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것은 여전히 ‘책’인가?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 촉감, 오래된 책을 다시 펼칠 때의 손때와 흔적들, 종이에 배어든 잉크 냄새, 책의 물성이 가지는 감각적인 매혹, 문장 사이에서 번뜩이는 영감을 발견했을 때의 주체할 수 없는 ‘정동’, 카페 구석에서 혼자 책 읽을 때의 ‘충만한 고독감’. 독서 장면에서 떠올릴 수 있는 이런 이미지들은 이제 과거 유물이 될지도 모른다.
책은 인간의 기술과 함께 진화해 왔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필사본의 권위가 무너질 것을 우려했다.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책을 통한 정보 검색은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새로운 미디어는 독서를 대체하기보다는 독서의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인쇄술은 더 많은 사람을 독서의 세계로 이끌었고, 인터넷은 하이퍼텍스트라는 비선형적 읽기 방식을 탄생시켰다. 책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변화해 왔을 뿐이다.
서점에서 신간 소설을 집어 든다. 표지를 넘기자, QR 코드가 보인다. 스캔하면 AI가 생성한 저자 목소리로 첫 장을 읽어준다. 단순히 정보를 인간 음성으로 변환하는 기술인 TTS가 아니다. 소설 속 인물 감정에 따라 억양이 달라지고, 배경음악이 흐르며, 때로는 주인공 내면 독백이 속삭임으로 들린다. 미국에서 출간된 이런 방식의 책은 독자 경험을 재설계했다. 종이책과 AI 오디오북이 하나의 패키지로 판매되었고, 독자들은 ‘읽는 것과 듣는 것 사이’ 어딘가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작년 국내의 오디오북 구독 서비스 회사와 전자책 구독 서비스 회사 간의 법적 분쟁이 있었다. 오디오북 회사가 독점적으로 계약한 책을 전자책 구독 서비스 회사 프로그램의 TTS 기능으로도 들을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 오디오북 회사의 독점적 권리가 침해되었다는 소송이었다. 이 해프닝은 기술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법규와 권리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AI 기술은 독서를 능동적이고 상호작용적인 경험으로 바꾸고 있다. 미국 스타트업 기업은 ‘AI 도슨트 기능’을 탑재한 전자책 앱을 출시한 바 있다. 소설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역사적 배경이나 철학 개념이 나오면, 해당 부분을 터치하면 AI가 즉각 설명해 준다. 이를테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다가 나폴레옹 전쟁의 배경이 궁금하면, AI가 당시 유럽 정세를 요약해 준다. 심지어 그 장면에서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분석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책도 등장할 것이다. 책도 아니고 게임도 아니고 영화도 아닌, 그 모든 것이 결합한 ‘멀티모달 서사 경험’.
몇 해 전 한 문학 행사에서 웹소설 이슈를 다루었는데, 종이책 출간을 전제로 하지 않는 웹소설 존재 방식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웹소설 영역에서 “‘종이책’은 무슨 의미인가?”라고 물었을 때, 한 웹소설 전문가는 “종이책은 굿즈”라고 대답했다. 아직 종이책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종이책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2. 이것은 여전히 ‘저자’, ‘편집자’인가?
AI 시대에 작가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조광희 소설 『밤의, 소설가』는 AI와 협업하면서 지나치게 AI에게 종속되는 작가의 파국을 다룬다. 인공지능 시대에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장르적 문법 안에서 제기한다. AI와 공동 창작하는 작가들은 이미 늘어나고 있다. AI가 초안을 작성하면 작가가 다듬거나, 작가가 구상한 세계관을 AI가 확장하거나, 둘이 실시간으로 대화하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방식들이 실현되고 있다. 저자 개념은 단수에서 복수로, 인간에서 인간—AI 협업으로 확장된다. 최근 한국의 대표적 작가 황석영이 신작 장편 소설을 집필하면서 AI의 도움을 받았음을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이 원로 작가가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앞으로 AI는 단순히 참고 자료에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플롯을 만들거나 특정 장면에서의 대사를 제공하는 등의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2024년 일본에서 출간한 한 라이트노벨은 작가가 대략적인 플롯과 캐릭터 설정만 제공하고, AI가 전체 서사를 생성한 뒤 편집자가 다듬은 작품으로 알려졌다.
