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폐업’이라니! 휴는 지도 앱에 뜬 글자를, 마치 처음 접하는 낯선 부호인 양 한참 들여다보았다. 지도에는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길이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지하철을 이용하면 1시간 30분, 공항버스를 타면 1시간 5분이 걸린다고 했다. 지하철은 두 번 갈아타야 하고 공항버스는 내려서 15분을 걸어야 했다. 택시를 타면 35분 거리였다.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할지 고민하지는 않았다. 이미 선택해서가 아니라 어떤 선택이든 상관없어서였다. 별 의미 없는 습관 같은 것이었다. 아니, 습관도 아니었다. 의도나 목적이 없고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반복하는 기계적인 행동을 습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식이나 감각이 동반되지 않은 기계의 기계적인 움직임 같은 것. 그냥 하는 행동. 아니, 한다고 할 수 없는, 그냥 해지는 동작. 뇌의 지시 없이 신체 기관이 저절로 움직이는/움직여지는, 말하자면 작용 같은 것. 휴에게는 그런 게 특별하지 않았다. 예컨대 왜? 라는 물음에 답할 수 없는 행동들이 갈수록 늘어갔다. 이유나 목적이 부재한 자리에 나타나는 왜? 라는 질문은 대체로 불청객과 같다. 그는 불청객에 의해 간섭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지하철을 타거나 공항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탈 것이다. 핸드폰 화면에 띄운 지도 앱이 그렇게 하라고 알리고 있었다. 지하철이나 공항버스나 택시나 상관없었다. 그는 시간이 많았고 돈도 있었다. 시간이나 돈은 그의 선택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었다. 시간에서 놓여났다, 라기보다 시간이 그를 풀어주었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고, 그래서 예고도 준비도 없이 자유인 신분을 부여받은 노예처럼 얼떨떨한 상태였다. 환전은 하지 않았다. 책상 서랍에 보관된 달러를 챙겨 지갑에 넣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자기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몰랐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요컨대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예약한 호텔 주변을 살피려고 별생각 없이, 손가락 두 개를 가위 두 날처럼 벌려서 지도를 키우는데 뭔가 꺼림칙했다. 사실 그 동작 역시 기계적이었다. 자기가 묵을 호텔 주변을 확인할 이유나 목적이 없는 그는,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있는 사람이 할 법한 동작을 했고, 그러나 실제로는 없으므로, 하면서도 그런 동작을 한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잦았다. 그런 일을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하는/해지는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자기 몸의 주인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을 자주 했다. 휴는 ‘폐업’ 표시가 된 호텔이 자기가 묵을 호텔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다음 순서라는 듯 글자를 더 키웠다. 어반퍼스트 호텔이 맞았고, 폐업 표시는 더 뚜렷했다. 그게 무얼 뜻하는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반사적으로 작용하는 기계를 멈춰야 했기 때문이다. 기계가 멈추자 비로소 생각이 작동했다. 예컨대 의아함이 침투해 들어왔다. 그가 호텔 예약 대행 사이트를 통해 어반퍼스트 호텔을 예약한 것은 일주일 전이다. 꼼꼼하게는 아니었지만 묵을 방에 대해 전혀 살피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용자 리뷰를 읽고 평점을 확인했다. 그 역시 반사적이었고, 어쩌면 그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꼭 그 호텔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 호텔이면 안 될 이유도 없었다. 그는 잠자리를 까다롭게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늘 그랬지만 그때는 더 그랬다. 물론 폐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폐업한 호텔에 묵으려 했을 리 없거니와 묵을 수도 없다. 그러니까 그가 방을 예약하고 신용카드로 결제까지 했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폐업을 알리는 표시가 없었다는 증거이다. 폐업한 호텔방을 예약하라고 내놓을 사이트가 있을 리 만무하다. ‘폐업’이 그 예약 대행 사이트에 표기되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가 그런 표시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보았다면 결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한두 마디 투덜거리고, 그러다가 페이지에서 빠져나왔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을 상상하는 게 무리이긴 하지만, 혹시 그 표시를 보고도 이해하기 힘든 어떤 이유로(이를테면 무엇에 홀렸거나 마음이 산만해 순간적으로 착각을 했거나) 예약하고 결제했다면, 그 순간의 찜찜한 기분 같은 것은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의 의식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은 폐업을 알리는 표시를 보지 못했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폐업 중인 호텔방을 예약 대행 사이트에 올려놓은 것이 사실이라면, 폐업 표시를 했든 안 했든 사이트 운영자의 잘못이다. 폐업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일부러 표기하지 않았다면 기만이다. 그러나 알았고, 알았는데도 표기까지 해가며 영업을 한 경우에 비하면 순진한 기만이다. 그 사이트가 기만의 혐의를 벗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호텔이 폐업한 사실을 그들도 몰랐을 때뿐이다. 이 무지를 통해 예약 대행 사이트는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무능력과 무책임의 짐을 떠안게 될 것이다. 무지가 무능력과 무책임의 조건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그의 핸드폰 화면에 뜬 지도의 이리저리 얽힌 길들 위에서 켜졌다 꺼졌다 하는 붉은 글씨의 ‘폐업’을 발견한 그 순간에 휴가 그런 생각을 조리 있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각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길 잃은 배처럼 이리저리 떠돌았다. 생각들이 오갔지만 서로 연결되지 않고 체계를 이루지 못했으므로 판단의 근거가 되지 못했다. 그는 공기가 희박해지는 걸 느꼈다. 위험하다는 신호였다. 밀폐된 방에 있거나 밀폐된 방에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놓일 때 그는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에 빠지곤 했다. 검사 결과는 천식도 협심증도 아니라고 했다. 만성적인 불안이나 스트레스가 원인일 거라고 의사는 말했고, 그는 그 말을 믿었다. 불안은 공기와 같고 스트레스는 밥과 같았다. 휴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다행히 등을 받칠 기둥이 있었다. 공항버스 노선 정보가 붙은 기둥에 기댄 채 그는 예약 대행 사이트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통화가 쉽지 않았다. 자동 응답기는 반복해서 기다리라고 했고,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지만 그런 그를 비웃듯 어느 순간 슬그머니 끊어지는 일이 세 번 이어졌다. 네 번째 시도 만에 연결된 상담원은 신원 확인을 까다롭게 했다. 예약자 이름을 묻고 예약 번호를 묻고 체류 기간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가진 정보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라고 답했다. 지도 앱이 착오를 일으킨 모양이라고 하면서 그런 일이 더러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지도가 문제라는 거지요? 하고 물었지만, 전화는 끊어진 다음이었다. 상담원이 무례하다고 나무랄 수는 없었다. 그의 질문이 꽤 긴 공백 후에 나왔기 때문이다. 상담원은 고객이 자기 대답에 만족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개의치 않았는데 그것은 꼭 대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휴는 문제를 확인하려고 전화했다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통보받은 자신의 마음 상태가 왜 낙심에 가까운지를 의아해했다. 불신이라면 몰라도 실망이라니. 그는 자기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다지 괴롭지는 않았다. 의심하는 자기를 불신하는 것은 의심의 수렁에서 자기를 구하는 방법이었다. 그의 자기 불신은 이를테면 습관성이었다. 습관은 내성을 만들어 고통의 경감에 기여한다. 일종의 무자각 상태가 그렇게 찾아온다. 그의 많은 선택이 그런 무자각 상태에서 이루어져 왔다. 이를테면 호텔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탄 것이 그랬다. 그는 자기가 택시를 탐으로써 지하철과 공항버스를 제외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2.
