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시간성의 확장으로 이야기를 깊고 넓게

-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여자 없는 남자들」과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 원작 대 영화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시간성의 확장으로 이야기를 깊고 넓게

-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여자 없는 남자들」과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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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에 이어 국제영화상을 받은 올해 아카데미영화제에서도 이 부분 후보에 올랐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52쪽에 불과한 단편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려 있는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분명 소설을 영화화했는데 각색상이 아닌 각본상이라니. 원작이 워낙 짧아서가 아니다. 소설에서 이름만 빌린, 전혀 새로운 이야기이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거의 소설 그대로이다. 서사의 구조 역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브 마이 카>는 각색의 영화가 아니다. ‘각본의 영화’이다. 소설이 그려낸 아내의 외도와 죽음이 남긴 상처와 분노, 슬픔과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한 중년배우의 짧고 단편적인 일상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30분짜리 단편영화도 불가능하다. 사실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굳이 영화로 만들 이유가 없다.

긴 호흡, 심리와 상황의 디테일, 치밀한 플롯과 매력적인 인물들로 짜인 하루키의 장편소설과 달리 그의 단편들은 심심하다. 주제가 가진 무게에 비해 외양은 건조하고, 스토리는 단조롭고, 끝은 헛헛하다. 거기에서 그럴듯한 영화를 그려내려면 이야기와 상상력을 넓혀 한 편의 ‘장편소설’로 다시 써야 한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역시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이창동 감독의 4년 전 영화 <버닝>을 떠올리게 한다. 극적인 반전이나 마무리를 위한 멋진 착지가 없는 작품을 선택했다는 것, 그곳에 숨은 은유와 상징들을 자신의 상상력, 영상 언어를 동원한 이야기로 채워 긴 영화로 만들었다는 것. 그것이 감독 이전에 작가이기에 가능했다는 것 등이다.

이런 선택은 지나치게 자신의 세계에 집착해 영화를 외길로 나아가게 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자칫 영화가 감독이 만든 상상력과 자유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보다 이야기를 풍성하고, 깊고, 크게 만든다. 자신의 색깔을 살리는 소위 ‘작가 감독’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그 특권을 밀도 있게 마음껏 구사했다.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단조롭다. 하루키 스타일인 디테일한 일상에서 오는 감정의 미묘한 떨림이 있지만, 서사는 단편적이고 서술은 반복적이며 시선은 건조하다. 50대 후반의 배우 가후쿠와 잠시 그의 운전기사가 된 20대 여성 와타리가 중심인물이고, 소설은 둘의 대화와 작가 전지적 시점의 서술로 아내의 불륜과 그것이 남긴 상처와 후회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실이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묻는다.

가후쿠는 ‘연기’를 했다. 무대가 아닌 삶에서. 아내의 불륜을 알면서도 모른 척, 암으로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 이후에도. 아내의 불륜 마지막 상대인 젊은 배우 다카쓰키를 만나서도 둘의 관계를 모른 척하며 친구처럼 술을 마셨고, 아내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연기를 하고 끝나면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 좋았다. 대신 그는 ‘하지 못한 질문과 듣지 못한 대답’을 영원히 가지고 살게 되었다.

 

(사진출처 : (주)트리플픽쳐스)   

 

소설은 가후쿠가 마음의 상처와 비밀을 조금씩 털어놓고, 와타루가 이따금 질문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메시지들을 던져준다. 우리 모두는 연기를 한다. 연기 후에는 싫더라도 다시 나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그전과 조금 위치가 달라져 있다. 아무리 극심한 고통이 닥친다 해도 진실은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강해질 수 있으니까. 진정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끝이다. 누구에게도 강요하거나 바라지 않는다. 소설의 주인공들에게조차도. 와타리는 말없이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후쿠는 그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인다. 이후 가후쿠의 마음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다. 가후쿠가 카세트테이프로 자동차 안에서 대사를 연습하던, 일본 메이지시대로 무대를 옮겨 번안한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도 ‘슬픈 연극’이란 한마디 말로 지나간다. 소설과 어떻게 공유하고 교직했는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소설의 독자와 달리 관객은 영화에서 상상의 시간보다 ‘상상의 확인’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확인으로 누구나 쉽게 예상하는 결말, 영화 스스로 만든 상상과 자유의 함정에 빠진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영화가 가진 대중성이니까.

그래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설정을 바꾸고, 새로운 이야기를 집어넣고, 소설이 건너뛰거나 잘라버린 것들을 섬세하게 이었다. 관조적 시선을 가까이 끌어당기기 위해 도입부에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다른 단편 「셰에라자드」의 여주인공의 자극적 성행위와 소녀시절 이야기를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 분)의 아내와 연결시켰다. 섹스와 스토리 창작의 관계를 이중적 구조로 만들어 긴 서사를 만나야 할 관객들의 호기심과 심리적 자극을 높였다.

그것만으로 영화가 관객을 3시간 동안 붙잡아 둘 수는 없다. 그래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소설의 단순한 플롯에서 탈피하기 위해 희곡 「바냐 아저씨」를 소품으로 버리지 않고 연극으로 키워나갔다. 그 작업은 「셰에라자드」를 끌어오듯 단순히 영화의 이야기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아니었다. 한국어 수화를 포함해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배우들이 공연연습을 위해 만나면서 일으키는 감정 충돌과 소통 부족, 연극의 대사를 영화의 주제와 연결시켰다.

상황에 대한 현실감과 극적 긴장감, 공감대 형성을 높이기 위해 소설의 공간과 시간을 바꾼 것도 영화의 생동감과 울림을 크게 했다. 아내의 불륜 장소를 집으로, 가후쿠가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으로, 파멸이 두려워 가만히 그 자리에서 물러나 담배를 피우면서 절망과 분노를 삭이는 것으로 바꾸었다. 다카쓰키(오카다 마사키 분)가 연극에 참여하는 것으로, 가후쿠의 교통사고 원인을 음주운전이 아닌 시신경장애로 바꾼 것도 은유적이다.

이런 변화와 시도에도 불구하고 가후쿠와 와타리(미우라 토코 분)의 관계와 시간에 아무런 변화가 없이 소설을 따랐다면 영화는 어떻게 됐을까. 물론 연극 <바냐 아저씨>가 언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예술을 통해 상처가 치유되는 길도 보였고, 한편으로 다카쓰키의 비극적인 결말이 대리만족도 주었지만, 여전히 이야기가 중도에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상투적이라고 해도, 작위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가후쿠는 차분히 생각할 장소로 갑자기 와타리의 고향인 삿포로를 떠올렸다. 두 사람이 주저 없이 차를 몰고 그곳으로 갔다. 와타리는 그곳에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와타루는 그런 그녀를 위로했다. 그리고는 연극 <바냐 아저씨>의 “그래도 우리는 살아간다”라는 말과 한국에서의 와타리 모습으로 3시간을 마무리했다.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가는 이 시간성의 확장이야말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가 원작보다 깊고 넓게 기억하게 만든 가장 큰 무기일 것이다.

이대현
언론인, 영화평론가, 1959년생
저서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내가 문화다』 『유아 낫 언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