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에세이 - 길을 묻다
1980년대 소설이 그린 언어의 타락

  • 인문에세이 - 길을 묻다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1980년대 소설이 그린 언어의 타락

작가 임철우가 1986년에 발표한 중편소설 「볼록거울」의 한 장면이 갑자기 생각났다. 자그마치 36년 전의 작품이다. 일제강점기가 35년이었으니 이 얼마나 긴 시간이란 말인가! 그 긴 시간을 뛰어넘어 이 소설이 왜 불쑥 내게 들이닥친 것일까?

삼인칭 주관적 시점(제한적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 소설의 시점자 <그>는 어느 대학교의 조교이다. 이 소설을 쓰던 당시에 작가는 전남대학교 영문과 조교로 근무하고 있었고, 그때의 체험이 이 소설에 재료로 채택되었다. 총학생회 구성 문제를 놓고 학생들이 중간고사 거부 운동을 벌이기로 했는데, 중간고사는 다음 날부터 시작될 예정이고 이날 밤 이백여 명의 학생들이 철야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 마침 당직 근무를 맡은 <그>는 학교 뒤 마을로 나가 저녁 식사를 하던 중에 다음과 같은 대화를 듣는다.

 

“오늘부터 철야 단식을 한다면서 너, 이렇게 먹어도 돼?”

“짜아식, 배가 고파서야 어떻게 버티겠냐. 우선 힘이 있어야 한다구.”

등 뒤에서 그런 말들이 흘러 들어왔다. 무심코 그가 돌아다보았더니, 좀 전에 들어온 더벅머리 남학생 둘이서 라면이 나오길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궤변이다 그건, 먹으면서 단식을 한다니.”

“뭐가 임마. 단식이래서 곧이곧대로 굶는다는 건 낡은 방식이야.”

“낡은 방식이라니.”

“단식은 일종의 충격 요법이야. 그러나 그것이 충격적일 수 있는 건 일단은 단식자의 허기와 고통을 공감해줄 만한 대상이 존재함을 전제로 했을 때라야만 가능해. 말하자면, 적어도 인간의 생명과 육체의 소중함을 알고 보호해주려는 최소한의 상식적인 풍토 하에서나 가능하다는 얘기지. 그런데 우린 어떤 형편이지?”

“하지만 언어의 순수성만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네 말을 뒤집어 보더라도, 순수성을 포기한 단식이란 말은 아무에게서도 충격 효과를 끌어내지 못해. 그건 오히려 생명과 육체에 대한 또 다른 모독일 수 있으니까.”

“천만에, 그건 어리석음일 뿐야. 그런 식의 순수성만으로는 현실에선 아무런 구체적 행동에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어.”

“어째서.”

“순수함과 어리석음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이기 때문이지. 우린 이제부터 상황에 대응하는 보다 전략적인 교활함이 필요해. 그건 말의 순수성을 따지기보다 우선하는 필연적이고 당면한 방법론이야.”

“전략이라구?”

“그래애. 일종의 전시 효과지. 전략적 전시 효과.”

 

이 대화를 들은 <그>는 혼자 생각한다.

거기엔 언어의 순수성이란 단어가 전략적 교활성이란 것으로 교묘하게 대체되어 있었다. 즉 전자가 후자에 대해 형식을 부여한다고 하는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는 역전(여기서 역전은 적절한 단어가 아닐 것 같음 ― 인용자)된 셈이었다. 행여 모르는 새에 이미 우리들의 언어는 그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채 저마다 뒤틀리고 변색되고 망가진 채 흉한 누더기가 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의구심은 하나의 환시를 불러일으킨다. 투명한 유리로 된 거대한 벽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체제의 타락하고 왜곡된 언어로부터 시작되었던 가증스런 그 유리의 장벽이 이제는 그 벽의 안과 밖에서 동시에 그 파괴 작업을 수행한다. 유리벽 양켠에서 온갖 언어의 무수한 날벌레들이 서로 부딪쳐 피흘리다가 추락해 부패하고, 그 시체 더미로부터 부화한 구더기떼가 유리벽 위를 기어오른다. <그러다가 마침내 언젠가는 완전한 암흑의 벽으로 변해버리고 말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달성하고자 하는 투쟁 목표(총학생회 구성)와 그 달성을 위한 전략이라는 이름 아래 왜곡되고 타락되는 언어 중에서 언어가 더 귀중한 것이라는 가치 판단을 근거로 한다.

