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뷔작
내 운명을 바꾼 ‘최후의 증인’

- 1974년 한국일보 창간 2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 수상작 『최후의 증인』

  • 나의 데뷔작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내 운명을 바꾼 ‘최후의 증인’

- 1974년 한국일보 창간 2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 수상작 『최후의 증인』

1974년 어느 날 나는 한국일보에 다음과 같은 사고(社告)가 실린 것을 보게 되었다.

‘한국일보 창간 20주년 기념공모 장편소설 모집-당선작 상금 2백만 원’

그야말로 군침이 도는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2백만 원이면 당시에는 아주 큰돈이었다.

그때 나는 주간지인 독서신문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미혼에 나이는 서른넷. 최종 학력 연세대 정외과 졸업.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꾹꾹 누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꿈을 펴지 못한 채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려고 매일매일 출근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해서 속으로 이렇게 자조하곤 했다. 느느니 한숨이고 담배구나. 지금은 오래 전에 담배를 끊어 건강을 되찾았지만 그때는 쉴 새 없이 줄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직장 생활이 하기 싫어 당장 때려치우고 글만 쓰고 싶었지만 입에 풀칠하는 것이 급한 일이라 마음대로 그만둘 수가 없었다. 직장 생활이 하기 싫어 사표를 내고 나왔다가 생활이 어려워 다시 직장에 들어가기를 반복했는데 어림잡아 너댓 군데는 되는 것 같았다.

 

 

 

첫 직장은 대학 입시 문제를 다루는 월간 잡지사인 진학사였다. 회사는 종로 3가에 있었는데, 얼마 후 나는 청계천과 을지로를 지나 충무로에 있는 《여원》이라는 잡지사로 직장을 옮겼다. 당시 《여원》은 여성 문제를 주로 다루는 잡지로 꽤 잘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또 직장을 옮겼는데, 중앙일보에서 새로 창간한 《여성중앙》으로 스카우트되어 간 것이다. 거기서 얼마쯤 일하다가 또 발동이 걸려 이번에는 명동성당에서 잡지를 창간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곳으로 자리를 옮겨 《창조》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옮긴 곳이 마지막 직장이 된 독서신문사였다.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취재 나간다고 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와서는 다방 구석에 앉아 소설을 쓰곤 했다. 당시 나는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좋은 소설을 써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때 내가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장편소설이 『최후의 증인』이었다. 지리산 밑에서 자란 나는 빨치산이니 공비니 하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고, 그러는 동안 빨치산에 관한 이야기 하나가 소설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일자무식에 머슴살이만 하던 사내가 어느 날 빨치산에 끌려가 어쩔 수 없이 빨치산 생활을 하다가 토벌대에 붙잡혀 억울하게 무기징역형을 살다가 20년 만에 감형되어 고향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아들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복수하는, 한국 전쟁이 낳은 비극을 그린 작품이었다.

나는 이 작품을 한국일보 장편공모에 보냈는데 얼마 후 당선 통지가 날아왔다. 그것을 계기로 여기저기에서 원고 청탁이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마침내 직장을 때려치우고 원대로 소설 창작에 전력투구하게 되었다.

『최후의 증인』 당선 상금으로 받은 2백만 원으로 서울 화곡동에 조그만 집을 한 채 구입하고 남은 돈으로는 늦장가를 가서 마침내 노총각 신세도 면하게 되었다.

한국일보에 당선작이 연재되는 동안 자매지인 일간스포츠에 『여명의 눈동자』를 연재, 장장 6년 동안 계속되어 연재가 끝난 뒤 책으로 묶으니 무려 열권이나 되었다. 나중에 『여명의 눈동자』는 MBC에서 드라마로 제작 방영되어 시청률이 50%가 넘는 공전의 인기를 누렸다.

『최후의 증인』, 그것은 나의 운명을 바꿔준, 나로 하여금 확고하게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해준 아주 고마운 작품이었다.

김성종
소설가, 추리문학관 관장, 1941년생
장편소설 『최후의 증인』 『여명의 눈동자』 『제5열』 『나는 살고 싶다』 『안개의 사나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