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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시대가 본격적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지구화란 근대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지구적 차원의 새로운 질서와 생활양식이 출현을 가리킨다. 21세기에 들어 비약적으로 발전한 정보통신기술 체제는 지역·국가·대륙의 경계를 초월하는 지구공동사회의 형성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러한 지구공동사회의 도래는 그에 상응하는 지구문화론의 필요성을 불러오고 있다. 지구문화론은 정치·경제·문화적 생활양식의 초국가적 이동과 더불어, 디지털 정보통신 환경 속에서 세계화와 지역화가 상호 작용하며 형성·재구성되는 ‘지구지역화’의 특성을 지닌다.
21세기 들어 세계적 현상으로 부상한 한류는 한국에서 출발한 지구문화론적 현상으로 파악된다. 한류를 통해 우리는 문화 주변국, 문화 수입국의 위치에서 점차 문화 중심국이자 문화 수출국으로 위상을 전환해 가고 있다. 이는 선진 문명과 문화가 서양의 전유물이며, 동양은 이를 모방하거나 차용하는 하위 주체에 불과하다는 오리엔탈리즘적 인식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근대화 이래 ‘새것 콤플렉스’에 시달려온 한국 사회는 한류를 계기로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고, 우리 문화의 정체성과 세계적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성찰하고 재발견하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 었다.
오늘날 한류는 K-팝, K-드라마, K-영화 등 대중문화 중심에서 K-문학, K-종교·사상 등 고급문화 전반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한류의 지속가능성과 질적 차원의 발전이다. 이에 대한 해법 역시 한국발(發) 지구문화론으로서 한류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한류는 한류를 벗어나야 한다.” K-컬처의 ‘K’는 더 이상 단순한 ‘한국적인 것’의 표지가 아니라, ‘세계적인 가치를 창조하는 한국’이라는 의미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는 지구문화론이 근대 국민국가의 정치 원리(평등)나 경제 원리(자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구공동사회의 ‘살림의 원리’(문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 지구사회는 진화 혹은 붕괴라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기후 위기를 비롯한 생태계 파괴, 식량 부족, 생명 가치의 상실은 문명 전환기의 긴급성을 한층 심화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명 전환기에 요구되는 한류 미학의 지향성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전 지구적 질병의 시대에 요청되는 치유의 미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악마를 물리치는 노래의 주술성을 핵심 모티프로 삼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주제의식 또한 이러한 질문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주목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김지하의 다음과 같은 논의는 선구적인 통찰로 다가온다.
시문학을 비롯한 오늘날의 모든 문화의 첫째가는 기능은 ‘소통’과 함께 ‘치유’이다. 이 컴컴한 질병과 죽음의 시대에 치유의 예술만이 참다운 ‘흰 그늘’이다. ‘흰 그늘’은 그리하여 이 대혼돈 속에서 신음하는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일체를 다 같이 거룩한 우주공동체로 들어올리는 모심의 세계문화대혁명 (…) 후천개벽의 약손인 것이다.
- 『흰 그늘의 산알 소식과 산알의 흰 그늘 노래』(2010), 서문 일부
김지하는 한류의 인류 문화사적 의미와 성격, 그리고 그 지향성을 자각적으로 탐색하고 노래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컴컴한 질병과 죽음의 시대”에 우주공동체적 신성성을 회복할 수 있는 미학적 원형으로서 ‘흰 그늘’을 제시한다. 판소리의 ‘시김새’, 전통 음식 문화의 ‘삭힘’과 근원동일성을 지니는 ‘흰 그늘’의 미의식은 깊은 ‘그늘’ 속에서 눈부신 ‘흰’이 반사되는 반대일치의 역설로서 중력과 초월, 혼돈과 질서, 세속과 신성의 통합을 통한 치유와 신생의 과정을 표상한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일체를 거룩한 우주공동체로 인식하고 소통하며 공생하는 생명 운동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김지하의 ‘흰 그늘’ 미학은 문명 전환기 한국발 지구문화론으로서 한류 미학의 성격, 가치, 지향성의 원형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삼 깊이 주목하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