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①아버지와의 악수

- 나의 아버지 김구용

  • 나의 아버지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①아버지와의 악수

- 나의 아버지 김구용

편집자 주 ㅣ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는 ‘폐허의 청년들, 존재와 탐색’을 주제로 를 개최하였다. 2001년부터 매년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한국 문인들을 재조명해 온 본 문학제는 올해 22회를 맞이하여 1922년에 태어난 문인들 가운데 김구용, 김차영, 김춘수, 선우휘, 손창섭, 여석기, 유정, 정병욱, 정한숙 등 9인을 대상작가로 선정하였다. 이 중 김구용, 여석기, 정병욱, 정한숙 선생의 자녀들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회고한 글을 기고하여 싣는다.

 

김구용(1992~2001)
시인, 번역가, 경북 상주 출생. 성균관대 교수 역임. 시집 『시집1』 『시』 『구곡』 『송백팔』, 역서 『옥루몽』 『삼국지』 『수호전』, 산문집 『구용일기』 등

 

필자의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부모자식 관계가 가장 친한 관계다. 우린 친구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해. 최선을 다하고 안 되면 나랑 우동 장사 하자!” 아버지가 술을 드시면 자주 하시던 말이다.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마음의 문을 열었지만, 아버지와 친하기는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아버지가 내 친구들 아버지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이래로, 난 아버지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 것 같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마흔넷이셨고, 아버지가 환갑이실 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어렸을 때 변산 해수욕장에서 아버지가 수영복을 입고 깡마른 육체를 드러내며 해변에 등장했을 때 난 냉큼 달아나 머리만 바닷물 위로 내민 채 잠망경처럼 아버지를 관찰했다.

 

어린 시절 가족사진     

1990년대, 부모님과 함께     

 

아버지는 집에 계신 날이 많았는데 늘 한복차림이셨다. 대님 매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안방에서 식사하실 때 외에는 항상 당신의 좁은 방에서 작은 자개상을 책상 삼아 글 작업을 하셨다. 간간이 건강을 위해 딱 한 가지 동작으로 스트레칭을 하셨고, 날씨가 좋으면 기단 위를 뛰는 듯한 폼으로 걸으셨다. 외출할 땐 안방에서 옷을 양복으로 갈아입으신 후 당신 방에 있는 한 쌍의 목조 부처님을 향해 큰절을 올리셨다. 나도 학교 갈 때 마당 쪽으로 난 창을 통해 두 부처님께 고개를 숙여 절을 하곤 했는데, 흐뭇해하시는 아버지의 표정이 등굣길을 가볍게 해 주었다.

아버지는 부자유친을 대개 당신만의 방식으로 실천하셨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처음으로 자전거를 사주셨는데 기쁨도 잠시, 아버지는 사방에서 달려오는 차량에 자식들이 사고라도 당할까 봐 불안한 나머지 새 자전거 바퀴를 망가뜨렸다. 아버지에게 세상은 매우 거칠고 위험한 것이었다. 아무튼 우리도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다른 아이들처럼 자전거를 타고 동네 구석구석을 누빌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일기』 첫 면에서 아버지가 18세 때 쓴 다음과 같은 글귀를 읽을 수 있었다. “저녁때 자전거를 타고 금강으로 나갔으나 회색 풍경에 실망했다. 내일 날씨만 좋으면 자전거를 타고 멀리 가보리라.”

아버지의 일방적인 자식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하나 더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누가 봐도 잘못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그 일로 학교에 불려갔다 온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우연히 부엌에서 엿듣게 됐는데, 아버지는 뜻밖에도 내 편을 드셨다. “아니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 어머니는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의 편파 판정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고 그 후로 아버지는 내 편이라는 흐뭇한 생각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을 몇 가지 더 적어보고 싶다. 어렸을 때 ‘아버지 방’에 들어가 바닥에 놓여 있던 책 위를 무심코 넘어간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이를 본 아버지는 “이놈아, 어떻게 책을 넘어가니? 이놈아!” 하며 버럭 화를 내시고 내 볼기를 때리셨다. 그 순간 나는 겁이 더럭 났었지만 정작 엉덩이는 아프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단 목소리와 손동작을 크게 해 공포 분위기를 연출해 놓고는, 이어서 멈칫멈칫하는 모습으로 망설임을 노출시킨 후, 결국 느린 동작으로 내 엉덩이를 가볍게 치셨던 것이다. 내 생각에 아버지의 볼기 때리기는 이심전심을 유도하면서 교육적인 의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지혜롭고 유머러스한 퍼포먼스였다. 배우지도 않은 태권도 자세를 흉내 내며 마당 한가운데 있는 은행나무를 주먹으로 연타하면 방 안에 있던 아버지는 내가 기대하던 반응을 훌륭하게 연기해 주셨다. 군것질을 좋아하던 나를 조용히 불러서는 특유의 느린 동작으로 서랍 속에 있던 지갑을 꺼내 보물이라도 되는 양 동전 몇 개를 주시기도 했다. 주말에 하던 <명화극장>을 즐겨보시던 아버지는 분명 연기력을 갖춘 가장이셨다. 집에서 어린 나를 업어주셨던 일도 기억나는데 아버지 어깨 높이에서 보았던 방과 마루는 전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몸이 아프셨다. 때론 열심히 때론 투덜대며 가느다란 팔다리를 주물러드렸다. 그런데 한쪽 팔뚝은 신경이 죽었는지 아무리 세게 꼬집어도 아파하질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는 비장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더 잔인하게 꼬집어봐라.” 어느 날 나는 “아버지, 펜치로 한번 꼬집어볼까요?”라고 물어보았고 아버지는 허락하셨다. 그래서 실험을 해보긴 했는데 펜치에 힘을 세게 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의 등도 자주 긁어 드렸는데, 거기에는 등창으로 인해 커다란 흉터가 나 있었다. 아버지는 배에도 기다란 수술자국이 있었다.