최근 저작권 문제를 정비하기 위해 AI의 도움을 받은 책은 표시하도록 하는 제도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이 역시 기술적 진보의 무서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거의 모든 저자는 AI와의 협업과 대화를 통해 텍스트를 생산할 것인데, 어느 정도의 도움을 받았는지 어디까지가 AI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저자의 창의성인지 구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협업 과정에서 AI와 저자는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스며들면서 저술을 발전시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저작권 개념은 완전히 재검토될 수밖에 없다. AI가 기존 텍스트를 학습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면, 그 결과물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AI 개발자인가? AI를 사용한 사람인가? 학습 데이터를 제공한 원저자들인가? 인터넷에 떠도는 단편적인 정보가 아니라 더 정교한 지식이 들어있는 단행본 텍스트를 AI가 무차별적으로 학습한다면, AI 자본은 그 단행본 지식의 학습에 대해 아무것도 보상하지 않아도 되는가? 더 복잡한 질문들도 있다. AI가 특정 작가 문체를 학습하여 그 스타일로 글을 쓴다면, 이것은 오마주인가 표절인가? 독자들이 AI의 도움을 받아 ‘팬픽션’을 쓸 때, 원작자 권리는 어디까지인가? 미국 작가단체가 AI 창작에 대해 저작권과 창작 영역의 침해에 문제를 제기한 사태가 한국에서도 벌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답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법과 윤리 규범은 현기증 나는 AI 기술의 발전 속도를 쫓아가지 못한다. 창작자 권리를 보호하면서도 AI가 만들어내는 낯선 문화적 환경이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AI의 발전은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다른 차원을 만들어낸다. AI는 기획·편집, 디자인, 요약·번역, 마케팅과 같은 출판의 전 과정에 활용될 수 있다. 편집은 오랫동안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문맥을 읽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독자 감수성을 예측하는 일은 기계가 할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AI는 이미 편집실에 들어와 있다. 영국 출판사 펭귄 랜덤하우스는 2023년부터 AI 편집 보조 시스템을 시범적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원고를 업로드하면 AI가 문법 오류, 문장 구조, 반복 표현, 심지어 서사 템포까지 분석한다. 서사의 긴장과 개연성, 주인공 성격의 일관성 등의 피드백을 제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종 판단은 인간 편집자가 하겠지만, AI는 방대한 원고를 빠르게 스크리닝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 더 흥미로운 건 독자 맞춤형 큐레이션이다. 중국 한 온라인 서점은 AI 추천 알고리즘을 도입해 사용자의 독서 이력, 검색 기록, 심지어 소셜미디어 활동까지 분석하여, 정교해진 맞춤형 추천 리스트를 제공한다. 문제는 이것이 독서의 세렌디피티(serendipity), 우연한 발견의 즐거움을 제거한다는 점이다. 알고리즘은 개인이 이미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것만 추천하고, 독자는 점점 더 좁은 취향의 성 안에 갇힐 수도 있다.
AI 번역은 이미 실용화 수준에 도달했다. 수많은 AI 번역 툴들이 문맥을 이해하고 어색함도 없는 자연스러운 번역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챗GPT로 번역한 외국 소설이 ‘AI 번역, ○○○ 감수’로 표기되는 사례가 이미 생겨나기 시작했다. AI 번역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국가들 사이의 번역이라는 장벽을 낮추어 줄 것이다. 한국어과 같은 소수 언어 출판 시장에서 이 기술은 축복이다. 한국어로 된 훌륭한 책이 영어와 같은 보편 언어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로 즉각적으로 번역될 수 있다. 소수 언어의 책을 한국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다. 책과 문학의 세계화는 예상보다 가속화될 것이다.
3. 이것은 여전히 ‘읽기’인가?
AI가 만들어내는 신세계는 전혀 다른 독서의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 AI는 책의 정의와 독서의 성격을 바꾸고 있다. AI로 저술되고 최소한의 편집 과정만으로 찍어내는 ‘딸깍북’의 무차별적인 양산도 가능해졌다. 이 사태는 한편으로는 책의 생산성과 다양성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겠지만, 검증되지 않은 지식과 정보를 담은 저품질 도서가 범람할 수 있다. 종이책 한 권의 완성도에 공을 들이는 전통적인 출판사들에 이것은 위기일 수 있지만, 오히려 큐레이션과 신뢰의 가치는 더 두드러진다. 믿을 수 있는 ‘검증된 출판사’ 브랜드를 독자들이 선호하게 될 수 있다.
깊은 이해와 장기 기억에는 종이책이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종이책은 아마 더 프리미엄한 상품이 될 것이다. 한정판, 아티스트 에디션, 손으로 제본한 책 등. 책은 정보 전달 매체에서 물성을 가진 미학적 수집품과 오브제로 이동한다. 전자책은 점점 더 유동적이고 상호작용적이 된다.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독자마다 다르게 경험되는, 살아있는 텍스트. AI가 독자의 이해 수준에 맞춰 설명을 추가하고, 독자 질문에 답하며, 심지어 독자 선택에 따라 서사가 변화하는 책으로 전자책은 변모할 것이며, ‘구독형 대여 서비스’ 비중은 늘어날 것이다.
