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김남주 선생과의 대화
- 시인 김남주 선생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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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1945~1994) 시인,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재학 시절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배포하다 제적되었다.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약칭 남민전) 사건으로 수감된 그는 긴 옥중 생활 동안 우유 곽이나 낙엽 등에 못으로 시를 기록했으며, 1984년 이를 묶어 시집 『진혼가』를 출간하여 문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시 세계는 화려한 수사 대신 직설적인 문체를 사용하여 사회적 모순을 고발하고 민중의 해방과 인간 존엄의 가치를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
![]() 김남주 시인 |
매년 이맘때면 김남주 시인이 생가에 와서 일없이 자고 깨고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옛날에 집 지을 때 황새가 터를 닦았다던 해남 산기슭은 저녁 평화가 일품이다. 일과를 마친 사람과 새들이 돌아와 몸을 뉘지만, 들판의 안개들도 아득히 밀려와 밤새 고인다. 하루의 기운이 모두 다가와 대지의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다. 깊은 어둠 속에서 생명의 파동을 느낄 수 있는 장소는 인간의 마음을 한사코 정갈하게 만든다. 대숲에 부는 바람은 바다의 파도처럼 사나워서 뒤란에 댓잎인지 콩새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팔랑거리며, 전쟁터에서 표창이 날아와 떨어지듯이 바닥에 쌓인다. 이불속에 누운 시인의 가슴도 대숲을 따라 출렁댔을 것이다. 그리고 숙면의 고요가 끝나고 여기저기 닭 우는 소리가 들리면 온 마을이 순식간에 소란해진다. 마치 하늘이 깨어진 것처럼 동녘 빛이 쏟아지면서 갖가지 소리가 준동하는 것이다.
“형님!”
한동안 기척이 없었다. 서울에서는 체 게바라지만 생가에 오면 노자인지라 게으르기 짝이 없다.
“몸이 불편하셔요?”
한참을 기다리자 슬그머니 문이 열렸다.
김남주 어쩌자고 또 왔냐? 내가 민폐다 민폐.
김형수 제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어요. 듣고 싶은 말씀도 있고요.
나한테 들을 얘기가 어디 있다냐? 이제 망월동에도 안 갈란다. 친구들한테 추모 행산가 뭔가도 그만두라고 해라.
김남주 시인의 아버지는 머슴이었다. 신분 차별을 뼈아프게 겪은 터라 아들이 검‧판사가 되기를 고대했으니, 김남주는 성장기 내내 이 문제로 시달렸다. 주위에서 어르신의 소원대로 고시라도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시인이 몸서리를 친 적이 있었다. “내가 인두겁을 쓰고 어찌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김남주 시인은 타인 위에 군림하는 인간을 말종으로 여겼고, 그런 일을 인간사 최악의 범죄로 생각했다.
사람한테는 말이다. 아무 자격이 없어도 남을 심판하려는 본능이 있어야. 그걸 극복하지 못하면 존재가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아.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일 위험한 것들이 알량한 실력으로 권력을 쥐겠다고 날뛰는 놈들이야.
하긴, 일명 <죽창가>라 하는 시 「노래」를 그들은 한국판 ‘매카시즘’ 땔감으로 이용하려 들었다. 김남주는 그걸 시인이 되기 전에 동학농민군의 길을 답사하면서 지었다.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한 해에 친구 이강과 함께 ‘만석보’를 둘러보고, 저녁나절이 되자 황토현에 들러 동학혁명기념탑에 참배할 때였다. 놀랍게도 갓 쓰고 흰옷을 입은 노인들이 모여서 시국 타령을 하더니 어지러운 세상을 한탄하고 있었다. 노인들은 비문을 손바닥으로 쓸기도 하고,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짓기도 하는 걸 보고 김남주는 강렬한 계시를 얻었다. 두려움을 벗어던지고 민족의 부름에 따르기를 산천이 명한다고 느낀 것이다. 그래서 녹두장군의 영령 앞에서 결의를 다지는 의식을 치르며, 저 푸른 소나무처럼, 더 푸른 대나무처럼 살자고 다짐하는 격문을 토하는 바 그것이 「노래」라는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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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형님! 시의 첫 소절을 묻는 후배가 많아요. ‘날라와 더불어’가 무슨 뜻인지 나도 어렴풋이는 알지만 정확한 뜻을 몰라서요.
