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화제작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말할 것이다

스즈키 유이 장편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오늘의 화제작
  • 2026년 여름호 (통권 100호)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말할 것이다

스즈키 유이 장편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한 권의 책은 몇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막막하니 단편 소설을 기준으로 삼아 보자. 대략 200자 원고지 80매 분량, 총 1만 6,000자로 이루어진 세계. 한 문장을 대략 50자 정도로 셈 해보면 단편소설은 320문장으로 직조되어 있다. 320개 문장으로, 때로는 그보다 더 많거나 적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밀밭. 작가와 독자는 이 밀밭을 하염없이 거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 밀밭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모든 밀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밀.* 그러니까 이미 많은 사람이 말하고 써온 문장과 말속에서 굳이 나의 언어로 다시 한번 써야만 했던, 그리고 나의 언어로 다시 읽혀야만 했던 바로 그 문장 말이다. 글쓰기는 어렵고 괴롭고, 때로는 부끄럽기까지 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도 쓰는 일을 결코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오직 글쓰기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 충만함 그리고 그 과정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사이토 마리코의 시 「눈보라」 속의 문장을 변용시킨 것이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사이토 마리코, 「눈보라」, 『단 하나의 눈송이』, 봄날의 책, 2018, 65쪽.)

 

첫 장편소설로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스즈키 유이의 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주인공인 ‘히로바 도이치’ 역시 일평생을 쓰기와 읽기의 즐거움과 괴로움에 바친 인물이다. 그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독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괴테 연구자이다. 소설은 이러한 그가 부부의 결혼기념일 저녁 식사 자리에서 티백의 꼬리표에 인쇄된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사랑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고 한데 섞는다),”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괴테의 말이 적힌 그 문장을 본 도이치가 “역시 나의 괴테 사랑은 하늘도 아시는구나”(20쪽)라고 생각하는 장면은 괴테를 향한 그의 순수하고 정제되지 않은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 문장을 만난 후 도이치에게는 작은 문제가 생긴다. 막연히 괴테의 『서동시집』 속 한 문장일 것이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문장 출처를 명확히 찾을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학자의 인생이란, 학문의 영역이란 늘 명확한 각주 속에서 일구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문장 출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곧 그 문장으로 자신의 세계를 설명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 상황이 도이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위의 짧은 문장이 자신의 연구 세계를 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문장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소설은 도이치가 티백 꼬리 속 문장의 출처를 찾는 과정과 출현 예정인 텔레비전 방송 〈잠 못 드는 밤을 위해〉에서 쓸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을 나란히 병치시킨다. 이 원고 작업은 지금까지 도이치가 쌓아 올린 괴테 연구 — 잼적 세계와 샐러드적 세계 — 를 집약해보는 것과도 다르지 않을 텐데, 도이치는 티백 꼬리표 속 문장을 “사랑은 모든 사물을 잼처럼 혼동시키지 않고 샐러드처럼 혼연일체로 만든다.”(45쪽)로 번역해 본 후, “만약 이것이 내가 생각한 그 문장이라면, 이야말로 내 괴테 연구의 진수를 한마디로 표현한 지언(至言)일 것이다.”(45쪽)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는 괴테 사전 사이트를 뒤지고, 장인이자 스승인 ‘운테이 마나부’가 번역한 『서동시집』과 자신이 번역한 『파우스트』, 마침내 괴테의 전집까지 샅샅이 살펴보지만 결국 그 문장의 출처를 찾지 못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도이치는 괴테가 아닌 자신이 쌓아 올린 문장들을 마주하게 된다. 괴테 저작을 살펴보는 일, 다시 말해 평생을 바쳐 공부하던 책들임에도 여전히 발견하지 못한 그 문장을 찾아 나서는 과정은 그 문장 사이사이에 스민 도이치라는 개인의 역사를 살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도이치는 괴테의 문장을 찾지 못해 혼란 속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자신의 삶은 괴테의 문장들과 한데 섞여 혼연일체가 되어간다.

