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③맨발

  • 기획특집
  • 2022년 여름호 (통권 84호)
③맨발

달이 어지간히 기울었다.

읍내를 떠난 뒤로는 내내 강을 끼고 걷는다. 강폭이 넓어져 물돌이에서나 물소리를 돌돌 굴리고 강은 희게 엎디어 있다. 강가 모래밭에 멧즘생들이 내려와 부산하다. 옥시깃대 부러뜨리고 콩 포기 헤집는 소리가 오싹하다.

앞서 영월장으로 간다던 장돌림 패는 길이 갈려 떨어져 나간 모양이다. 메아리처럼 구슬픈 아라리 창도 끊기고, 귓전의 나귀 방울소리만 딸랑딸랑 졸음 겹다. 사람 셋에 나귀 셋이 늘어서 걷는 길, 서로 묵묵하고 젖은 밤길은 줄지 않는다. 개 짖는 소리 들리면 저만치 마을이 있나 보다 했다.

제천 넘는 길은 동이가 밝았다. 그가 앞잡이를 서고 걸음 처진 허 생원이 꽁무니를 따른다. 나귀가 머리를 못 들고 둥싯대서 허 생원은 안장에 올라붙지 못했다. 무릎 병이 도진 조 선달만이 잠깐씩 나귀 등 신세를 질까, 셋은 대화장으로 읍내장으로 사흘 밤을 걸었다. 내일은 무싯날, 사람도 즘생도 주천장(酒泉場)에서 하루 쉬었다가 제천은 모레새나 넘을까 했다. 솟은 산릉에서 달이 벗겨지고 있다.

“여기서 한숨 돌릴까요.”

동이가 나귀를 세우고 선다. 물이 휘돌아 멀어지고 달빛 젖은 산길이 번했다. 제천 경계였다. 길목에 갈대 이엉을 덮은 움집 같은 게 충충하게 섰는데 동이는 그 곁으로 나귀를 끌었다. 강가 사람들은 가물 때 섶다리를 얽었다가 장마 지면 뜯어내는데 물에서 나온 나무들을 매동그려 놓은 것인가 보았다.

“거지반 왔을라. 두어 시간이면 되까?”

조 선달이 요강만 한 돌에 엉덩이를 앉히며 말했다.

“험한 길은 인저 시작인걸요.”

“진부 길보다 더할까.”

선달은 이내 왼 무릎을 싸맨 천을 감친다. 동이는 나귀 발굽을 더듬어보고 허 생원 쪽을 바라보았다. 생원은 나귀 등에서 바를 풀고 피륙 고리짝을 길바닥에 부린다. 나귀가 기신기신해서 투레질을 한다. 저 짐을 다시 묶어 가자면 시간을 좀 잡겠으나 즘생이 저 모양이니 동이나 선달은 참견을 못했다. 허 생원이 나귀 등허리에 전에 치는 휘장을 덮어주고 물러나자 동이는 메밀부침 싸온 걸 풀어서 내밀었다. 허 생원은 한편을 떼어내 고리짝에 걸터앉는다. 동이는 저만치 따로 앉는다. 허 생원과는 부쩍 더 서름서름해졌다.

 

효석은 하얼빈 키타이스카야 거리에 잡은 모던호텔에 틀어박혀 원고를 붙들고 있었다. 「모밀꽃 필 무렵」의 후속편을 쓰는 중이었다. 제목도 짓지 못한 소설은 첫 장만 열어놓고 사흘째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았다. 되지 않을 글은 어쨌든 안 되는 모양이었다. 「모밀꽃 필 무렵」의 뒷얘기를 써달라는 청탁이 수년 새 여기저기서 오고 문우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효석은 응하지 않다가 이번 북만주 여행 경비를 충당하느라 청탁을 잡고 말았다. 고료가 후한 『금융조합』지에는 후배 B군이 있어서 효석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산문을 싣고는 했다.

