 일본에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 사이토 마리코는 『82년생 김지영』을 번역하여 일본에서 한국문학 붐을 불러일으킨 바 있으며, 박민규의 『카스테라』로 제1회 일본번역대상을 수상하였다. 역량 있는 번역가들의 활약에 힘입어 오랜 기간 아시아 문학의 변방에서 홀대받던 한국문학이 서서히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2015년 대산문학상 수상작으로 『백의 그림자』, 『야만적인 엘리스씨』에 이은 황정은 작가의 3번째 장편소설이다. 계간 《창작과 비평》에 「소라나나나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소설을 작가가 일 년여에 걸쳐 고치고 다듬어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작가는 원래 『야만적인 앨리스씨』에 이어 또 하나의 <폭력> 연작을 쓰고자 했으나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이전과는 뉘앙스가 다른 작품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학대 속에서 황폐하고 폭력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그린 전작과 달리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자녀 방기라는 폭력에 시달린 두 자매가 <아기>의 탄생을 계기로 외부와 연결된 끈을 찾아내며 살아갈 희망을 가지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소설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소설 속 세 주인공 소라, 나나, 나기는 그들을 한 번도 환영해준 적 없는 세상에서, 비록 하찮은 존재라 할지라도 계속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이렇다 할 극적인 스토리 전개도 없이, 속삭이는 듯한 어조로 써 내려간 이들의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내면을 뒤흔들며 압도적인 감동으로 다가온다. 황정은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리드미컬한 문장과 행간의 여백이 전하는 울림이 마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소설이 전하는 감동은 직역조의 번역으로는 제대로 재현해 내기 어려운 일면이 있다. 서사 중심의 소설이 아닌 만큼 번역가의 수준 높은 언어 구사력과 함께 작품을 읽어내는 문학적 감수성과 이해력이 시험받을 수밖에 없다. 원작의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른바 황정은식 서정의 마력을 어떻게 일본어로 재현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노력이 더 보태진다면 일본 독자들에게 더욱 큰 울림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일본어판 『계속해보겠습니다』는 표지에 커다란 톱니바퀴 그림을 담았다. 공장에서 일하다 거대한 톱니바퀴에 말려들어 상반신이 갈려나온 채 죽은 두 자매의 아버지와, “사랑으로 가득하고 사랑으로 넘쳐서 사랑뿐인 사람”이었던 어머니 애자. 애자는 남편을 잃은 상실감에 아이들을 돌볼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망가져 죽은 듯이 살아간다. 한 가족의 행복을 한순간 송두리째 앗아간 사고와, 남겨진 사람들의 상실과 구원에 이르는 이야기는 일본 독자들에게는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갈 것이 분명하다. 일본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전대미문의 참사를 경험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 충격과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황정은 작가가 살포시 건네는 “계속해보겠습니다”라는 한마디가 지니는 무게와 울림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살아가야겠다는 다짐과 희망을 일깨워주는 힘을 이 책은 가지고 있다. 또한 자녀 방기, 교내 폭력, 미혼모의 출산과 한부모 가정에 대한 편견 등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소재들은 일본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사회 문제들로 일본 독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지점들이 적지 않다.

최근 일본에서의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과 수용에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기존의 한국문학이 강한 사회성과 역사의식을 내세운 차별화로 일본에서 주목을 받아온 부분이 크다면, 지금은 ‘다름’에서 ‘공감’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한국에서 여성들이 겪는 부조리한 차별과 편견을 다룬 페미니즘 문학이 한국문학 열풍에 불을 지폈듯이 ‘공감’과 ‘연대’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문학을 통해 동시대의 문제와 아픔을 공유하고, 상처받고 소외당하고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던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야가 새롭게 열리고 깊어질 때 한일관계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좋은 번역과 번역자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 일역 『계속해보겠습니다(続けてみます)』는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을 받아 오영아의 번역으로 일본 쇼분샤(晶文社)에서 2020년 발간되었다.

성혜경
서울여자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1960년생
저서 『西洋の夢幻能』 『비교문학자가 본 일본, 일본인』(공저) 『번역과 문화의 지평』(공저), 역서 『멈춰서서』 『여자의 말』 『양의의 표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