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아버지와 박과 봉선화

- 나의 아버지 마해송

  • 나의 아버지
  • 2026년 봄호 (통권 99호)
아버지와 박과 봉선화

- 나의 아버지 마해송

마해송(1905~1966)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1923년 일제강점기에 발표한 「바위나리와 아기별」은 구전되던 전래동화의 틀을 벗어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쓴 한국 최초의 근대적 창작 동화로 평가받는다. 일본 문예춘추사에서 편집자로 활동하면서도 「토끼와 원숭이」와 같은 풍자적인 작품을 ≪어린이≫에 연재하는 등 시대적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아동문화협회장을 역임하며 어린이 문화 운동에 앞장섰고, 아동문학을 성인 문학에 버금가는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평생을 헌신했다. 이러한 공로를 기려 제정된 마해송문학상은 오늘날까지도 역량 있는 작가들을 발굴하며 그의 문학 정신을 잇고 있다.

 

 마해송 작가    

나는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다녔는데 내가 6학년이었을 때 한 반 학생 수가 70명 이상으로 초만원이었고, 그런 반이 남녀 12반이나 되었다. 한번은 전교 글짓기 대회에서 내 동시가 일등으로 당선되어 학교에서 만든 첫 번째 학교신문 첫 장에 실렸지만 내 부산스러운 자랑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터져서 학교는 흩어지고 말았다. 

우리 삼남매는 어머니를 따라 외할머니가 사시던 마산으로 피난을 가고 아버지는 공군 종군 작가단장으로 대구에서 혼자 피난 생활을 하셨다. 우리 삼남매는 어머니가 일하시는 곳에서 하루 두 끼니의 눈칫밥을 먹으면서 살아남았는데 낮이 긴 여름철에는 너무 배가 고파서 기진맥진 그늘만 찾았고, 하늘은 늘 노랗게 보였다.

나는 날씨 좋은 날이면 자주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산 바닷가에 나가 앉아서 바다도 보고 부두까지 와서 헤엄치는 꽁치 떼를 구경하기도 했는데 언제부턴가 혼자서 동시 같은 글을 써 모으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동시나 글쓰기에 빠지면 그동안에는 배고픔도 잊을 수 있었고 나중에는 배고픔을 잊으려고 일부러 부둣가에 나가 글을 매만졌다. 그러다가 전쟁 상태가 좀 진정되었던지 청소년을 위한 학생 잡지가 몇 개 생겨나고 그런 잡지의 문예 작품 공모에 내가 투고한 작품이 자주 당선되면서 나는 어느 틈에 나라에서 유명한 학생 시인이 되었다. 

그 후 전쟁이 흐지부지 끝나고 서울로 환도를 하고 어머니가 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하면서 집안 형편은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직장이 없이 집에서 동화나 수필만 쓰시면서 저녁나절이면 찾아오시는 문인 분들과 막소주를 드셨다. 그런 분 중에서 제일 자주 오시고 만나시는 분은 단연코 조지훈 시인이셨다. 

아버지의 장편 동화 『사슴과 사냥개』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베스’라는 개는 내가 키우던 같은 이름의 개였고, 『모래알 고금』이나 『앙그리께』 같은 장편 동화에 계속 등장하는 영애라는 여자아이는 우리가 피난을 가기 전까지 함께 살던 10대의 고아였다. 그때 함께 살던 친척 할머니가 몸이 불편하셔서 할머니를 당분간 모시라고 서울에 두고 간 아이. 한두 달 예상했던 피난이 몇 해의 피난이 되어 우리가 서울의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는 동네 분들의 도움으로 편안히 돌아가셨고, 영애는 어디론지 사라졌는데 아버지는 당신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영애를 데리고 피난 가지 못한 죄의식이 상당하셨다. 그러면서 무슨 속죄 의식인지 당신의 동화 속에서 영애는 아주 착하고 풍족하고 아름다운 생을 살도록 그려져 있다.