어렴풋이 느끼면 되지. 시가 과학이냐?
뜨끔했다. 나는 후배들에게 또렷하게 설명해야 직성이 풀렸다. ‘두메’ ‘산골’ ‘들판’이 들려주는 말은 ‘나’에게 ‘더불어’ 저항의 몸짓이 되라는 말이다. 천지에 가득 찬 ‘소리 없는 아우성’이 전하는 것은 ‘천 개의 소리’, 즉 하나이면서 모두이고, 다중이면서 하나인 ‘함성’이다. 그래서 함성은 ‘단자’가 아니라 ‘복수’의 산물이나 단독자의 외침도 세계의 근원을 가리킬 때는 함성이 된다. 마치 봄이 되자 터져 나온 뻐꾸기의 울음처럼 자신과 함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중의 소리를 깨우는 까닭이다. 중요한 사실은 김남주가 시를 쓴다는 생각도 없이 「노래」를 지은 때가 지하신문 <함성>을 내기로 착상한 순간이라는 점인데, 그가 존재를 알리는 최초의 역사 행위가 되는 <함성>은 지하신문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그의 독보적인 개성의 정체이기도 하다. 그렇다. 자연인 김남주에게서는 도대체 모가 난 대목이 어느 쪽에 붙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화가 나는 자리에서도 허공에다 “허허” 헛웃음을 날리고 나면 끝이었다.
작년에 안동과 해남에서 공동 행사를 올렸는데, 주제가 ‘이육사와 김남주’였거든요. 그때 내가 형님 시 「나의 이름은」을 낭독했어요.
김남주의 별명 ‘물봉’이 ‘자발적 무능’을 선택한 증거라는 뜻으로 꺼낸 말인데, 첫 연이 이랬다.
나의 이름은
2164 붉은 딱지입니다
나이는
일제가 뒷문으로 쫓겨 갈 때 어머니의 배 속에 있었고
미제가 앞문으로 쳐들어올 때 세상에 나왔습니다
소위 해방둥이입니다
‘2164’는 죄수 번호이니, 이육사에서 작대기 하나가 더 붙은 셈이고, ‘붉은 딱지’는 그도 무서운 사상범이라는 표식이며, 이어지는 주소 광주 ‘문흥동’은 광주교도소가 위치하는 곳이라는 해석을 내가 덧붙였다.
오사허네. 너는 뭘 갖다붙이는 걸 잘하더라 잉.
나는 김남주의 해남 사투리를 미학적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발언해 왔다. 한 언어 속에는 수만을 헤아리는 낱말과 숙어, 은유가 있고, 또 그걸 구축하여 세계를 조직할 수 있는 문법이 있다. 그래서 지역‧계급‧계층에 따라 달라지는 사투리 중에서 어떤 한국어로 세상을 말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성격과 상처의 내용이 달라진다. 김남주는 어려서부터 특히 고향 말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전라도 변경 해남 논둑에서 형성된 투박한 억양과 어문 구조와 사유 체계가 지닌 소통 형식의 독자성을 그처럼 일관되게 고수한 지식인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나를 풀어주면 안 되겠냐? 낮잠도 자고 싶고 책도 읽고 싶고 그래야.
아무 대꾸 없이 내가 시인의 대표작 「학살1」을 암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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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어느 날이었다 /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 밤 12시 나는 보았다 /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 밤 12시 나는 보았다 /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 밤 12시 나는 보았다 /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 밤 12시 나는 보았다 /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너는 시를 다 외워버린다 잉.
제가 ‘밤 12시’의 실체를 찾아낸 것 같아요. 『대주교 윤공희』라는 평전을 쓰다가 발견한 일인데, 1980년 5월 23일에 광주 학동성당 신부가 대주교님에게 묻습디다. 간쉬한이라는 미국인 신부거든요. 그 양반이, “대주교님! 미 대사관에서 송정리로 빠져나오라는 통보가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러니까 광주에 있는 미국 민간인을 구출할 항공편이 밤 12시에 송정리 비행장으로 오기로 한 거였어요. 신부님이 고민하다가 자기는 미국인이지만 광주 사제라 하여 남더라고요. 그렇다면 형님의 ‘밤 12시’는 시적 은유의 장치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비밀의 시간’이었던 겁니다. 제 말 틀렸습니까?