축제 때문이에요. 묻지 않았는데도 택시 기사는 길이 막히는 이유를 설명했다. 말을 탄 누군가의 동상이 한복판에 세워진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복잡했고 시끄러웠다. 기사는 그 동상이 누구인지도 말했다. 몸에 밴 친절이 아니라 막히는 길이 지루해서 그러는 거였다. 어떤 전쟁에서 무슨 공을 세운 장군이라며 외우기 힘든 긴 이름을 알려줬지만 휴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광장에는 음식과 음료를 파는 노점이 줄지어 있었고, 그 앞에 모인 사람들은 서거나 앉아서 먹거나 마셨다. 반바지 차림 남녀들이 가로수 아래로 달리고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광장 한복판에서 뱅뱅 돌았다.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리고 악기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리고 무언지 모를 구호를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시위대와 버스커들과 노점상들이 광장을 분할해서 사용했다. 택시 기사가 살짝 문을 열자 매연과 음식 냄새가 재빨리 들어왔고 경적, 노래, 구호 소리가 커졌다. 택시를 탈 때는 해가 지기 전이었는데 도심에 이르자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동차들이 전조등을 켰다. 상점들 간판이 환해지고 빌딩 사무실들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차는 굼벵이가 기어가듯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내일부터 사흘간 이 도로에는 차가 다니지 않아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 거예요. 행진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난리가 날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여기로 몰려와요. 손님도 축제를 보려고 우리 도시에 온 거지요?” 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축제를 보러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축제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알았다면 아마 오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몰려온다니! 축제는 오지 않을 이유라면 몰라도 올 이유는 아니었다. 왜 이 도시를 선택했는지 휴는 설명하지 못한다. 축제 때문이 아니란 건 분명하다. 그는 이 도시에 와 본 적이 없었고 오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23년간 한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여러 도시를 다녔다. 서류 가방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던 그 많은 도시는 일터에 지나지 않았다. 일터가 아닌 도시를 그는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비행기를 자주 타는 그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그가 여행을 좋아한다고 짐작하기도 했지만, 그는 비행기 타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여행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모든 도시는 여행지가 아니라 출장지였다. 일이 아니고는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다. 이제 휴는 23년 일한 회사를 떠나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회사는 어디든 가서 바람을 쐬고 오라고 했다. 휴는 그 말을 회사가 그에게 내린 마지막 업무로 받아들였다. 관성이 그에게 복종을 지시했다. 그는 일하는 사람이었다. 일만 하는 사람, 일이 정체성인 사람이었다. 일하지 않을 때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결혼 10년 만에 그를 떠나면서 아내가 한 말이었다. 당신은 일하는 사람이에요. 일만 하는 사람, 일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에요. 생각해 봐요. 우리가 여행을 같이 간 적이 있어요? 여행 아니면 뭐? 골프를 쳐요? 음악을 들어요? 술을 마셔요? 무슨 취미가 있어요? 그녀의 지적에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그렇게 자주 비행기를 탔지만 아내와 함께 탄 적은 신혼여행 때 말고는 없었다. 골프도 치지 않았고 음악도 듣지 않았고 거래처 사람을 상대할 때 말고는 술집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 말고 뭔가 하라고, 차라리 바람이라도 피우라고 말하는 아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는 일을 위해 비행기를 탔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다른 때와 달리 업무의 내용이 부여되지 않았다. 어디든 가서 바람을 쐬고 오세요. 이처럼 모호하고 구체적이지 않은 지시를 받아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는 중앙처리장치에 문제가 생긴 컴퓨터가 그런 것처럼 굼뜨고 멍하고 얼떨떨했다. 행선지는 굼뜨고 멍하고 얼떨떨한 상태에서 정해졌다. 그러니 그의 마지막 출장지가 왜 이 도시인지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23년 동안 다닌 출장지 중에 이 도시는 없었다. 그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시간 날 때면 무의식적으로 뒤적이곤 하는 SNS에서 이 도시에 대한 피드를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죽기 좋은 도시’라는 표현이 나왔다. 죽기 좋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왜 죽기 좋은 도시라고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뭔가 내용이 있었을 텐데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휴가 이 도시를 자신의 마지막 업무 수행지로 정한 데에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지도 못하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글이 영향을 미쳤을까?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비행기표를 구매하는 순간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자기가 그런 피드를 접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행기표를 구하고 호텔을 예약하고 난 후에 인터넷의 영악한 알고리즘이 연관 이미지와 메시지를 무작위로 불러내 안겼을 때야 언젠가 접한 적이 있는 글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냈다. 그렇지만 그 글에 ‘죽기 좋은 도시’라는 언급이 있다는 것까지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심어진 어떤 인상이 그의 선택에 무의식적 동기로 작용했을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우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도시에 대한 SNS의 그 글은 그가 필요해서 찾아낸 문서가 아니었으므로 처음에도 건성으로 읽었고, 나중에는 전에 읽었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므로 더 건성으로 읽었다. 이 도시와 죽음의 관련성은 모호하다. 그 모호한 관련성을 그의 선택의 동기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그의 뇌리에 그 관련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이해하자면, 이런 가정을 해볼 수 있다. 