아버지는 공감능력이 강하고 감성적인 분이셨다. 식사 중에 뉴스를 통해 사건·사고 소식을 접하시면 크게 분노하고 한탄하셨다. “에이, 이 나쁜 놈들!” 특히 젊은이가 목숨을 잃은 경우엔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에이, 이 불효자식들!” 식사가 끝나갈 즈음 당신이 겪은 옛날 얘기를 들려주시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감정이 복받쳐 올라 목소리가 잠시 흐려지기도 했다. 식사 후 아버지는 곧바로 당신 방으로 가서 글 작업을 하셨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작업을 하셨는데 책상다리를 한 아버지의 자세는 선비의 그것이었다. 아버지는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시험 준비를 할 때면 그만하고 어서 자라고 재촉하셨고, 심지어는 권투경기를 우주 중계하니 같이 보자고 유혹까지 하셨다. 당신의 방에서 일하시는 모습 그 자체가 말없이 이루어지는 교육이었다. 어느 깊은 밤 아버지가 이불을 덮고 엎드린 채로 스탠드 불빛 아래서 글을 쓰시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마당 쪽으로 나 있는 창을 통해 본 당신의 뒷모습이었는데, 고요한 어둠과 건조한 빛과 고독한 몰두가 응결되어 있는 그 이미지는 지금도 아주 선명하다.

술 드시는 아버지는 글 쓰시는 아버지와 사뭇 달랐다. 서로는 서로를 낳는 관계가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몇 잔을 드시면 바로 격정에 휩싸였다. “말을 말아야지”라는 말을 줄기차게 하셨는데, 이 말은 달관이나 체념의 경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 역설의 시구에는 비애와 억눌린 분노와 저항이 담겨있다. 아버지는 흐느끼며 “나는 죽고 싶다”는 말도 반복하셨는데 이것은 절망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위기의 고개를 넘고 넘어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가 표출하는 애통함에 가깝다. 그리고 이 애통함은 결국 당신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버지에게 ‘죽음’이란 단어는 내가 사진으로만 보아온 할머니에게 이르는 길인 듯싶다. 아버지는 할머니와의 단절 말고도 또 하나의 단절을 한탄하셨는데 그것은 외세에 의한 조국의 분단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가 수없이 반복한 “말을 말아야지”와 “죽고 싶다”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분단 시대를 살아온 시인의 상처와 슬픔과 분노를 넘어, 그리고 시 작업에 대한 절망을 넘어 시를 향한 사랑을 보이지 않게 품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역설은 보편의 형식이다. 아버지의 삶도 그렇지 않았을까?€밤에 다 쏟아낸 아버지는 아침이면 다시 자개상을 앞에 하고 책상다리를 한 채 글을 쓰셨다.

아버지는 술을 드실 때면 주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악수는 ‘우린 친구다’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를 잘 알고 있는 상대방에겐 난처한 개방성이었다. 아버지는 한번 손을 잡으면 항상 힘껏 쥐었다. 어머니의 손도, 내 손도 힘껏 쥐었다. 내 손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의 일방적인 부자유친에 대한 반항심에서 나도 아버지의 손을 세게 쥐곤 했다. 아버지는 말년에 누워계실 때도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면 미소와 함께 손을 천천히 내미셨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멀어지면서 가까워지는 긴 세월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런데 그때 수영복 차림으로 바닷물에 발을 담근 채 온몸으로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수평선을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김유동
김구용 시인의 차남, 강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1966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