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③백영(白影)의 자취와 윤동주, 그리고 판소리

- 나의 아버지 정병욱

  • 나의 아버지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③백영(白影)의 자취와 윤동주, 그리고 판소리

- 나의 아버지 정병욱

정병욱(1922~1982)
국문학자, 수필가. 경남 남해 출생. 연세대ㆍ서울대 교수, 서울대박물관장, 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 판소리학회 창립회장, 학술원 정회원 등 역임. 저서 『한국고전시가론』 『한국고전의 재인식』 『한국의 판소리』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 등

 

아버지 정병욱 교수   

 

고전을 연구하는 국문학자였던 아버님은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나 국어 교과서에 그 글이 실리기도 하여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금년에는 탄신 백 주년을 기념하는 작은 행사가 4월부터 열리고 있어 불초자가 선친을 소개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대학과 집안에서 선친의 해타를 접하던 필자이지만 여기서는 필자의 사적인 체험과 인상을 전하기보다, 선친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가진 분들이 궁금하게 여기실 일들과 함께 선친의 손을 거쳐 빛을 보고 우리에게 전하게 된 문화유산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기로 한다.

짧은 글이지만 아버님의 고향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님은 조상들이 조선 초부터 터를 잡고 살아오던 남해군의 문항(文巷)이란 어촌에서 100년 전인 1922년 태어나셨다. 증조부님, 그러니까 선친의 조부나 그 윗대에서는 궁벽한 어촌이었지만 글을 하셔서 향교에 출입하며 전교(典校) 일을 돌보셨다 하니 중농 정도의 시골 선비 집안을 유지하셨던 것 같다. 선친은 우리 나이로 다섯 살이 되던 해, ‘고향’이라는 유년의 추억이 생길 무렵, 남해와 인접한 하동으로 이사해 이곳에서 소학교를 다니며 유소년기를 보냈다. 조부님께서 교직에 종사하기로 하며 생활 근거지를 하동으로 옮기신 때문이었다. 이후 우리 가구의 본적지는 1970년대에 들어 행정상의 편의로 서울로 옮기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하동의 덕개[德川] 마을로 되어 있었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 시인(왼쪽)과 아버지     

 

대학원 졸업식에서, 필자와 아버지     

 

그러나 본적지였던 하동의 옛집도 선친 생가였던 남해의 옛집도 세상이 한참 바뀐 지금은 모두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아버님의 자취를 기념할 수 있는 옛집 하나가 남아 있으니 그곳은 하동 본가를 둔 채 조부님이 따로 사업을 벌이며 거주하시던 광양만 진월(津月)의 별가이다. 일제가 교육과 언론에 문화적 탄압을 차츰 강화하던 1933-4년 무렵, 조부님은 교직을 그만두셨다. 그리고 그동안 시야가 넓어진 조부님은 남해의 전장(田莊)을 처분해 양조장 등 사업을 시작하기로 하고, 하동과 섬진강 하구를 끼고 이웃한 광양 진월에 사업처 겸 별가를 잡으셨던 것이다. 이곳이 양조장 사무실 마루 밑에 학병으로 끌려간 선친을 대신해 조부모님이 시인 윤동주의 시집 유고를 보존해 문화재로 지정된, 선친의 하나 남은 구택이다. 어른들의 회고에 의하면 호수처럼 그윽하고 경관이 무척 아름다웠던 진월 망덕(望德) 포구의 옛집은 동래고보(중학)와 연희전문에 유학하던 선친이 방학을 맞아 귀향했을 때, 또는 학병으로 끌려갔다 피폐해진 몸을 정양할 적에 부모 곁에 머물던 곳이다.

선친의 수필을 보면 당신이 문학을 좋아하고 국문학자가 되는 계기가 된 것은 중학교(동래고보) 시절 기숙사에서의 독서였던 것 같다. 항일 운동의 전통이 있는 이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읽으며 민족의식에 눈뜨고 문학가가 되기로 작정한 선친은 당시 학풍이 비교적 자유롭고 민족의식의 전통이 있는 연희전문 문과가 아니면 진학할 곳이 없었다 한다. 이런 선친이 두 학년 선배인 시인 윤동주를 연희전문 교정에서 만난 것은 여러 의미에서 운명적인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되는 봄날(1940년 5월), 선친은 조선 민중의 한 많은 넋이 뻐꾸기가 되어 밤새 운다는, 전설을 빙자한 글을 일간 신문에 투고하여 학생란에 싣게 되었는데, 이를 읽은 윤동주 시인이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신입생 방으로 신문을 들고 찾아와 두 분의 첫 만남은 이루어졌다(이 신문은 몇 달 후 일제 탄압으로 폐간되었다). 지기(志氣)가 상합(相合)한 두 청년은 이후 기숙사에서 아침저녁으로 만나며 “살과 뼈를 나눈 맏아우”처럼 정의가 두터워졌고, 이듬해에는 기숙사에서 나와 시인이 졸업 학기를 마칠 때까지 호젓한 환경의 하숙집에서 함께 지내며 깊은 정신적 교유를 나누었다. 「별 헤는 밤」을 비롯한 동주 시의 주옥편 다수가 그즈음 쓰였고 선친은 그 첫 독자였다.

