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물거품

  • 단편소설
  • 2026년 봄호 (통권 99호)
물거품

비탈길 옆벽을 짚고 일어선 부용이 뒤를 돌아보았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내려앉은 평지가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되돌아갈까도 싶었지만, 섣불리 방향을 틀다가는 또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가파른 돌길이 젖어 있기까지 한 탓이었다. 겨우내 우기라더니 도시엔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렸다. 넘어지면서 손에서 놓친 휴대폰도 문제였다. 부용은 쓰레기 더미 사이로 날아간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굽어진 경사로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씨발 그냥 추천 경로로 가는 건데. 혼잣말을 내뱉은 부용이 곧바로 은서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욕하지 않기. 올봄 대학에 입학한 부용에게 은서가 요구한 것이다. 그냥 동영상이나 보고 마는 거야. 사이버대학교라 사람 만날 일 없다는 데도 아이는 완강했다. 품위를 지켜야 한다면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엄마를 가르치려 들었다. 지금 상황도 은서가 알게 되면 얼마나 입바른 소리를 해 댈지. 추천 경로를 무시하고 지도상 더 빨라 보이는 길로 무작정 간 것에 대해 그 작은 입으로 ‘구글맵은 언제나 엄마보다 똑똑하다’라고 하지 않을까. 조금 있으면 자고 있을 때 제일 예쁜 은서가 깨어날 시간이다. 부용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썰매를 탄다고 생각하자. 썰매를 타 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되뇌었다. 부용은 여름엔 워터파크에, 겨울엔 눈썰매장에 가는 그런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다. 골목에 나가 온 가족이 눈사람을 만들고 크리스마스 날 아침이면 머리맡에 당연하게 선물이 놓여 있는 그런 유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상상은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실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래가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손바닥에 닿는 돌이 차고 매끄러웠다. 부용은 천천히, 발끝에 힘을 주며 몸을 미끄러뜨렸다.

 

“간신히 내려왔더니 뭐가 보인 줄 알아?”

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갓 구운 빵처럼 나긋했다. 침구에 파묻힌 몸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추운지 식은 물주머니를 꼭 끌어안는다. 에어컨에 딸린 온풍 기능의 온도를 최대치로 올려도 공기가 차디찼다. 부용은 라디에이터를 침대에 바싹 붙였다. 둘은 도착한 지 일주일이 다 되도록 이곳의 추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추위라면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무시로 내리는 비와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부용은 물과 바람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는 중이었다.

“강이 있었거든?”

“이름이 뭔데?”

“몰라, 그냥 강.”

부용은 뒤엉킨 은서의 단발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빗었다. 아이가 머리에 손대는 걸 질색해서 잠결이 아니면 만질 기회가 안 났다. 지금처럼 머리를 자르기 전엔 산발한 아이와 함께 다닐 때마다 부용에게 도끼눈을 뜨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늙은 여자들이 그랬다. 어떻게든 남에게 훈수 두지 못해 안달 내는 것들이 꼭 있었다.

“사람들이 거기서 팔자 좋게 조깅하고 있는 거야. 막 떼 지어서. 근데 봐 봐. 나는 넘어졌지. 휴대폰 액정도 나갔지. 내려가느라 피똥 쌌지. 열을 받아, 안 받아?”

부용이 엉덩이로 경사로를 내려오는 동안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가지 않았다. 부용이 본 거라곤 위에서 던진 듯 흐트러진 쓰레기봉투들과 깨진 음료수병이 전부였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원래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게 가파른 길은 누구라도 오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길도 다 있나. 누구도 다닐 수 없는 길이라는 거. 그런 걸 길이라고 불러도 되나.

“엄만 어디 갔었는데?”

“나? 그냥 산책.”

은서가 부용을 빤히 쳐다보았다. 말없이. 미동도 없이. 순간 불안해진 부용이 은서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 우리 딸 고장 났다.”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 동안에도 은서의 눈은 부용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야생 동물처럼 감정이 읽히지 않는 눈빛. 혹은 부용의 머릿속을 스캔하는 로봇 같은 시선.

마침내 답을 도출한 은서가 확인하듯 또박또박 물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그건 근래 부용이 은서에게 가장 자주 한 말이었다.

“그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물주머니를 빼앗은 부용이 아이의 엉덩이를 두드려 침대에서 일으켰다. 라디에이터 위에 얹어 둔 양말과 속옷을 걷었다. 떠날 시간이었다.

 

*

 

‘삼인칭으로 자기소개하기’

부용은 2학기가 되어서야 창작 수업을 수강할 수 있었다. 정해진 기한 내에 강의 동영상을 시청하면 자동으로 출석이 처리되는 여타 수업과 달리 창작 수업은 매주 줌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정원도 서른 명 남짓이라 수강 경쟁이 치열했다. 학과 커뮤니티엔 창작 수업이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합평 받는 게 무섭다나. 부용은 이해가 안 갔다. 그러려면 뭐 하러 문예창작학과에 들어왔나 싶었다. 부용은 뭐든 우선 몸으로 부딪쳐 보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개론’이나 ‘문학사’, ‘강독’ 같은 꼬리말이 붙은 이론 강의들은 죄다 따분하고 재미가 없었다. 25분짜리 동영상 하나를 보는 데도 몇 번이나 화면을 멈췄다. 몇 개 안 되는 속옷을 세탁기에 돌리거나 화장실에 가서 괜히 눈썹을 다듬고 나온 적도 있었다. 열심히 필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살펴보면 두어 줄 끄적인 게 전부였다. 

“소설은 삶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크로마키 처리된 배경 앞에 선 나이 든 교수가 한 말이었다. 부용은 비슷하지만 더 멋진 말을 알고 있었다. ‘소설 쓰기란 인생을 다시 사는 것’이라는 말. 부용이 글이란 걸 써 보기로 결심한 것은 TV에서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본 어느 문학 강연 프로그램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였다.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 붙은 사이버 대학 광고를 본 것도 그즈음이었다. ‘모두에게 열린 기회’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매일 오가던 곳이었는데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그때까지 부용은 학교에 대해 별로 좋은 기억이랄 게 없었다. 책상에 앉아 있을 때면 교실 커튼에 목을 매는 상상을 자주 했었다. 말리는 사람이 없어 도리어 실행에 옮길 용기를 못 냈다. 억지로라도 검정고시를 봐 두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 건 합격 통보 문자를 받았을 때가 처음이었다. 등록금을 내고 얼마 뒤 대학교에서 입학 기념품을 보내왔다. 학교생활 안내 브로슈어와 다이어리, 볼펜, 배지 따위였다. 부용은 한동안 아일랜드 식탁 위에 그것들을 올려 두었다. 기념품을 만지작거리던 은서가 배지를 자기 책가방에 달아도 되냐고 물었다. 

 

*계간 <대산문화> 2026 봄호(통권 99호)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김유진
소설가, 1981년생
소설 『보이지 않는 정원』 『평균율 연습』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