활자, 즉 활판 인쇄로 찍어낸 글자를 해독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이미지를 스캔하거나 사진을 찍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 내용이 저장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그의 뇌는 읽은 것이 아니라 스캔했거나 찍었고, 읽은 것이 아니므로 해독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고, 그 과정 없이, 예를 들면 자기 몸보다 훨씬 큰 먹이를 씹지 않고 일단 통째로 삼키고 보는 뱀처럼, 세부의 연결에 의한 이해의 단계를 생략하고 일단 안에 집어넣고 본 셈이고, 해체나 분해의 과정 없이 통째로 삼킨 먹이가 뱀의 몸속에서 그런 것처럼 분해/분석되지 않았으나 그의 의식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분명한 그 정보가 우리가 추측할 수 없는 신경계의 오묘한 어떤 과정을 통해 결정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고 가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분명해지는 것은 없다. ‘추측할 수 없는 오묘한 어떤 과정’은 추측할 수 없고, 그런 식의 오묘한 과정을 전제한다면 그 글만 아니라 다른 요소들, 이를테면 이 도시의 축제가 어떤 식으로든, 그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의식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저장되어 있다가 모종의 오묘한 과정을 통해 선택의 동기로 작용했으리라고 상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도시나 마찬가지지만 죽기 좋은 도시이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휴가 왜 이 도시를 자신의 마지막 출장지로 삼았는지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가 예약한 어반퍼스트 호텔은 광장에서 뻗어 나간 여섯 개의 길 가운데 가장 좁은 도로에서 160미터쯤 들어간 곳에 있었다. 다른 도로는 4차선이었는데 그 길만 2차선이었고 그 길만 오르막이었다. 그 도로 역시 차가 많기는 마찬가지여서 10미터를 이동하는 데 거의 2분이 걸렸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35분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시간은 점점 늘어나 한 시간 25분이 지나서야 그는 택시에서 내릴 수 있었다.
3.
그것에 대해 제공해 드릴 정보가 나에게는 없습니다. 호텔 직원 목소리는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다. 예컨대 호텔 직원답지 않았다. 구사하는 단어도 그렇지만 억양 없는 발음이 인위적이고 권태롭다는 인상을 주었다. 말하면서 손님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표정도 바꾸지 않는 것이 사람 음성이 내장된 마네킹이나 로봇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고 휴는 생각했다. 고객의 난처한 처지에 전혀 공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식적인 말조차 할 줄 모르는 직원의 말투와 표정은 23년 경력 비즈니스 종사자인 휴에게는 낯설고 이상한 것이었다. 도무지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체(더구나 서비스업이 아닌가?)의 구성원 신분에 어울리는 태도라고 할 수 없어서 휴는 호텔 직원이 맞아요? 하고 확인까지 했다. 그것이 왜 궁금한데요? 하는 대답이 휴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 역시 그가 예상한 반응은 아니었다. 직원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이 직원일 리 없다는 확신으로 변했다. 그의 입에서 직원과 이야기해야겠어요, 라는 말이 거의 반사적으로 나왔다. 휴가 직원일 리 없다고 생각한 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는데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남자가 여태 눈길을 주고 있던 모니터에서 왁자한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연예인들 여럿이 나와 잡담을 주고받는 오락프로거나 과장된 말과 행동으로 웃음을 유도하는 시트콤일 거라고 휴는 짐작했다. 그는 좀 언짢았지만 그런 기분을 밖으로 드러낼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필요도 의욕의 산물이라면 그에게 없는 것은 의욕이었다. 요구가 구체적이지 않을 때 그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재량 범위가 넓은 포괄적인 상황 앞에서 그는 당황하는 편이다. 그럴 때 그는 겉돌고 헛돈다. 당신이 상대할 수 있는 이 호텔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내가 유일합니다. 물론 호텔 직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 외에 당신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호텔 숙박에 대한 당신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 왜 앉아 있느냐고 물을 겁니다. 당신은 어떤 예약 대행 사이트에서 보내온 메일을 보여주며 이 호텔에 숙박할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어반퍼스트 호텔은 사흘 전에 공식적으로 폐업했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부여받은 일입니다. 다른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말하는 마네킹이나 로봇처럼 말했다. 휴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보여준 예약 확인증과 예약 대행 사이트에서 보내온 메일을 남자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것은 내 일이 아닙니다. 그런 내용에 대해 나는 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호텔 직원일 리 없는 남자가 호텔을 대신해서 마네킹이나 로봇처럼 반복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하는 말은 이게 호텔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겁니까? 이 사이트에서 호텔 측이 의뢰하지도 않은 방을, 호텔 측의 동의도 없이 고객들에게 제공했다는 뜻입니까? 폐업 사실을 모르고 예약받았다는 겁니까? 폐업 사실을 알고도 그랬다는 겁니까? 휴는 따지거나 항의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사람의 말투로 질문했다. 호텔과 상관이 있는 일인지 없는 일인지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예약한 곳에 문의할 사안인 것 같습니다. 남자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휴는 남자가 일리 있는 말을 한다고 느껴졌으므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런 자신에게 일종의 수치심 같은 걸 느꼈다. 그가 23년 동안 해온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이나 협력사나 경쟁업체와 계약서를 쓰는 일이었다. 계약서는 협상의 과정을 통과한 후에 작성되었다. 협상 목표는 상대방이 고통을 느끼지 않거나 아주 조금만 느끼게 하고 우리 쪽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데 있었다. 당연히 기술이 필요했다. 일리가 있는지는 고려할 사안이 아니었다. 협상 상대방의 주장은 대개 일리가 있었다. 일리가 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협상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 일리 있는 주장을 무력화 시키는 것이 기술이었다. 