우리는 해방 전해에 아버지랑 함께 일본서 귀국해 아버지의 고향인 개성에서 두어 해 살다가 1947년경부터 성균관대학교 입구에 있는 건평 13평짜리 조그만 집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1966년까지 살았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의 문예반과 신문반 반장 등 과외활동으로 바빴고, 온갖 학생 잡지에 글을 발표하고 백일장 같은 곳에서 상을 받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이런 초·중·고등학교 시절은 물론 나중에 대학생 시절이나 문단에 등단했을 때까지, 아니 그 후까지도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내 작품에 대해서 아무런 평을 해주지 않으셨다. 좋다, 나쁘다는 평은커녕 단 한마디 작품평도 안 하셨다. 

나중에 나이가 한참 들어서야 그 이유를 나름 깨우치게 된 것이지만 아버지는 당신이 어릴 때 부모님의 강요로 자유롭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강권에 의한 조혼의 충격 때문에 내 일에는 큰일이고 작은 일이고 무조건 아무런 참견을 하지 않으신 것이었다. 그리고 후대에서 그런 병폐와 고통을 없애기 위해 아버지는 젊은 날부터 어린이 운동에 몸을 바치셨고, 『바위나리와 아기별』 같은 동화를 쓰셨다.

 

가족사진(왼쪽부터 마해송, 차남 종훈, 부인 박외선, 딸 주해, 장남 종기)    

 

마해송 작가와 필자    

 

환도를 한 뒤, 그러니까 내가 중학생 시절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의 일상은 거의 똑같았다. 이른 아침에는 동네를 산책하시고 낮 동안에는 글쓰기, 저녁나절에는 찾아오시는 문인 분들과 소주 한 잔, 주일날 아침에는 성당행, 나머지 행사라면 장례식 같은 곳에 가시는 것인데 그나마도 대부분은 가난하거나 친인척이 드문 분의 장례식을 찾아 나서셨다. 한번은 아름다운 가곡 「보리밭」·「고독」의 작곡자인 윤용하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남산 중턱의 움막 같은 초상집을 힘들게 찾아가 문상하시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너무나 외로운 상가였다고 회상하시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느닷없이 구두닦이 소년들이 구두통을 메고 우리 집에 찾아와서 처음에는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했는데 그 소년들은 아버지를 오래 알고 지낸 듯 허물없이 아버지를 대하곤 했다. 가끔은 아버지에게서 용돈을 빌려 가기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소년들은 성균관대학교 뒤 산 중턱의 움막에서 사는 소년들이었고, 아버지는 자주 그곳에 찾아가 그런 소년들에게 도움도 주고 친하게 지내셨다. 

아버지는 일간 신문에 장편 동화를 연재하며 인기를 많이 누리신 작가이시다. 인기가 좋아서 수년 동안 대여섯 편의 장편 동화를 여러 신문에 연재하셨다. 그런 가운데 틈틈이 아버지가 조그만 앞마당에 직접 키우신 「박과 봉선화」 같은 아름다운 단편 동화도 발표를 하셨는데 나는 그 아름다운 박꽃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나눈 몇 마디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몇 해 후에 「박꽃」이라는 시를 써서 발표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모두가 가난하게 사는 이런 시절에 가난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고등학생일 때 우리가 살던 그 허물어져 가는 작은 집마저 우리들의 학비 조달 때문에 은행에 담보물이 되어있던 것을 알게 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완전히 빈 깡통 같은 우리집의 경제 형편을 알게 된 나는 갑자기 대학교 진로를 바꾸어 조그만 재능이 있다고 믿었던 문과대학을 포기하고 의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고 병역의무를 마치자마자 수련의 중에도 생활비를 준다는 미국행을 결행하고 말았다. 그래서 혹시 나는 가난을 벗어났는지 몰라도 아버지는 내가 고국을 떠난 지 겨우 4개월 뒤에 갑자기 하루 만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때 아버지의 연세는 61세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임종에도, 장례식에도 참석지 못한 불효한 큰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름다운 가난을 배신한 탓에 아직도 외롭게 외국을 떠다니고 있다.   

 

마종기
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의 장남, 시인, 1939년생
시집 『내가 시인이었을 때』 『천사의 탄식』 『마흔두 개의 초록』 『조용한 개선』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산문집 『아주 사적인, 긴 만남』(공저) 『아름다움, 그 숨은 숨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