디지털 독서는 ‘읽기’ 방식 자체를 바꾸어나간다. 스마트폰 화면을 빠르게 스크롤 하며 뉴스 헤드라인을 훑고, SNS의 짧은 게시물들을 연속적으로 읽으며, 유튜브 자막을 영상과 함께 따라가는 ‘멀티모달 읽기’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현대적 독서 환경은 인지 패턴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깊이 있는 선형적 읽기보다는 빠른 스캐닝과 조각화된 정보 처리에 최적화된 뇌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반드시 퇴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방대한 정보의 바다에서 필요한 것을 신속하게 찾아내고, 여러 출처의 정보를 동시에 교차 검증하며, 다층적 맥락을 파악하는 새로운 형태의 리터러시가 발달한다. 문제는 이러한 ‘광대하고 산만한 읽기’와 전통적인 ‘깊이 읽기’가 어떻게 만나는가 하는 점이다.
AI와의 대화적 읽기는 독서의 새로운 미래이다. 책을 읽다가 궁금한 점은 즉시 AI에게 물어볼 수 있고, AI는 텍스트의 맥락을 이해한 상태에서 답변한다. 독서는 더 이상 일방향적 행위가 아니라 텍스트—독자—AI 사이의 삼자 대화가 된다. 미래의 독자들은 하나의 텍스트를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경험한다. 표면적 서사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AI가 제공하는 심층 분석과 배경 정보를 참조하고, 다른 독자들의 실시간 반응을 확인하며, 관련된 멀티미디어 자료를 넘나든다. 읽기는 단일한 선형적 경험에서 다층적 네트워크 탐험으로 변모한다. 앞으로는 AI가 중재하는 집단 지성적 읽기가 보편화될 수 있다. 고전 작품 하나를 수천 명의 독자와 수십 개 AI의 해석이 실시간으로 교차하는 협력적 독서의 거대한 지적 향연이 펼쳐질 수도 있다. 새로운 형태의 책을 통한 소통과 지식 공유라는 독서의 ‘민주화’가 가능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기술적 진보와 새로운 독서 양식 속에서, 역설적으로 ‘느린 읽기’, ‘깊이 읽기’, ‘뜯어 읽기’에 대한 갈망도 커질 것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섬세한 사유와 성찰의 고요한 시간을 갈구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미래의 독서 문화는 양극화될 가능성이 있다. 한편에서는 극도로 효율적이고 기술 의존적인 정보 처리형 읽기가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의도적으로 느리고 명상적인 독서의 추구가 있을 수 있다. 오랜 시간을 바쳐야 하는 ‘벽돌 책’의 독서는 오히려 희귀하고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문해력’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도록 만든다. 미래의 독자에게 필요한 ‘리터러시’는 AI 생성 텍스트와 인간 저작물이 혼종적으로 뒤섞인 환경에서, 정보 출처와 신뢰성을 판단하는 비판적 정보 평가 능력이다. 어떤 알고리즘이 이 정보를 선별했는가, 어떤 편향이 내재해 있는가를 파악하는 비판적 메타 리터러시가 요구된다.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맞춤형 정보 거품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맥락을 탐색하는 독서 능력, 새로운 독서 도구와 플랫폼을 활용하면서도 기술에 종속되지 않는 능력, 단편적 정보들을 연결하여 전체적 지형도를 그려내는 능력이 오히려 중요해진다.
우리는 다시 ‘독서란 무엇인가’라고 물어볼 수 있다.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행위가 아니다. 타자의 언어와 만나고, 낯선 세계를 경험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유와 내면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 / 마주한 공동체』에서 조르주 바타유의 ‘우정의 공동체’를 빌려, 우연한 문학적 소통을 통해 만들어지는 ‘문학적 공동체’를 말한 바 있다. 독서의 경험은 타자를 향한 열림과 움직임, ‘찢김과 소통’이다. “모르는 자와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겨냥하고 있지 않은 책의 익명성”1)은 AI 시대에도 책으로 연결된 익명 공동체를 만들어 낼 것이다. AI 시대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독서 경험은 ‘나’에게도 타자에게도 환원되지 않는 미지의 언어 공간을 생성한다. 시공간을 넘어서서 인간을 연결하는 책의 마법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다. 일종의 광대한 집단지성으로서의 AI는 무수한 익명의 타자들을 만나는 거대한 지식과 언어의 바다이다. 인간이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예측할 수 없는 AI라는 바다의 심연에도, ‘책’이 존재한다는 것은 단지 희망이 아니다.
1) 모리스 블량쇼·장-뤽 낭시, 박준상 역, 『밝힐 수 없는 공동체 / 마주한 공동체』, 문학과지성사, 2005, 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