나는 36년 전에도 <그>의 생각에 동의했었고 지금도 동의한다. 1980년대에 단식 농성을 하면서 라면을 사 먹던 그 학생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때 배운 전략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권력자의 전략은 나쁜 것이지만 저항자의 전략은 정당하다는 생각은, 저항자가 새로운 권력이 되었을 때에도 자신들의 전략은 여전히 정당하다는 믿음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그 믿음은 이중으로 잘못되었다. 언어를 타락시키는 전략은 그게 누구의 것이든 다 나쁜 것이고, 권력은, 그것이 어떤 권력이든, 위치만 바뀌었을 뿐 다 똑같은 권력이다.

언어는 순수한 것도 아니고 완전한 것도 아니며, 인간의 가능성인 동시에 한계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언어에 대한 단순한 믿음은 순진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타락으로부터 지키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언어 자체의 불완전함에서 비롯되는 혼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더라도 그 혼란을 벗어나기가 쉬운 일이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식 농성을 하면서 라면을 사 먹는 식의 언어에 대한 배반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문제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정치사상 담론(하필 이것이 떠오른 건 내가 중국학 전공자이기 때문일 것이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상해화동사범대 역사학과 쉬지린(許紀霖) 교수는 2007년에 쓴 글에서 중국의 사상계가 발전주의, 하이에크식 자유주의, 신좌파, 좌익자유주의, 신보수주의 등 다섯 가지 정치사조로 분화되었다고 주장했는데,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며 그 다섯 가지 정치사조라는 지형도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쉬지린의 설명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발전주의의 이론적 연원은 프리드만의 신고전자유주의 경제이론과 제도경제학이다. 이들은 발전을 지상 과제로 삼고, 중국의 개혁을 기업 혁신, 사유화 개혁 및 사유재산권 실행의 합법화 등의 경제 목표로 자리매김하며, 사회적 분배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는 경제 발전 중의 불가피한 진통이고 경제 발전 이후에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정치적 자유와 민주 문제는 보류한다.

하이에크식 자유주의는 개혁의 목표가 자유 시장과 헌정 민주 제도의 건립이고, 그 전제가 법치의 틀 안에서 헌법이 보장하는 공민의 권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현재의 사유화는 불공정하고 사회적 불평등은 권력이 아직 시장에서 물러나지 않은 탓이라고 보며, 정치 영역에서는 개인의 소극적 자유가 전면적으로 실현되고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좌파는 시장경제 이론이 소수 권력층이 국유자산을 나눠 먹는 데 합법성을 제공하는 구실일 뿐이며, 자기조정적 시장이라는 것은 허구적 신화일 뿐이고 자본주의의 본성은 시장을 조종하고 독점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일반 평민이 공공생활에 광범하게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적극적 자유와 직접 민주를 실행하고, 국가의 강력한 간섭을 통해 광대한 평민의 보편적 생존권과 복지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좌익자유주의는 자유주의와 신좌파의 논쟁 속에서 분리되어 나온 사조인데, 하이에크식 자유주의는 너무 우파적이고 신좌파는 너무 좌파적인 바, 좌와 우의 양극을 뛰어넘어 자유와 정의를 함께 고려하는 제3의 길을 탐색해야 한다고 본다. 경제적으로는 국가의 제도화된 힘을 통해 자유의 우선성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분배의 정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치적으로는 헌정 민주의 자유주의 민주를 시민공화주의와 숙의민주주의로 보충하고 선거 민주 외에 시민 문화와 시민 참여, 공공영역의 공공토론 등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보수주의는 국가와 엘리트와 민중의 긴장 관계를 조화시킴으로써 조합주의적 국가 모델을 건립할 것을 주장하는데, 그 건립을 위해서는 자신의 권력을 규제하고 행정의 효율을 높인 권위주의 정부, 경제 엘리트의 합법적 이익을 보호함과 동시에 정치 권리를 제한할 것, 지식계급의 권리(특히 언론 출판 및 학술의 자유) 확대, 대중의 기본 권리 보호 등이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 다섯 가지 정치사조들이 중국의 정권과 어떤 관계인지를 물어야 한다. 먼저, 발전주의는 1990년대에 이미 체제화되어 국가의 주류 이데올로기의 일부가 되었다. 신보수주의는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나타났던 신권위주의가 국가 이데올로기의 일부로 흡수되었던 것처럼 1990년대 중기 이후에 나타나 국가 이데올로기와 친화적 관계가 된다. 우리가 앞에서 말하던 언어의 혼란과 타락의 문제가 바로 이 신보수주의에 잘 나타난다. 표명하고 있는 말들은 다 근사하지만 그 실제가 말을 배반하기 때문이다. 행정의 효율은 차치하고 과연 권위주의 정부가 정말로 자신의 권력을 규제하는가? 경제 엘리트의 합법적 이익이 정말로 보호되는가? 지식계급의 권리가 정말로 보장되는가? 대중의 기본 권리가 정말로 보호되는가? 그렇지 못한 현실을 비판할 때 신보수주의의 주장은 정당한 것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주장이 그렇지 못한 현실을 은폐하고 알리바이로 제공될 때 그 결과는 언어의 타락으로 추락하는 것이다(이에 비하면 발전주의는 옳든 그르든 솔직하기는 하다).