일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는 것, 일리 없음을 밝혀내는 불가능하거나 억지스러운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일리가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중요했다. 일리가 있는지 없는지는 논의 요소에서 제외되어야 했다. 예컨대 동의는 물론 이의도 제기하지 말아야 했다. 동의나 이의나 논의의 테이블 위에 놓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으니까. 상대방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 혹시 몰라도 일리 있다고 동의하는 것은 협상가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적어도 휴에게는 그랬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마지막이라는 인식이 그를 나태하게 했을까. 그는 약간 당황하여, 당황하면 대개 그렇듯 얼굴을 붉히며 공연히 트집 잡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거 알아요? 폐업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폐업한 호텔을 지키고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폐업했는데 직원이 왜 있어요? 직원이 있는데 그게 어떻게 폐업이에요? 남자는 엉뚱한 말에는 반응하지 않겠다고 작정했는지 대꾸하지 않았고 보고 있는 모니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진 휴는 프런트 데스크에서 3미터쯤 떨어져 있는 소파에 앉아 호텔 예약 대행 사이트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 연결이 잘되지 않았고, 세 단계를 거쳐 전화받은 담당자는 두 시간쯤 전에 휴가 문의한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휴가 얼마 전에 통화했다고 하자 통화한 사람이 다른 사람인 것 같다며 바꿔 주길 원하는지 물었다. 휴는 그것이 더 번거로울 것 같아 아까 했던 말을 새로운 담당자에게 다시 했다. 새로운 담당자 대답은 새롭지 않았다. 예약이 정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확인됩니다. 우리가 파악하기로 호텔은 정상 운영 중입니다. 인터넷에는 잘못된 정보가 많습니다. 지금 예약한 호텔에 도 착해 있으며 폐업이 확실하다는 휴의 말에도 담당자는 그럴 리 없다는 말만 했다. 휴가 호텔 직원을 바꿔 주겠다고 하자 폐업했다면서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니까요. 그것은 휴가 조금 전에 호텔을 지키고 있는 남자에게 한 것과 같은 논리의 말이어서 휴를 당황하게 했다. 그러게요. 폐업했다는 호텔에 직원이 있네요. 자기는 직원이 아니라고 하면서 자기 말고는 직원이 없다고도 하고, 아무튼 이 사람이 폐업이 맞다고 하는데, 한번 통화를 해보세요. 그렇게 말하고 휴는 소파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건넸다. 남자는 뚱한 표정을 지을 뿐 전화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휴는 남자의 귀에 억지로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남자와 휴는 프런트 데스크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므로 휴는 창구에 몸을 바짝 붙이고 발끝에 힘을 주어야 했다. 전화기를 건네받은 남자는 귀찮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몇 마디 하더니 휴를 쳐다보며, 이거 어느 나라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휴가 전화기 너머 담당자에게 들리도록 영어로 하세요, 영어로, 하고 큰소리로 말한 후에야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갔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호텔 남자는 곧 핸드폰을 휴에게 다시 건넸고, 예약 대행 사이트의 담당자는 정중하게, 그러나 마음은 담기지 않은 의례적인 말투로 사과부터 했다.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숙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측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호텔 측은 우리에게 폐업 예정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현재는 우리 사이트에서도 이 호텔 예약을 진행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사이트를 통해 환불을 신청하기 바랍니다. 환불은 이 주 정도 걸립니다. 그 사람 대답이, 내용은 둘째치고 어투가 너무나 평범해서 휴는 자기가 매우 난처한 상황에 부닥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뻔했다. 그 직원이 그것을 노렸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평범함의 연출이 전략으로 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좋아요. 좋습니다. 휴는 기꺼이 그 전략에 넘어가 주기로 하고, 환불 대신 다른 방을 구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자기 요구가 지극히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예약 대행 사이트는 호텔에 책임을 미루고 있지만 그가 결제한 곳은 호텔이 아니라 예약 대행 사이트였다. 그러니까 예약한 것만 믿고 왔다가 당장 잘 곳이 없어진 고객을 위해 그 사이트는 환불이 아니라 숙소를 구해주어야 한다. 무리한 요구일 리 없었다. 무리일 리 없는 휴의 요구는 그러나 뜻밖의 이유로 거절당했다. 예약 담당자는 별로 기다리게 하지 않고 곤란하다고 말했다. 교환 가능한 상품이 아니라 환불만 가능한 상품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지금 이 도시에 막 도착했어요. 초행이고 연고가 없어요. 오늘 밤 당장 잘 곳이 필요해요. 휴는 볼멘소리를 했다. 잠들어 있던 현실감이 서서히 살아나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경우에도 소리를 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것 말고도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가령 그는 경제적 불이익이나 신분상 위험을 은근하게 경고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이나 민원이나 고소 같은 걸 암시함으로써 심리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리한 상황을 바꾸는 데 필요한 수단을 그는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수단을 구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그는 곧 깨달았다. 23년 동안 유효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임무를 부여받지 않은 채 출장지에 보내진 사람이었다. 구체적인 지시가 없는 마지막 일터는 그를 의기소침하게 했다. 오늘 밤 잘 방을 구해야 한다고 다시 말할 때 그의 목소리에는 서운한 감정이 섞였고, 사이트를 이용해서 예약하라고 답할 때 담당자 목소리에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방을 구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사람이 이번 주말 고객님이 계시는 도시로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라고 덧붙일 때도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여전히 사무적이고 건조하고 평범했다.