뒷이야기라니……. 소설에 무슨 후일담이 있단 말인가? 작품의 여운까지 삼키고 말아야 직성이 풀리는 대중의 심사가 얄팍하다. 그래서 아들이 아비를 알아보고 제 모친에게 정인을 인도해서 오래오래 잘 살았다는 걸 보여달란 소린가? 효석에게 모밀꽃은 이미 지고 난 세계였다. 그는 도시 이야기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물론 고향이며 향토 세계가 제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안다. 리얼리즘이니 동반작가니 하는 저간의 조류가 아니었더라도 그는 처가(妻家)가 있는 북지 경성(鏡城)에다가 직장을 잡고 이십 대를 보내면서 민초들의 생명력을 새삼 일깨우곤 했다. 열서너 살 전에 살던 강원 두메를 그리는 마음이 새록새록 되살아나서 애틋하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고향과 언어 감수성의 재발견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평양으로 살림을 옮겨와서도 그 흥에 흠뻑 젖어 산과 들 류의 작품을 속속 발표했다.

그는 강원도 두메에서 말을 떼고 글을 익혔으되 줄곧 도시에서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자기 세대가 가야 하는 길을 알았다. 도시를 동경하고 두메를 그리워하여 어디에도 정주 못할 길 위에 놓일 거였다.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이국의 책을 한 권 읽을 때마다 몇 뼘씩 세상 밖이 그리웠다. 지금은 모스크바를 느끼며 북만주까지 다가와 있지만 언젠가는 시베리아를 거쳐 파리의 뒷골목에 닿아 있으리라 막연히 상상했다. 그 마음은 몇 년 새 더 열렬해져서 여러 번 지면에 밝히기도 했다. 먼 세계에 대한 동경이 깊어갈수록 원형으로서의 두메에 대한 향수가 옅어지는 게 아니라 그 역시도 덩달아 깊어졌다. 요즘 젊은 문인들이 열렬하게 아류작을 쏟아내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그의 입장만 봐도 그랬다. 효석은 도스토옙스키의 어두운 소설이 심리의 과잉이라고 일갈한 바 있었다. ‘인간을 참혹하리만치 벌거벗기고 안팎의 추악한 면을 과시하는 것은 공연히 인간의 모습을 캐리커처화해서 인간성을 모독하는 짓이나 다름없다.’ 1)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생명력이 주는 아름다움을 배반하는 작가로만 보였다.

어쨌든 이 후속작은 동이의 시선으로 길에서의 이야기를 잇대어 그릴 계획이었다. 당연히 이 장돌림들을 동이의 홀어미가 지내는 제천으로 보낼 것이다. 평양에서 떠나올 때 효석은 전작이 아비가 아들의 존재를 알아채는 이야기라면 후속작에서는 허 생원의 정체를 알게 되는 동이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허 생원과 성씨 부인을 만나게 할 수는 없었다. 응당 삶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물며 소설이다. 운명의 비정은 아름답다.

제천 가는 길 중간에 동이는 허 생원이 아비라는 걸 알아챈다. 허 생원의 태도에서 그런 낌새를 눈치챌 수 있다. 허 생원에게는 낯선 부성이 생겨서 행동이 몹시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테니까. 조 선달이 먼저 알아채는 전개도 가능할 것이다. 왼손잡이가 유전입네 어쩌네 거들만하다. 극적 재미는 잃겠지만 허 생원이 동이에게 직접 고백하는 전개도 상정해볼 수 있다. 아니다. 그건 그냥 삶에서나 일어나는 일이고 소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서로 존재를 눈치만 챈 채 끝내 확인되지 않아야 한다. 그는 마음을 정했다. 동이는 주천장으로 가는 길에 허 생원의 태도와 조 선달이 흘리는 말에 힘입어 허 생원의 존재를 알아챈다. 그러나 제천으로 나서는 길에 허 생원의 나귀가 그만 말썽을 부리고 만다. 허 생원과 반평생을 보낸 늙은 나귀가 끝내 일어서지 못한다. 허 생원은 나귀가 숨을 거두기를 기다리며 주천장에 남겠다고 한다. 그들은 제천에서 만나자고 기약하며 헤어진다…….