하이에크식 자유주의는 정권과 대립적이다. 자생적 질서로서의 자유 시장을 정권이 인정하지 않고 더욱이 헌정 민주를 정권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좌익자유주의 역시 정권과 불화 관계이다. 좌익자유주의가 보기에 현 정권은 헌정 민주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자유의 우선성 원칙을 위배하면서도 분배의 정의라는 측면에서 몹시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신좌파는 좀 복잡하다. 신좌파는 헌정 민주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정권과 공통되지만 시장에 대한 부정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정권과 다르기 때문이다. 신좌파의 시장 부정은 칼 폴라니의 관점과 유사하다. 하이에크에게 시장은 자생적 질서로서 긍정적인 것이고 반대로 칼 폴라니에게 시장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부정적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문제의 초점이 시장임을 알 수 있다. 두 이론가가 반대되지만 그러나 시장을 자본주의의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 점에서 이 두 이론가와 다른 것은 지오바니 아리기이다. 아리기는 자본주의와 시장을 분리한다. 정성진 교수의 설명을 소개하기로 한다.


아리기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착취와 불평등, 팽창주의와 “강탈에 의한 축적” (accumulation by dispossession)을 고유한 특징으로 하는 것에 반해서, 시장경제는 호혜, 평등, “소유에 의한 축적”(accumulation by possession)을 원리로 한다. 그래서 아리기는 자본주의에 비해서 시장경제는 바람직한 사회 체제라고 본다. 아리기가 보기에 나쁜 것은 자본주의이지 시장경제가 아니다.

- 정성진, 「베이징의 마르크스」, 2008.

 


아리기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비자본주의적 시장경제로서 역사적 진보를 의미할 수 있다. 현 중국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딱 부합되는 것은 아리기의 이론이다. 정성진 교수는 아리기에 반대한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체제로서 자본주의를 노동력의 상품화에 기초한 일반화된 상품화폐경제=시장경제로서 간주했으며,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시장경제의 체제적 성립 가능성을 어디에서도 주장한 적이 없”고, “21세기 자본주의의 핵심적 특징인 세계화라는 것도 시장경제의 전지구적 확장, 즉 상품화, 시장화, 경쟁력 논리의 전면적 관철에 다름 아니”며,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자의적으로 구별할 경우,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중국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아니고 중국 특색의 신자유주의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리기의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에 반대하며 <베이징의 마르크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0여 년 전에 제시된 이 묘사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상업주의와 국수주의, 유교와 공자가 전면적으로 부활하고 있는 베이징 올림픽의 이면에서 이른바 애덤 스미스가 꿈꾸었던 평등과 ‘근면경제’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유령’이 어른거리는 초과착취와 불평등, 경쟁과 축적, 강탈과 제국주의의 논리로 점철된 자본주의의 현실을 목도한다.

 

시장에 대한 하이에크, 칼 폴라니, 아리기의 서로 다른 의미 부여 중 어느 것이 옳은가? 이것은 물론 이론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언어의 혼란 문제이기도 하다. 이론은 그 혼란을 초래하는 원인의 하나일 뿐이다. 이 경우 우리는 그 혼란의 내역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혼란이 타락으로 추락하는 것을 방지하고 언어를 지킬 수 있다.

내가 갑자기 1980년대 소설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또 중국의 정치사상 담론을 떠올리게 된 것은 작년에 대통령 선거가 시작된 이후 극도로 심해진 한국 정치판의 혼란하거나 타락한 말들 때문이다. 그 말들의 발화자들 중 다수가 1980년대의 학생운동과 유관하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임철우 소설 「볼록거울」을 기억나게 만든 것이다. 「볼록거울」의 마지막 장면은 다음과 같다.

 

(……) 저 교정 울타리 밖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벽 뒤편에 누군가 버티고 서서, 지금 허둥지둥 쫓겨가는 자신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한바탕 그렇듯 오만한 웃음을 왁자하니 쏟아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위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이 터지고 캠퍼스의 모든 사람들이 울며 뛰는 장면이다. 1986년 당시의 맥락에서 보면 그 장면을 지켜보는 이 ‘누군가’는 군부독재의 의인화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맥락에서 본다면 그는 누구일까.

성민엽
평론가,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 1956년생
저서 『문학의 숲으로』 『언어 너머의 문학』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