소설은 도이치라는 인물을 통해 읽고 쓰는 일을 오래도록 반복해온 사람이 여전히 단 하나의 문장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 모든 과정이 실은 소설에 대한, 혹은 소설 쓰기에 대한 비유라는 것을 암시한다. 소설 외연은 ‘그 문장은 정말 괴테가 쓴 문장이 맞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추리 형식을 띠고 있으나, 그 속에서 문장 출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문장을 읽고 그 문장에 덧대어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도이치의 동료 교수 ‘시카리 노리후미’ 말처럼 “결국 작가나 사상가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나뭇잎 한 장으로 자신의 숲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268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이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우리는 왜 쓰는가. 우리는 왜 읽는가. 이렇게 많은 이야기 속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써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가 될 것이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었다. 이제까지 도이치가 학자로서 쌓아온 탑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바로 지금, 창문에서 불어 드는 바람에 휘날려 책장이 넘어가는 마루야 사이이치의 『수영담』에는 “편해지려면 쓸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짐을 목적지까지 운반해서 자유로운 몸이 되기를 소망한다.”라고 적혀 있다. 도이치 자신은 소설을 쓸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괴테의 명언’을 자기 문장 속에 끼워 넣자 도이치는 분명히 ‘자유’를 느꼈다. 모든 것이 성취되어 가벼워졌다. (122쪽)

 

어느 밤, 도이치는 기묘한 꿈을 꾸게 된다. 어느 집에서 열린 저녁 모임에서 도이치는 ‘선생님’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선생님은 도이치에게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운명적 계시라기보다는 문장의 출처를 찾아 헤매던 도이치의 현실과 열망이 무의식적으로 구현한 이미지들에 불과할 테지만, 도이치는 꿈에서 깨어난 직후 빨간펜을 집어 들고 집필 중인 원고에 그 문장을 덧대어 쓴다. 농담도 아닌 말을 출처도 없이 ‘괴테는 말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한 날조일 것이고 도이치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을 쓰고 분명한 자유를 느낀다.

인류 역사만큼이나 누적된 이야기에 자족하지 못한 사람이 또 다른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이유, 지금까지 읽어 온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로서 이야기의 세계를 짓는 일과 사상가로서 하나의 이론을 정립시키는 일은 단순한 지적 활동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때때로 머리보다 마음을 쓰는 일, 즉 심적 노동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논리적이고 지적이며 추론적인, 그리하여 냉철한 이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때때로 그런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신의 삶을 해명하고, 이해하고, 싸우고 그리하여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자기 해방의 작업과도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적인 활동 이면에는 자유를 위한 심적인 열망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니 이 모든 일의 중심에 놓이게 되는 것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자신만의 것을 ‘새롭게’ 내보이는 데 있지 않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렇구나, ‘모든 것은 이미’라고 이미 이렇게나 말해져 왔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입을 다물 생각이 없다. 모든 사람이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발렌틴, 지드), 더 잘, 혹은 다른 방식으로 다시 말할 수 있기 때문에(큐브릭, 괴테) 등 이유는 가지가지지만 결국 “War das das Leben? Wohlan! Noch einmal!(이것이 삶이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 아닐까. (196쪽) (강조 : 필자)

 

소설은 이러한 반복을 ‘사랑’을 통해 형상화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계속 반복하고, 또 사랑을 한다. 도이치 아내 ‘아키코’는 계속해서 하바리엄과 테라리엄을 만든다. 딸 ‘노리카’는 반복적으로 손등에 무언가를 메모한다. 오래전 유학 시절에 만났던 도이치 룸메이트 요한 또한 사랑을 하고 실패하고, 또다시 사랑을 한다. 도이치 제자 쓰즈키와 딸 노리카는 서로를 사랑한다. 심지어 이 소설에서는 괴테도 사랑을 한다. 소설에 결말에 이르러 밝혀지는 그 문장의 출처는 괴테가 자신의 연인에게 보낸 편지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반복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사랑한다. 도이치 역시 사랑을 다시 깨닫는다.

사랑은 우리의 삶 속에 깊이 침투되어 있어 그것의 존재를 쉽게 잊는다. 그러나 문득, 삶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한번’ 체화된 무언가의 반복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은 삶의 깊은 곳으로 침잠한 사랑을 건져 올리는 일이 된다. 이미 말해진 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다시 한번 이야기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자,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자신을 다시 한번 믿어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도이치가 “그는 실제로 이런 말도 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239쪽)고 할 때 이것은 괴테가 아닌 분명한 도이치의 말이다. 괴테가 말했다고 이야기하는 것까지가 도이치의 삶을 설명하는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도이치는 계속해서 괴테의 말에 기대어 자신의 세계를 구성해 나갈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랑을 또다시 발견할 것이다.

나의 언어로 ‘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잼과 같은 세계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지도를 그리는 일이다. 사랑하는 자들은 길을 잃지 않을 것이고, 다시 한번 말하는 자는 세계의 혼란 속에서 허우적대는 대신, 세계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민선혜
평론가, 1996년생
평론 「일시 정지, 질문하고 응시하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