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예슬 |
고등학교 3학년 가을, 내 방에서 수능 공부를 하던 때다. 괴로웠다. 놀고 싶은데 공부해야 해서. 단것을 잔뜩 먹고 싶은데 자꾸 살이 쪄서. 그때 국어 영역 지문에서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 윤동주 「바람이 불어」
「바람이 불어」라는 짧고 소박한 제목부터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소리로 이루어진 제목을 읽으면 이 시에 부는 바람이 강풍이나 태풍 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잠시의 고요도 허락하지 않고 하염없이 불어와 나의 존재를 스치고 지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첫 연에서 시인은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라고 문득 떠오른 의문을 중얼거리는데, 다들 어린 시절에 한 번쯤 해보았을 생각이다. 가을이 되고 낙엽이 바람에 날리면 얼핏 바람의 존재를 의식하고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감상에 젖기 마련이다. 이렇듯 시인은 평범한 감상으로 시를 시작한 다음에, 바로 이렇게 말한다.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바람이 부는데, 너무나 괴로운데, 그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사망한 시인이,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라고 덤덤하게 말하는 시행을 읽으니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왔다. 이 시행이 경험도 없고 철도 없고 시련도 모르는 고등학생의 덜미를 잡고 흔든다.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우리는 늘 괴로움에 시달리고, 그 괴로움을 투사하기 위해 허상의 구실을 만든다. 사랑이라든가. 세상과의 불화라든가. 그런데 존재 자체가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고, 잔인한 식민 권력에 시달렸고, 어디에서도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결국 폭압에 목숨을 잃은 젊은 시인이 그것조차 허상이라고 말한다.
괴로움은 인간 존재의 조건이다. 우리는 쉴 새 없이 우리를 거스르고 흔들어 놓는 바람이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바람에는 의도도 이유도 방향도 없고 괴로움은 언제나 내 안에 고여 있다. 내가 반석 위에 서 있는데도, 흐르는 강에서 멀찍이 언덕 위에 서 있는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꼿꼿하게 시인은 바람을 버텨낸다. 이 괴로움이 바람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바람이 불더라도,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을 안고 서 있다. 내 괴로움은 온전히 나의 것이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시대를 탓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괴로움을 가득 품고 바람에 맞서며 살아간다.
짧고, 쉽고, 간결하지만 완벽한 시였다. 그렇게 이 시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문득 시행을 한 줄씩 영어로 옮겨 적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The Wind Blows’라는 제목이 나의 빈약한 영어 실력으로도 무리 없이 금세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나는 마법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는 어떤 언어로 쓰인 글을 다른 언어로 옮길 때 모든 요소 — 의미, 뉘앙스, 느낌, 소리 등을 완벽하게 옮길 수는 없고 언제나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특히 시를 번역할 때 소리와 의미가 결합해서 이루는 효과까지 고스란히 옮기기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를테면 「바람이 불어」의 첫 연을 ‘ㅂ’과 ‘ㄹ’이 이어지며 만들어지는 부드럽게 흐르는 느낌을 유지하면서 번역할 수 있을까. ‘Whence, and whither/Does the wind blow.’ 이렇게 번역했더니 ‘ㅂ’과 ‘ㄹ’ 대신 ‘w’ 소리가 반복되면서 리듬이 생겼다. 시에서 중요한 요소인 음악성과 간결함은 어느 정도 유지했으나, 새로운 두운인 ‘w’는 ‘ㅂ’과 ‘ㄹ’에 비해 무거운 소리이므로 시의 느낌은 달라졌다. 고어인 whence, whither나 시행 첫머리의 does도 윤동주가 사용한 시어에 비하면 무겁다. 물론 이것보다 훨씬 더 좋은 번역도 어딘가에는 있겠지만, 어쩌면 시를 번역한다는 것은 애초에 실패가 예정된 불가능한 기획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단어 저 단어를 바꾸어 끼워 보고, 소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들어보고, 단어에 따라 다른 효과가 나는 것을 느끼고, 단어들이 서로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보는 과정이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던지! 그렇게 단어를 고르고 글을 깎고 다듬어 가면서 마지막 연까지 번역하고 나자, 예기치 않은 각운이 생겨났다. “The wind blows.”와 “The river flows.”는 소리로 각운을 이룰 뿐 아니라(blows/flows) 형태까지 유사해서 시각적으로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마법이라는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면 행운이라고 해두자.
그때 언어와 언어 사이의 변환 과정에서 잃어버리고 놓치는 것도 있지만 새로이 만들어지는 것도 있음을 알았다. 그 ‘만드는’ 감각에 나는 반해 버렸다. 영어라는 내가 잘 모르는 언어와 모어인 한국어 사이에서 언어를 조각해서 새로운 글을 만들 수 있고 내가 사랑하는 시의 다른 버전을 생산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 그때 영문과에 가겠다고 결심했고, 대학에 가서 영어를 더 배웠고, 결국 번역가가 됐다. blows와 flows가 딱 맞아떨어질 때의 기쁨을 몰랐다면 다른 일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새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을 ‘기계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걸 종종 듣는데 그럴 때마다 어리둥절한 심정이 된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번역은 머리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몸으로도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글을 이해하고, 작가가 무슨 심정으로 이렇게 썼을지 공감하고, 언어를 눈으로, 귀로, 피부로 느끼면서 이루어지는 게 번역이다. 그런데 기계에 머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슴과 몸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데, 기계가 하는 일이 어떻게 내가 하는 일과 같다고 하는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