4.
예약 대행 사이트 담당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휴는 호텔 앞 도로에 여행 가방을 눕혀놓고 그 위에 앉아 숙박할 수 있는 방을 검색했다. 숙박비가 터무니없이 비쌌고, 비싼데도 예약할 수 있는 방이 없었다. 자기 수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거들떠보지 않던 글로벌 체인 호텔까지 샅샅이 살폈지만 구할 수 있는 방이 없었다. 자기 수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거들떠보지 않던 호스텔이나 도미토리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이트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일주일 전에도 이 호텔 말고 예약할 수 있는 방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는 방의 조건을 따져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을 고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숙소를 정하는 데 까다롭지 않은 편인 데다가 굳이 다른 방을 살피지 않아도 될 만큼 어반퍼스트 호텔이 여러 면에서 무난하기도 했다. 그때 이미 이 호텔의 폐업 정보가 공공연히, 혹은 은밀히 퍼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른 사이트에 들어가 보기만 했어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정보가 그에게만 감춰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은 그럴 리 없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자기에게 일어났다는 생각에 덮였다. 회사를 떠나기 전에 어디든 가서 쉬고 오라는 통보가 그에게 전달될 때까지 휴는 자기에게 일어날 일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무슨 일인가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를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에 대한 정보는 그에게는 감춰졌다. 당사자임에도 감춰진 것이 아니라 당사자이기 때문에 감춰졌다. 세상일이 그런 식으로 벌어진다는 걸 자기에게 그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그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벌어지는 세상일이 자기에게 일어나자 그 사실은 모르는 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타인과 세상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거나 거의 알지 못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가 자기 자신에게만 제대로 전해지지 않거나 왜곡되어 전해지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후에야 사람은 자기만 모른 채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뒤늦게 안다. 자기에 대한 한 모든 앎은 뒤늦은 앎이다. 그의 뒤늦은 앎에 의하면 회사 새 주인은 그가 이전 주인과 아주 가까웠다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은 나중에 전해준 사람의 말이다. 그러니까 그 단어는 순화된 표현이다. 새 주인이 어떤 단어를 썼는지 휴는 모른다. 자기에 대한 한 모든 앎은 뒤늦은 앎일 뿐 아니라 불완전한 앎이다. 이전 주인과 아주 가까웠다는 말 역시 새 주인이 실제로 그렇게 말했는지 다른 표현을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실 ‘가깝다’는 해석의 여지가 많은 단어이다. 친척이거나 같은 학교를 나왔거나 술자리를 자주 하거나 취미가 같거나 물리적으로 이웃해 살거나…, 어떤 경우를 대입해도 그는 이전 주인과 가깝지 않았다. 주어진 일을 주어진 그대로, 습관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열심히 했고, 성과를 냈고, 그러자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자리가 주어졌고, 어떤 자리에서도 그의 습관, 기계는 변함없이 작동되었으니 성과와 평가와 기대가 나쁠 리 없고, 그 결과로 다른 사람보다 빨리 승진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가까웠다는 말에 담긴 뜻일까. 그것이 왜 새 주인에게 부담을 주는 걸까. 누군가와 가까운 것이 왜 누군가에게 위협이 되는지 몰랐으나 휴는 질문하지 않았다. 질문한다고 해서 답을 듣게 될 가능성이 없거니와 설령 대답을 듣는다고 해도 그 대답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루어 짐작하고 짐작한 것을 표나게 드러내지 않는 관행에 그는 익숙했다. 파고들어서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정쩡하게 처신하다가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경험은 그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걸 곧 알게 되었지만 휴는 그때도 반문하지 않았다. 그의 몸이 반응했을 뿐이다. 회의실에서 그는 가슴을 쥐고 쓰러졌다. 숨을 쉴 수 없었다. 감춰진 울화가 그의 몸을 쓰러뜨렸다. 구급차가 와서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폐도 뇌혈관도 이상이 없었다. 회사는 더 쉬라고 했지만 휴는 다음 날 출근했다. 성실이 아니라 관성이었다. 낯선 도시 호텔 앞에 쭈그려 앉은 그에게 그런 기억들이 파편처럼 들어와서 마음을 헝클어지게 했다. 그는 핸드폰 화면에 뜬 방 이미지들을 무의식적으로 클릭했다. 사흘 후에 묵을 방의 예약은 모든 예약 대행 사이트에서 가능한 것으로 나왔다.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고, 또 축제가 끝나는 날이었다. 그렇지만 휴에게 필요한 것은 사흘 후가 아니라 오늘 밤 묵을 숙소였다. 당장 묵을 방이 필요했다. 비로소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핸드폰을 닫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프런트 데스크의 남자는 모니터에서 눈을 들어 그를 확인하고는 이내 관심 없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휴는 멈칫거리며 다가가 하룻밤 묵을 방을 구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이 도시가 처음이지만 당신은 이곳 사람이니 뭔가 방법을 알고 있을 것 같다는 휴의 말에 남자는 엉뚱한 소리를 듣는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임시로 고용되었습니다. 당신은 운이 없습니다. 