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칼럼
4월에 다시 읽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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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4월에 다시 읽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

4월의 봄날이다. 화려하게 피어났던 벚꽃과 목련꽃이 지고 나서 지금은 라일락 꽃향기가 후각을 자 극한다. 봄의 계절 감각은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과 절정의 짧음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한다. 이러한 감응 때문인지 「황무지(The Waste Land)」의 유명한 첫 구절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 떠오른다. 이 구절 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다시 읽어 본다. 「황무지」가 처음 발 표된 것은 1922년 10월이고 T. S. 엘리엇이 창간한 잡지 《크라이테리언》를 통해서였다. 같은 해에 단행 본으로 출간하기 전에 1,000여 행에 달하는 원고를 에즈라 파운드에게 보여준 결과, 작품의 길이를 조정 하고 8개 부분을 대폭 삭제함으로써 433행으로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 무렵 T. S. 엘리엇의 생활은 그의 일생 중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괴로웠던 때였다. 고뇌의 절정에서 쓰여진 이 시는 현대인의 정신 적 메마름, 인간의 행위에 가치를 주는 믿음의 부재, 생산이 없는 성 등을 기본적 테마로 삼고 있는데, 시 인은 이처럼 타락한 현대 사회를 구원함으로써 죽음으로부터 재생하려는 정신적 탐구를 시도한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일깨운다.

T. S. 엘리엇은 433행의 장시 「황무지」에서 수천 년 인류의 의식을 압축하고 현대인의 정신적 경위를 역사적으로 묘사했다. 이 시는 통일된 줄거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모자이크식 단편성을 띤 에피소드 를 의식의 흐름을 통해 연속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진행 속에 옛것과 새것, 구체적인 장면과 환상적인 비 전 등이 다채롭게 병치되어 마치 교향악을 듣고 있는 듯한 시적 효과를 낸다. 5부로 구성된 시 속에는 성 경과 불경에서 단테, 셰익스피어, 보들레르, 바그너에 이르기까지의 원전의 인용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를 공통적으로 꿰뚫고 있는 구심점은 세속화되고 황폐화된 현대를 ‘황무지’에 비유하는 것이 다. 이는 ‘성배(聖杯) 전설’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인데, 그것에 따르면 어부왕(漁夫王)이 벌을 받아 성불구 자가 되자 그 나라는 역병이 발생하고 열매가 맺히지 않는 황폐국이 된다. 한 청순한 기사가 나타나 그리 스도의 피를 담았던 성배를 탐색하여 왕에게 발라줌으로써 저주가 풀려 풍요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 성배전설로부터 죽음과 재생의 원형 모티프를 얻어내는데, 이는 식물이 죽었다가 봄에 소생하는 사계절 의 회귀에 연유되고 결국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모티프와 상징성을 이해하는 것이 「황무지」의 난해성을 풀어가는 실마리가 된다. 인용한 첫 구절은 황무지 주민들의 삶 속에서 죽음과 생의 각성이 어렵다는 테마를 다루고 있다. 시적 화자는 사 월이 망각과 가사(假死) 상태를 원하는 주민들에게 모든 실상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가장 잔인한 달이라 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선과 악의 식별력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무감각한 삶을 죽음이라고 진단 하고, 신을 저버린 세속사회의 허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죽음의 도시를 시인은 다음과 같이 묘사 한다.

비실재의 도시,
겨울날 새벽 갈색 안개 속으로
군중이 런던교 위로 흘러간다, 저렇게 많은,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나는 죽음이 멸망시켰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 1부 <주검의 매장>

 

시적 화자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단테의 『신곡-지옥편』을 인용하여 결합시키면서, 죽음의 군상들이 지옥의 상태하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군상들은 물질문명과 상업주의로 세속화된 익명의 대중 이며, 살아있으나 죽은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진 현대인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적 유대감을 상실하고 개체화된 현대인의 고독을 본다. 1부 <주검의 매장>에 이어 2부 <장기놀이>에서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잃은 채 유희로 세월을 소모하는 현대인의 마비 상태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3부 <불의 설교>에서 성적 타락의 모습을 통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황무지」에는 권태와 좌절, 고독과 불모의 세계로부 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와 재생을 추구하는 의욕이 저변에 깔려 있다.

그리고서 나는 카르타고에 왔노라.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
오 주여 당신이 나를 건지소서
오 주여 나를 건지소서
불이 탄다

- 3부 <불의 설교>



이러한 단편들로 나는 나의 폐허를 지탱해 왔다
그렇다면 당신 말씀대로 하지요. 히에로니모는 다시 미쳤다
다타, 다야드밤, 담야타
샨티 샨티 샨티

- 5부 <우뢰가 말한 것>



<불의 설교>는 정화의 불을 통해 황무지를 벗어나는 재생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성 어거스틴 의 <참회록>과 불타의 <불의 설교>를 동시에 인유함으로써, 현대의 타락한 도덕성의 재생과 회복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5부 <우뢰가 말한 것>의 끝부분에서는 수탉의 울음소리와 함께 구원받기 위해 행하여 야 할 세 가지 명령을 우뢰로부터 듣는다. 산스크리트어로 표현된 이 말은 “다타”(주라), “다야드밤”(공감 하라), “담야타”(자제하라)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공동체적 유대감을 상실한 현대인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애적 존재, 즉 자아의 벽 속에서 나와 근본적인 고립을 극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엘리엇은 황폐하고 타락한 현대 문명을 진단하고 그 재생의 가능성을 전통의 문화와 종교 에서 찾고 있다. 현대 물질주의 문명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1차 세계대전 후의 정신적 공허와 환멸에 의 해 진정한 상호 관계가 단절된 현대인의 정신적 육체적 제 문제를 사회학적이고 문명 비판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엘리엇의 시작(詩作)은 자신의 평생을 통해 내면적 갈등의 해결을 추구하는 과정이었다. 다 시 말하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인류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한 구도적 여정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엘리엇은 전 생애를 건 정신적 탐구를 문학의 형식으로 형상화하여 들려줌으로써 현재의 우리들에게 시 인의 소명이 무엇인지 되묻고 있다.

오형엽
평론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계간 《대산문화》 편집자문위원, 1965년생
평론집 『신체와 문체』 『주름과 기억』 『환상과 실재』 『알레고리와 숭고』, 저서 『문학과 수사학』 『한국 모더니즘 시의 반복과 변주』 『현대문학의 구조와 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