너는 아직도 그런 게 중요하냐?
그럼요. 5·18 현장에 이런 시간이 존재했다는 건 사태가 면밀한 계획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증거이며, 한국의 작전지휘권을 가진 자들이 신군부를 결재했다는 뜻이 숨어 있어요. 맞죠?
누구한테 들었냐?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제가 궁금한 건 교도소에 수감 돼 있었는데, 어떻게 그걸 알았느냐는 겁니다.
교도소에서 밤마다 심포지엄을 하듯이 토론했어야. 홍남순 변호사, 송기숙 교수, 박석무 선배 이런 분들, 그러니까 도청 수습 위원이 잡혀서 하필 내 옆방으로 왔더라. 조비오 신부도 있었어.
하, 그러셨구나.
그걸 알려고 여기까지 왔냐?
아니요. 제가 궁금한 건 과거가 아니라 미래예요. 도저히 전망을 찾아낼 수 없어요.
별일이다. 내가 살아보지도 않은 세계를 어떻게 알겠냐? 이승을 등진 지가 언젠데….
그래도 나는 믿고 있었다. 문학 행위는 ‘피를 말리는 고행’이라고 다들 떠들지만 사실상 글쓰기의 모험만으로는 어떻게 실수해도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 일이 없다. 사유의 깊이를 확보하고자 긴장의 강도를 높여가는 작가들도 밤새워 고투하다가도 육체적으로 지치면 그냥 놔버리기가 일쑤이다. 아무도 이를 죽음 앞까지 밀고 가지 않는다. 문학적 실패에는 독자에게 욕을 먹는 것 이상의 책임이 따르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김남주 시인은 평생 이 문제를 안고 씨름했으며, 백척간두의 현장에서 예비 동작도 없이 뛰어넘었다. 챗GPT에게 묻듯이 되나 안되나 예측해 보는 무책임한 예언들 말고 진정한 진단이 나는 필요했다. 왜냐? 아무리 생각해도 문명의 출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금세기 문명이 파탄 났다고 보지 않으세요? 우리에게 미래는 없지요?
내일 전라도가 망하더라도 동백을 심겠다고 말했다던 후배가 너 아니냐?
그래서 온 겁니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할 때 백낙청 선생님이 지혜의 시대를 말했잖아요? 나는 그때 콧방귀를 뀌었지만 형님은 노자를 읽고 있었어요.
김남주 시인은 병석에 눕기 전에 마르크스의 길이 아니라 노자의 길에 몰두해 있었다. ‘사상’보다 ‘지혜’를 찾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답이 있을 터였다. 나는 21세기의 청년 세대를 보는 눈이 궁금했는데, 아이의 뼈는 어른들 뼈보다 왜 부드러울까? 하고 시작된 이야기는, 보수화 현상도 아니고, 반동적 현상도 아니다, 가을 단풍이 아무리 고와도 나무의 운명을 담보하는 건 오뉴월 이파리이다, 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내가 특히 영감을 얻은 말은 다음과 같다.
사회과학에는 답이 없어 보여야. 우선 생태 질서가 파탄 난 시대이고, 또 경직된 질서가 부지런히 연성화되는 쪽으로 옮겨가는 게 아닌가 싶다. 대지에게 물어야지. 협역(狹域) 다수(多數)가 사는 문화에서 광역(廣域) 소수의 문화로 바뀌는 것도 큰 변화로 보이고….
![]() 김형수 |
나는 이 인터뷰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어떤 연대기는 후속세대의 상속 욕구를 자극하는 전리품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면서 한국문학의 통사적 운명을 속박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가령 1950년대와 1980년대는 성장통(痛)밖에 없는 듯해 보이지만 집요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묻는 운명적 기능을 해왔다. 김남주는 그 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세계가 사적 개체 중심으로 영원히 해체되는 지옥도가 펼쳐진다 해도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명명하는 한 대지와의 결속과 민중의 연대감을 소멸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첨단이 열리는 시대가 아니라 생존이 종결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