나는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짧고 분명한 말들은 휴의 틈입을 막기 위해 세운 튼튼한 말뚝 같았다. 휴가 그래도 방법을 좀 생각해 달라고 풀죽은 목소리로 호소했지만,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임시로 고용되었다는 남자는 특유의 권태로움에도 불구하고 꽤 완고해 보였다. 책임과 권한이 제한된 임시직의 완고함을 휴는 이해했다. 그것은 융통성을 발휘하거나 유연하게 대처할 권한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의도와 상관없이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휴가 그 남자의 동정을 얻어내기 위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궁리하고 있는데 호텔 문이 벌컥 열리고 젊은 남자와 여자가 들어왔다. 거리에서부터 묻혀온 웃음이 로비에 요란하게 퍼졌다. 여자는 굽이 지나치게 높은 구두를 신고 깃털로 장식한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었다. 가면이 가리지 않은 입술은 붉고 크고 두꺼웠다. 술을 마셨는지, 아니면 구두 때문인지 걸음이 뒤뚱뒤뚱했고, 웃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걸음걸이 때문인지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이 흔들렸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놀리듯 몸을 접었다 폈다 하며 반 발짝 앞에서 뒷걸음으로 걸었다. 그들은 프런트 데스크의 임시 고용 직원에게 과장되게 손을 들어 보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지나갔다. 직원은 힐끗 쳐다보았을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휴의 눈에 그것은 몹시 의아한 장면이었다.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요란하게 즐거워하는 몸짓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휴는 남자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은 뭡니까? 여기 투숙하고 있는 겁니까? 폐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남자는 귀찮다는 걸 굳이 숨기지 않고, 선심을 쓴다는 듯 대답했다. 저 손님들 때문에 내가 여기 있는 겁니다. 이 호텔의 마지막 손님들입니다. 내일 오전에 나갑니다. 그 말을 휴는 당신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니라는 말로 들었다. 항의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휴는 그런 게 의미 없다는 걸 간파했으므로 따지지 않았다. 그 대신 저 손님들이 묵고 있으니 자기도 투숙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 손님들은 폐업 공고가 나가기 전부터 묵고 있었습니다. 호텔에 임시 고용된 남자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 호텔은 영업을 중단한 게 아니로군요. 휴가 넌지시 물었다. 영업을 중단한 게 맞습니다. 남자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저들이 내일 이 호텔을 나간다면서요? 그렇다면 오늘 밤은 이 호텔에서 묵는 것 아닙니까? 호텔의 숙박 시스템이 축소된 채로라도 가동되는 거겠지요. 휴가 공손하게 다시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적어도 오늘 밤은, 내일은 몰라도 오늘은 이 호텔이 영업을 하는 거지요. 그렇지 않아요? 휴가 동의를 구하듯 물음표를 길게 끌며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세요. 나는 예약을 하고 여기 왔어요. 예약 확인서를 보여 드렸잖아요? 나는 폐업 상태의 호텔방을 예약한 게 아니에요. 물론 호텔 측에 잘못이 없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발생한 문제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지는 건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어디서 누가 착오를 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고객인 내 실수는 아니에요. 아니, 나는 지금 책임을 따지려는 게 아니에요. 나는 다만 오늘 밤 묵을 숙소가 필요하다는 걸 말할 뿐이에요. 그런데 보세요. 이 호텔에는 묵고 있는 손님이 있어요. 당신은 폐업했다고 말하지만, 저 손님들이 묵고 있는 한 폐업한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이 호텔 예약자라는 게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나에게 빈방을 하나 내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저 손님들과 함께 나도 내일 아침에 나가겠습니다. 휴는 하소연하듯 길게 말했다. 이 임시 고용 직원이 그런 융통성을 보여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 중간에서 목소리 톤이 약간 높아지고 말소리가 빨라지긴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호소하는 톤을 회복했다. 그래도 반응이 없어서 혼자 결정하기가 곤란하다면 매니저든 사장이든 책임자를 연결해 주세요, 라는 말을 덧붙이자, 이윽고 남자가 눈을 들어 휴를 보았다. 표정은 그대로지만 눈빛이 달라졌다고 휴는 느꼈다. 마음을 바꾸거나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할 때 사람들 눈빛이 저렇게 된다는 걸 경험이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휴는 상대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이 건물은 며칠 안에 부서집니다. 시청 건축과의 연례 안전 평가에서 낙제점을 받았거든요. 겉은 멀쩡해 보여도 지은 지 오래되어서 문제가 많은 건물입니다. 저 손님들은 6개월째 장기 투숙 중인데 철거할 때까지 있겠다고 해서 내보내지 못했던 겁니다. 계약이 그렇다고 합니다. 저분들 방만 빼고 철수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저분들 때문에 철거가 미뤄진 겁니다. 저 손님들이 나가면 이 호텔은 바로 폭파됩니다. 남자는 휴가 이곳에 도착해 대화를 시작한 이후 가장 길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폭파요? 하는 반문에도, 네, 폭파 공법을 이용해 해체합니다, 라고 답해서 휴에게 대화에 대한 기대를 품게 했다. 그러나 친절은 거기까지였다. 그러니까 당신을 위한 방은 없다, 그런 말입니다. 이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그의 눈길이 다시 모니터로 향했다.
5.
