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알들이 흐르는, 지도에 사는 동안

  • 2026년 봄호 (통권 99호)
달의 알들이 흐르는, 지도에 사는 동안

달의 알들이 흐르는

 

이야기를 만들어 사실처럼 말하는 방법이 있다면

내가 만주에서 개 타고 말 장사 할 때로 시작하는 빤한 이야기 너머

어죽을 먹을 때

 

요즘의 달은 하루에 한 번씩 동에서 나와 꼭 서산을 넘어가는데 

초소 근무자처럼 감시자처럼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가는데

옛날에는 서쪽으로 가지 않는 달도 있었단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해놓고 거짓말을 듣는 재미를 놓칠 것 같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과

지은 이야기를 사실처럼 말하는 것의 차이

 

어죽에는 물고기가 없어

죽 되었으니까

 

붕어 없는 붕어빵이 더 붕어 같지

키가 큰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고개를 쳐들게 된다 영동군 황간면 마산리에서의 일이다  

 

모든 달은 영의 동쪽에 있어서

어떤 달은 월곡에서 발 담그고 있다가 발이 빠져나오지 않아 망연자실 주저앉아

월류봉 아래 숨었다네

 

언젠가는 다시 갈 길 가야지 하면서 고개를 삐죽삐죽 내미는 통에

달 모양의 봉우리가 몇 개나 생겨나고

 

봉우리 봉우리가 달의 알 같네 

그랬을 것만 같아

어죽이나 먹자

 

너는 예전부터 뻥을 잘 쳤던 사람

빵보다도 뻥을 좋아했던 사람

착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쁘다는 말은 못 하겠다

 

월류봉 아래에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꽃들도 뻥으로 헛꽃을 달고

 

물 아래 잠긴 달도 뻥을 쳐대는데

뻥 치던 달이 위로 솟아나려 할 때마다 하늘에도 달이 있어서

다시 고개를 숨기고 그러다가 뻥을 다 내려놓고

 

달빛도 풀어놓고

달 구르는 소리마저 벗어놓은 채

 

이따금 달빛 옷 벗는 바람에 헛꽃 뻥꽃 같은 안개나 흘려놓고

메밀 쏟듯 물소리나 부려 놓는다

 

껍질이 생기지 않은 암탉 뱃속 작은 알들처럼

아직 뜨지 않는 달의 알들이 흐르는 월류봉 아래에서

 

그러니까 떠오른 달에는 껍질이 있는 거야

동그랗게 뻥을 치는

 

 

지도에 사는 동안

 

언제든 떨어질 수 있지만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를 밟아주면서 비탈을 걸었다

 

바다는 기다란 털실 같은 파도를 뱉어댄다

끝을 잡아 실패에 감을 수 없는 투명한 길들

 

실패를 실처럼 쓰려다가 망친 날들이 있어

 

버려진 길은 사라지고

스미다가 문득 뱀 대가리처럼 고개를 쳐드는 길도 있다

 

바다가 가보지 못한 땅 위의 길은 

지워지는 파도의 문양과 비슷하다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헤아린다

암산이 잘 되는 날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방파제 끝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가늘게 꼬면

오후는 금세 지나가고

바람이 풀을 지우려 할수록

풀은 더 시퍼렇게 자라난다

네가 할퀸 내 마음이 더 무성해지는 것처럼

 

해풍은 헤퍼서 매듭짓지 못한 관계를 자꾸 헝클었다

우리가 지도를 벗어날 순 없겠다

 

지도에서 태어나 지도에서 자라는 중이니까

지도는 계속 그려지니까 

 

쫀디기를 가늘게 찢어먹으며

찢은 쫀디기를 다시 가르며

모은 발끝으로 너의 발끝을 건들면 세계가 깜짝 놀랐다

 

너는 어깨를 움츠리며

지도가 정말 섬이라면 우리는 지도 속의 모든 것을 알 수도 있겠다

 

열렸다가 닫히는 순간에 섬이 되는 너의 입술

 

나는 입술만이 남은 섬을 보았고 그때부터 너는 입술만 떠 있는 섬이었다

 

너는 섬이어서 좋겠다

바깥과는 분명히 구분된 세계여서 좋겠다

나는 잔파도 같은 말의 타래를 풀어 네 입술의 섬에 바스러지고

지는 해가 흰 눈썹 같던 흰 구름을 까만 눈썹으로 바꾸어 놓을 때

흰 눈썹이 무성해지도록 아주 늙은 후 다시

검은 눈썹으로 마주한 것 같다

 

치마가 좋아 

감출 수 있잖아

쳐들어온 것들을 다 흡수한 것처럼 보여서 좋아

속은 피투성이가 되었더라도

거짓이 좋아 지도는 거짓이니까

   

이제 가자

네가 내 어깨를 툭 칠 때

한 생이 지나가고 다시 맞은 생이 길도 없이 생겼다

 

나중이라는 말은 말자

지금은 지도에 있으니까

 

일어난 나는 오금이 저려 비틀거렸고

그런 나를 너는 잠시 부축하고

 

절벽이 좋은 건 멀리 볼 수 있어서가 아니라

바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어서야

 

지도에서는 안 보이는 지도 밖이 더 넓었다

 

이대흠
시인, 1967년생
시집 『코끼리가 쏟아진다』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귀가 서럽다』 『물 속의 불』 『상처가 나를 살린다』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저서 『시를 쓰고 싶은 그대에게』 『시문학파의 문학세계 연구』 『시톡1』 『시톡2』 『시톡3』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