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단상
①미선나무 흰 꽃

  • 글밭단상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①미선나무 흰 꽃

시경재는 안성의 차령산맥 기슭, 금광호숫가에 마련한 나의 작은 작업공간이다. 사방이 적송으로 둘러싸인 외진 곳이어서 하루 종일 사람을 보기 힘들다. 그러니 적소라면 적소일 것이다. 적송 사이로 호수가 보인다. 호수는 서쪽으로 트여 일몰의 아름다운 붉은 노을을 자주 보게 된다. 일몰의 장엄함을 볼 수 있는 것은 큰 즐거움이고 기쁨이기도 하다. 하루가 숙연해지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일몰 전에는 정원의 미선나무 흰 꽃에 매료되어 넋을 놓는다. 삼월 하순부터 미선나무 흰 꽃의 순결한 색깔을 만나게 된다. 미선나무 흰 꽃이 피기 시작하면 시경재의 모든 꽃들이 미선나무 흰 꽃을 향해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맨 먼저 미선 흰 꽃으로 다가오는 꽃은 산수유다. 산수유는 은은한 샛노란 색깔로 온다. 잉잉거리는 벌들의 날갯짓을 안고 오는 것이다. 가는 가지의 미선 흰 꽃을 향해 지붕보다 높게 자란 산수유가 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미선 흰 꽃이 꽃 중의 꽃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다음으로 미선 흰 꽃으로 오는 것은 생강나무 노란 꽃이다. 생강나무 노란 꽃은 짧은 꽃대를 보이지 않게 흔들며 다가온다.

생강나무 꽃과 산수유 꽃을 구별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편이다. 둘 다 봄에 일찍 피고 색깔이 노랗기 때문이다. 미선 흰 꽃은 산수유 노란 꽃과 생강나무 노란 꽃을 품위 있게 거느린다. 산수유 노란 꽃이나 생강나무 노란 꽃에 눈길 한 번 주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두 꽃을 압도하는 기품이 있다. 여린 가지에 양쪽으로 펼치고 있는 미선 흰 꽃은 은은한 향기로 벌 나비를 사로잡는다. 향기는 수줍고 연해서 가까이 가서야 느껴진다.

봄 정원의 여왕은 아무래도 미선 흰 꽃이다. 볼수록 순결하고 아름답다. 봄이 되면 매일 미선나무 주변을 맴돈다. 혹 모르는 사이 꽃망울이 터질까 노심초사인 것이다. 가지 끝마다 붉은 꽃망울을 달고 있으면 머지않아 흰 꽃을 펼치겠다는 신호다. 그때부터 미선나무 흰 꽃을 맞을 준비를 한다. 가지들을 바로 세우고 겹쳐진 가지를 풀어주고 동사한 가지들을 정리한다. 그렇게 설레며 미선 흰 꽃을 기다리는 것이다.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관목이다. 미선나무를 세계에 처음 알린 것은 일본인 식물학자인 나카이 다케노신이다. 그가 1919년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서 미선나무 군락지를 발견하고 학계에 보고해 세계적인 식물이 된 것이다. 그 후 미선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미선나무 자생지는 충북 괴산의 송덕리와 추점리와 율지리 등 3곳, 영동읍 매천리와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와 청림리 등이다.

미선이라는 이름은 이름다운 부채라는 의미다. 열매의 모양이 부채처럼 생긴 데서 얻은 이름이다. 미선나무 군락지는 충북 진천과 괴산, 전북 내변산 직소천 유역이지만 개체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지만 대책이 없다. 종자가 잘 생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꺾꽂이로 번식이 가능해서 집안에서 개체 수를 퍼뜨리기에는 어려움이 없다.

붉은 해가 적송에 걸려 타오른다. 이제 쿵하고 호수로 내려박힐 것이다. 미선 흰 꽃에 머물고 있던 시선을 붉은 해로 옮긴다. 하루가 저렇게 붉게 지는 것이다. 사위가 고즈넉해진다. 조금 지나면 보랏빛 어둠이 시경재를 안을 것이다.

천천히 시경재 나무계단을 오른다. 4월의 흙 내음이 확 끼친다. 흙의 계절이다. 파종할 씨앗들을 펼쳐보아야 할 생명의 시간이 된 것이다.

김윤배
시인, 1944년생
시집 『떠돌이의 노래』 『강 깊은 당신 편지』 『굴욕은 아름답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바람의 등을 보았다』, 장시집 『사당 바우덕이』 『시베리아의 침묵』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