그들이 묵고 있는 방은 7층에 있다고 했다. 휴는 여행 가방을 끌고 7층까지 계단을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는 사흘 전에 운행이 멈췄다. 사흘 전 7층의 장기 투숙자 두 명만 빼고 모든 투숙객이 체크아웃했다. 그날부터 7층 두 남녀는 계단으로 오르내렸다. 그들은 힘들어하지 않았다. 불평도 하지 않았다. 세상이 그저 즐거운 놀이터인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웃고 몸을 흔들며 걸었다. 하기야 그들은 엘리베이터가 운행될 때도 주로 계단으로 오르내렸다고 했다. 휴를 곤경에서 구해 준 것은 그들이었다. 시끄럽게 떠들며 올라간 지 20분도 되지 않아 1층으로 내려온 그들은 휴와 호텔 직원이 여전히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을 목격하고 참견했다. 임시 고용직인 남자는 당신들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자기들과 상관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며 직원과 휴에게 무슨 일인지 추궁했다. 우리와 상관없는 세상일은 하나도 없어, 하며 남자가 노래하듯 말하자 세상과 상관없는 우리 일도 없지, 하며 여자가 역시 노래하듯 받았다. 그러고는 깔깔 웃었다. 여자는 아까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고, 그 대신 얼굴 절반을 가릴 만큼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남자는 왕관 모양의 모자를 쓰고 해수욕장에서나 입을 것 같은 원색의, 꽃무늬 반바지를 입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봐, 하고 남자가 말하자, 어서, 어서, 하며 여자가 추임새를 넣었다. 이상하고 불편한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물거리는 휴에게 다가온 여자가 몸을 밀착하며,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한데, 이 소심한 남자는 울상만 짓고 있네, 하고 놀렸다. 휴는 제 몸에 닿는 여자의 몸을 피해 뒤로 물러났지만, 여자는 거리가 생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웃었고, 프런트 데스크 직원의 굳은 표정은 더 굳어졌다. 심각한 건 없어. 불가능한 건 없어. 길이 막혀서 못 가는 게 아니야. 안 가니까 길이 막히는 거지. 남자가 춤추듯 빙글빙글 돌며 리듬을 탔다. 어쩌면 저런 가사의 노래가 실제로 있는지 모른다고 휴는 생각했다. 그만큼 자연스러웠다. 여자가 추임새를 넣듯 말해, 말해, 하며 다그쳤다. 그들은 뮤지컬 배우들처럼 노래하고 움직였다. 호텔 직원은 입을 굳게 다물고 표정을 숨겼다. 그러나 여자가 프런트 데스크 위로 기어 올라가 그 좁은 공간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여자는 탭댄스를 추듯 경쾌하게 몸을 움직였다. 굽 높은 구두가 데스크 표면을 밟으며 따다닥따다닥 소리를 냈다. 좁은 공간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여자를 휴는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저러다가 떨어지면 다리를 삘 텐데. 그러나 남자는 그런 여자가 전혀 걱정되지 않는지 팔을 높이 들어 올리고 흔들었다. 여자가 호응했다. 남자가 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해, 말해, 숨기지 말고 말해, 하고 다그쳤고, 그 말을 여자가 따라 했고, 외쳤고, 외침은 고함이 되었다. 그들은 즐겁게 웃고 춤출 뿐이었는데 그로 인해 긴장감이 감도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반복과 스피드, 리듬, 웃음 그리고 소음이 휴의 정신을 휘저었다. 나는 방이 필요해요. 나는 이 호텔을 예약했어요. 그런데 방이 없어요. 휴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소리쳤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거의 고함을 지르고 있다는 걸,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말에도 리듬이 들어가 있다는 걸 휴는 깨닫지 못했다. 아하, 철거 직전 호텔의 방을 얻은 바보로군. 바보가 아니면 방 없는 호텔을 예약하지 않지. 당신은 바보. 여자가 노래했다. 호텔과 함께 사라질 작정이 아니면 투숙하지 않지. 세상은 오늘 지어지고 내일 철거돼. 남자가 노래했다. 지어지고 철거돼. 여자가 따라 했다. 남자가 훌쩍 뛰어 데스크 위에 올라가 여자의 손을 잡았다. 휴는 위험해, 하고 소리 지를 뻔했다. 그러나 남자는 곡예사차럼 능숙했다. 폭파될 거야. 여자가 소리쳤다. 폭파될 거야. 남자가 따라 했다. 남자가 따라 하며 손짓으로 휴를 부추겼다. 따라 해. 그러나 휴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여자가 손짓으로 직원을 부추겼다. 소리 질러. 철거. 철거. 폭파. 폭파. 바보. 바보. 그러나 직원은 따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미친 약쟁이들! 씹어 뱉듯 말하고는 호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남자와 여자는 경기에서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하이 파이브를 하더니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다가 휴의 팔을 양쪽에서 하나씩 잡고 흔들었다. 그 바람에 휴도 그들과 같이 펄쩍펄쩍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방이 있어. 아주 넓어. 우리와 함께 자. 데스크에서 내려온 여자가 휴를 끌고 계단을 향해 뛰어갔고, 남자가 휴의 여행 가방을 들고 뒤따랐다. 철거될 때까지 우리 집. 망할 때까지 우리 세상. 그들은 한목소리로 노래했다. 그들의 노래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휴는 그들이 자기가 모르는 어떤 노래를 부른다는 아까의 생각을 다시 꺼냈다. 단순한 멜로디여서 노래가 조금만 더 이어진다면 그도 따라 부르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계단 입구에 그를 데려다 놓고 돌아섰다. 7층까지 걸어가요. 이 튼튼한 다리로. 다리는 걸으라고 있는 것. 여자가 휴의 다리를 자기 다리로 감으며 말했다. 우리 집은 701호. 701호에 짐을 풀어요. 거기가 우리 집. 우리 집은 곧 당신 집. 남자가 여행 가방을 건네며 말했다. 그러고는 휴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춤추듯 몸을 흔들며 호텔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요란하게 떠들다가 사라진 자리에 갑자기 찾아온 고요가 낯설어서 휴는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 같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복기를 해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어딘가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세상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 같기도 했다. 눈 뜬 채 꿈을 꾼 건가 싶었다. 꿈꾸는 사이에 현실이 증발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관성이 있었다. 의식이 작동하지 않거나 거의 하지 않을 때도 관성은 작동했다. 그럴 때 더 많이 작동하는 것이 관성이었다. 그는 의식이 반쯤 꺼진 상태에서 눈앞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임시 고용된 호텔 직원이 돌아온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고, 그러면 거리로 쫓겨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여행 가방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 정신없는 남녀가 만들어놓은 좋은 상황을 되돌리고 싶지 않았다. 