 

북만주는 효석에게 두 번째 방문이었다. 작년 여름에 왔다가 다시 일 년 만이었는데 효석은 저번처럼 신경(新京)을 거쳐 오면서도 마음은 하얼빈뿐이었다. 신경이 위대한 도시가 될 양으로 동경 판박이로 닦여가고 있다면 하얼빈은 슬라브족의 고졸한 정취가 남아 있다. 마차, 돌을 깐 포도, 느릅나무 그늘진 딱딱한 벤치, 낡은 연못과 통나무다리, 둥근 지붕의 사원, 맹인 손풍금 연주자…… 올가와 이리나와 안나 카레니나의 세계였다. 동경 유학을 하지 않은 그는 이 발전과 쇠락의 유럽풍 풍경이 읽은 책에서 나온 듯 신비로웠다. 무엇보다도 하얼빈은 음악의 도시이기도 했다. 백군을 따라 피신한 제정 러시아 음악가들의 영혼이 흐르는 곳. 식당이며 홀, 클럽에서 레코드 복제음이 아니라 밴드 연주가 흘러나온다. 그런 황홀한 광경들을 새기면서 그는 이등열차에 실려 왔다. 거기가 숨 쉴 데라는 듯 하얼빈이 가까워질 때는 어항의 물고기처럼 창에 코를 박고 만주벌을 내다보았다. 바람을 쐬고 조선으로 돌아가면 그럭저럭 또 한 생을 견뎌내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평양을 떠나기 전에, 국경 부근 일면파(一面坡)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제자 K군에게 서신을 보내놓았는데 잘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지난 여행에는 그가 하얼빈까지 와서 낯선 도시를 안내해 주었다. 러시아의 고아 처녀 다냐와 연애가 끝나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K군은 여행 후 서신을 통해 국제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왔다. 여행 중에 효석이 자기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준 게 떠올랐다. 동성동본인 아내와 결혼할 때 집안에서 반대가 극심했다. 효석은 K군에게 뭐라고 조언했는지 또렷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사람 나름이지 않겠느냐고 하고 말았을지 싶었다. 결국 K군의 연애는 러시아 처녀를 떠나보내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하얼빈은 그대로였으되 효석은 제 그리움을 배반하듯 금방 식어버렸다. 노을 지는 송화강 요트 클럽에서 쇼팽의 야상곡 실연을 관람하면서 그는 견딜 수 없는 통증으로 가슴을 쥐었다. 평양의 푸른 집에서 아내와 나란히 앉아 레코드판을 걸어놓고 파데레프스키가 연주하는 야상곡을 들을 때는 세상은 여기밖에 없다는 아늑한 마음이 차오르곤 했다. 그러나 이 강가에서 저 음악은 더 이상 안식과 행복의 선율이 아니라 레테의 강에 흐르는 비가 같았다.

그는 강기슭으로 내려서며 한 줄기 눈물을 훔쳐냈다. 일 년 새에 아내와 석 달 된 아기를 잃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살아났다. 아내는 넷째를 해산한 후 한 달 열흘을 병원에 누웠다가 떠나갔다. 어린 것도 어미와 한 몸인 양 검불 불처럼 꺼졌다. 비정하구나. 나는 그 몇 달을 어떻게 견뎠던가? 효석은 글쓰는 일밖에 없는 듯 들어앉았다. 정월에 시작한 장편 연재를 중단하지 않고 이어나갔다. 경성에서 문우들이 위로의 편지들을 보내왔다. 그는 그들에게도 착실히 답장을 보냈다. 대학에서 퇴근해서 돌아오면 책상에 앉아 밤을 새며 중편에 단편들을 써냈고, 일어로 작품을 번역하거나 새로 써서 동경으로도 보내고, 신문이든 잡지든 청탁이 들어오는 대로 산문들을 쓰며, 달마다 무슨 설문이네 문답이네 보내오는 월간지의 잡고를 메워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을 학대하듯이 글을 썼다고 생각했다. 칠월에 장편 연재를 마치고 났을 때 그는 멍하니 천치가 되어 있는 걸 느꼈다. 가슴과 머리가 휑하니 비어버린 것 같았다. 제 일가의 비극이 한 발짝도 움직이고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는 자신이 생활 감정에 무섭게 잠식당하는 걸 느꼈다. 평양의 처남댁에게 맡겨 놓고 온 어린 세 아이가 떠올랐다. 그는 이틀을 호텔방에 누워서 앓았다. K군이라도 와준다면 하는 기대와 함께 한편으로 서신이 닿지 않아 혼자 지냈으면 싶은 마음도 들었다. 다음 날 오전에 겨우 호텔 카페로 내려갔다. 방을 나서기 전에 씻고 옷을 단정히 챙겨서 입었다. 커피를 놓고 앉았자니 두통이 가라앉았다. 그는 거리의 러시아인들과 구라파 각국에서 온 백인들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그들에게 이 극동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사무치는 마음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뿌리 뽑힌 쓸쓸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인식되었다. 그들과 자기 사이의 이질감이 메워지는 것 같았다. 작년에 이곳을 떠날 때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는 뉴스로 거리가 경색되던 일이 떠올랐다. 하얼빈에는 유대인들도 꽤 살고 있었다. 그는 마치 황폐한 유배지의 살림을 살피듯 이 도시를 새로이 감각했다.