윤동주 시인이 유학을 떠난 후 선친은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학병에 끌려갔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해서는 서울대에 편입학해 국문학자의 길로 들어서는 한편, 순절한 시인의 절친한 연전 동기들인 김삼불, 강처중 등 선배와 만나며 당신이 간직한 윤동주 시집 유고를 가지고 대시인 정지용을 움직여 그의 추천과 함께 첫 시집이 간행되기까지 막후의 과정에서 정성을 다했다. 1955년 시집의 증보판을 발행하면서는 우리 말글의 사용을 금지하던 일제 말기에 우리말로 아름다운 서정을 엮어낸 시인을 ‘저항 시인’이라 자리매김하고, 문단과 교단에서 글이나 여러 사업으로 그의 고결한 정신과 아름다운 시를 널리 알리는 데 헌신하였다.

선친은 연희전문 시절 스승들의 인도로 문학가의 뜻을 접고 우리 민족의 문학사를 연구하는 학문의 길로 들어서기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했지만, 윤동주의 아름다운 시도 독자에게 널리 읽혀야 빛을 발할 수 있듯이 문학의 고전도 현대인이 읽고 사랑해야 국민의 교양이 되고 민족문화의 유산으로 남을 수 있다는 학문적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가 우리 글을 못 쓰게 해 말과 문화조차 없애려 탄압하던 시절에 우리 문학의 전통을 더듬고 역사를 연구한다는 일은 윤동주 시인이 캄캄한 밤에 별을 바라보며 우리말 시를 쓰는 일에 버금가는 사명감과 우리 문학예술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있어야 결단하고 감당해 낼 수 있는 일이었다.

학자·교수로서 이런 사명감, 신념과 함께 예술가·문인으로서 기질과 열정을 함께 지녔던 선친은 여러 학술상을 받고 만년에는 학술원 정회원으로서 학계에서 존숭받던 학자였지만, 또한 지인들로부터 선비·학자로서는 좀 파격적인 ‘풍류 한량’이라는 농 섞인 칭호를 들으셨다. 선친이 고전 시가나 문학뿐 아니라 전통음악과 민속 연희, 무용과 미술까지 함께 학문적 관심의 영역에 두고 전통예술을 흠씬 즐겼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취미가 당신의 즐거움이나 학문적 만족에 그치지 않고 전통예술의 계승과 진흥을 위한 활동에 연결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선친은 1970년대 초 서울대의 학생들이 민중문화운동과 전통예술 애호운동의 이중적 성격으로 발기한 <가면극연구회>(최초의 대학 탈춤반) 지도교수를 맡으며 젊은이들의 전통예술/민중예술에 대한 사랑과 열망을 함께 호흡한 이후, 젊은이와 대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판소리 감상회’를 열기 시작했다. 영화 <서편제>에 그려 있듯이 당시 깔딱깔딱하는 판소리의 명맥은 국민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사장될 위기에 놓여 있었고, 그 명맥을 유지하고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젊은이들의 관심과 호응이 필요했던 것이다. 때마침 공연장 등 물적 지원을 해줄 후원자를 만났으니 바로 한국 브리태니커 창립 사장 한 창기 씨이다. 선친은 그 몇 년 전부터 마침 <대영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의 한국편집자문위원으로 위촉되고 ‘한국문학’ 항목을 집필하면서 한 사장과 자주 만날 인연이 생겼는데, 서로 뜻이 통하는 한 사장을 설득하여 의논 끝에 마침내 큰 사업을 후원해 벌이도록 한 것이다. 이리하여 선친이 창립한 ‘판소리학회’ 주최로 1974년부터 시작된 이 판소리 감상회는 이후 5년간에 걸쳐 100회까지 진행되었으며, 그 결실은 문화사적 의미를 지닐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일찍이 기산 박헌봉 선생을 도와 국악예술학교 설립과 운영에 관여하고 당시에는 판소리 음악에 대한 해설 평론을 한 월간지에 연재하기도 하여 “소리를 아는 학자”로 국악인들의 신뢰를 받던 선친을 필두로 강한영, 이보형 선생이 함께 이끈 이 공연/감상회에서 명창·고수들은 열성을 다해 연주하고, 공연이 거듭될수록 청중의 호응 또한 당연히 높아졌으며, 이후 판소리의 공연 확산과 음반 출간을 통한 대중적 보급으로 이어지며 사업은 매듭되었다. 오늘날까지 판소리의 전승은 이 감상회에서 공연한 명창들의 전승 계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판소리는 이 감상회를 통해 국민 대중 속에 소생·부활하여 우리 민족의 전통예술을 대표하는 꽃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선친은 시인·예술가로 자취를 남기지 않았지만, 민족의 영원한 별이 된 윤동주 시인의 막후에서 헌신하며 별빛을 전하고, 민족예술의 꽃으로 남은 판소리의 판 뒤에서 재력과 광대들을 동원해 소리판을 소생시켜 오늘에 전하는 등, 우리 문학예술의 유산과 전통을 전하는 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 같은 역할을 하였다. 선친의 아호는 윤동주의 시구에서 따온 ‘흰 그림자’, 백영(白影)이다. 선친은 1982년 10월에 영면하셨다.

정학성
정병욱 교수의 차남,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1949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