그는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고 호텔을 나섰다. 그는 서둘러 인력거를 잡았다. 그의 기억으로 러시아 공원묘지는 동북 방향으로 사십 분 거리에 있었다. 수목이 울창한 공원 입구에서 인력거는 멈추었다. 그는 꽃장수에게 국화 한 다발을 샀다. 그는 우스벤스카야 사원에서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섰다. 느릅나무와 백양나무가 그늘진 오솔길을 깊이 들어갔다. 나무 아래, 숲 그늘에 묘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 숲 전체에 도대체 그런 묘지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효석은 찾고 있는 묘지가 있었다. 그는 작년에 왔을 때 K군을 따라 구경삼아 이 쓸쓸한 묘지를 순례했다. K군은 문학도로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열망과 절망의 감정을 드러냈다. 마치 무슨 운명을 짊어지겠다는 표정이었는데 효석은 그 태도가 부담스러웠다. 그건 물론 대학생 때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였다. 그는 문학을 하는 건 무엇을 버리고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K군이 알았으면 싶었다. 문학을 직업으로 삼는 건 결코 생활 감각을 잃거나 버리는 게 아니었다. 그 즈음 그가 부쩍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 묘지 사이를 배회했는데 문득 K군이 선생님, 하고 불렀다. 작은 묘지 앞이었다. K군은 혀를 차면서 묘지 앞에 선 비석을 보라는 시늉을 했다. 묘석에는 시들어 마른 꽃이 놓여 있었다.

“안드레이. 세상에 두 살이 채 안 된 아이예요.”

저 느릅나무 그늘이었을까? 효석은 기억을 더듬어 묘지 사이를 돌아다녔지만 그 아이의 묘지를 찾을 수 없었다. 온 숲을 헤맨다고 해도 묘를 찾는 건 난망한 일 같았다. 그러는 새에 그는 의외로 많은 묘지의 주인들이 아이라는 걸 발견했다. 그럴 테지. 비극은 도시에 흩어져 있지만 그 비극의 종착역은 여기일 테니까. 그는 열뜬 마음이 점차 가라앉는 걸 느꼈다. 무엇에 홀린 듯 여기까지 달려온 자신이 낯설기까지 했다. 그는 잡초가 묘석을 반이나 덮어가는 다섯 살 아이의 묘지에다가 국화 다발을 놓고 오솔길로 나왔다. 그리고 돌부리를 밟고서야 자신이 맨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밀꽃 필 무렵」의 뒷이야기가 될 소설은 제목이 「맨발」이었다. 그는 호텔로 돌아와 비워놓은 원고 머리에 그렇게 썼다.

그래놓고 그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동이는 진작에 허 생원이 생부인 걸 알았던 게 맞다. 봉평에서부터, 아니 그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허 생원의 사연은 장바닥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다. 충주댁한테서도 들었다. 그가 허 생원과 제천 길에 오른 건 마음을 아직 정하지 못해서였을 뿐이다. 그의 사나운 마음이 가늠이 되지 않았다.

효석은 쓰라린 발바닥을 매만졌다. 고개를 들었을 때 호텔방 벽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도스토옙스키를 이해할 것 같았다. 그는 빈 원고 칸을 바라보았다. 비정한 운명에 관통당하고도 인간이 살아가는 수수께끼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가만히 원고를 덮었다. 평양에는 아비를 기다리는 세 아이가 있고, 그는 푸른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1) 수필 「마음의 그늘」(1937), 『이효석 전집6』(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356쪽에서 인용.
*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효석의 행적은 1940년 무렵 발표한 산문들을 참고했다. 작가가 「메밀꽃 필 무렵」의 후속작을 집필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전성태
소설가,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69년생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 소설집 『매향(埋香)』 『국경을 넘는 일』 『늑대』 『두번의 자화상』, 산문집 『세상의 큰형들』 『기타 등등의 문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