숨이 차고 땀이 났지만 어떤 초조함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쉬지 않고 올라갔다. 7층에 이르러서야 바닥에 주저앉아 겉옷을 벗고 숨을 골랐다. 복도에는 비상구 표시등 말고 다른 불이 없어 어두웠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구겨지고 찢어져 볼썽사나웠고 공기에서는 오래 묵은 먼지 냄새가 났다. 멀리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여럿이 노래 부르는 소리, 확성기에 대고 선동하듯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창문을 흔들며 지나가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물 밖에서 나는 소리를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고 아득했다. 휴의 머릿속으로 내가 왜 여기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그는 그 생각을 붙잡지 않고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두었다. 그는 심각해지지 않으려고 했다. 무엇보다 몸과 마음이 다 지친 상태였다. 초점 없는 그의 눈에 반쯤 문이 열린 방이 보였다. 마치 큰 짐승이 아가리를 반쯤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방이 그들이 말한 701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가리만 보이고 그 안이 캄캄한 방은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두려움은 피하라고 하고 호기심은 다가가라고 했다. 이 경우 대개는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기는데, 두려움 속에는 호기심이 깃들지만, 호기심은 두려움을 쫓아내기 때문이다. 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반쯤 열린 방으로 다가갔다. 비상구 표시등에만 의지해서 자세히 보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더 밝은 빛이 있다고 해도 자세히 볼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침대와 집기들이 빠져나간 방은 영혼이 떠난 몸처럼 황량하고 침울했다. 여행 가방은 물론 사람이 머문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701호는 아닌 듯했다. 황량함과 침울함에 묻은 어둠이 그 공간을 어떤 예언자를 집어삼켰다는 거대한 물고기 뱃속처럼 느끼게 했다. 물고기 뱃속은 아마 캄캄했을 것이다.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피곤이 외투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그의 몸은 허물어지기 직전의 건물처럼 되었고, 영혼이 떠난 몸처럼 되었고, 그러자 설명할 수 없는 아늑함이 그의 몸을 바닥에 뉘었다.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예언자가 맞닥뜨린 것이 캄캄한 어둠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그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곧 허물어질 그 건물처럼 허물어졌다.
6.
환갑이 되던 날 산으로 걸어 올라간 사람이 있었다. 마을에서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언제 일어났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까마득히 오래된 왕조 시대부터 군인이 정권을 잡은 최근까지 의견이 다양했다. 누구에게 들었고 언제, 어떤 처지에서 들었느냐에 따라 달랐다. 대개는 시대 배경 없이 이야기만 전해졌다. 신화나 전설처럼 만들어진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신화나 전설이라고 해도 현실과 동떨어진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야기되는 현실과 이야기를 하거나 듣는 사람의 개별적 현실이 이야기의 수용에 관여했다. 해석과 적용이 중요해지는 것은 모든 텍스트의 운명이다. 처음에는 꽤 구체적이었을 인물에 대한 정보와 사건의 세부가 시간이 흐르면서 뭉개져서 나중에는 한 토막의 장면만으로 남았다. 모든 사람에게 그런 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휴에게는 그랬다. 남자는 환갑이 되던 날 아침에 손수 지은 수의를 입고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일 년에 반은 산속 동굴에 들어가 도를 닦던 도인이라는 설이 있고, 권력 싸움에서 밀려 귀양 온 관리라는 설이 있고, 그 무렵 이미 죽을병에 걸려 제 몸도 잘 가누지 못해서 누가 업고 갔다는 설도 있다. 그런 세부사항은 희미한데 그 사람이 산으로 올라가면서 했다는 말은 선명하다. 한 바퀴 돌았으니 이제 가야지. 어린 휴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어떤 이유인가로 휴학하고 고향에 내려와 있던 대학생 친척이었다. 마을 뒷산인 서산봉 정상의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를 가리키며 친척은 이 바위를 봐라,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었다. 아침 일찍 산을 오른 남자는 그 바위에 몸을 누이고 자기를 데려가 주기를 기다렸다. 해가 그의 몸을 데우고 바람이 그의 몸을 식혔다. 그는 뒤척거리지 않고 한 자세를 유지했다. 해와 달과 바람 말고 아무도 그곳에 접근하지 않았다. 산짐승들도 그를 해하지 않았다. 바위가 그의 몸을 받았다. 그의 몸은 바위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중에 산에 올라간 사람들은 화석처럼 바위에 새겨진 남자의 형체를 보았다. 해와 달과 바람이, 즉 시간이 그 형체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고향을 떠난 후 휴는 그 바위와 바위에 새겨진 사람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었다. 세상은 번잡하고 빡빡하고 소란했다. 그가 사는 세상으로부터 서산봉은 아주 멀었다. 그런데 이제 그곳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게 느껴졌다. 멀리 돌아 그곳에 이른 것 같았다. 낯선 도시, 폐업한 호텔, 집기가 다 빠져나가 황량하고 침울한 방, 바깥 소음이 물 밖의 현실처럼 먹먹하게 들리는 어둠 속에 누워 눈을 감자 긴장이 풀리고 근육들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게 느껴지고, 그러자 오래전에 서산봉에서 보았던 그 바위가 눈앞에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이미지에 놀라 눈을 뜬 그의 앞에서 바위는 더 또렷했다. 어릴 때 그 바위에서 사람의 형체를 본 기억은 선명하지 않은데 낯선 도시의 어둡고 황량한 방에 누운 그의 눈앞에 나타난 바위에는 사람의 형체가 선명했다. 바위에 사람의 형상이 새겨진 것이 아니라 바위가 사람에게 자기 공간을 내주고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그가 누운, 차갑고 딱딱한 방바닥이 그의 몸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공간을 아주 천천히 내주는 상상이 그의 의식에 새겨졌다. 그의 몸이 방바닥에 아주 천천히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런데도 무섭거나 의아하지 않았고, 그는 도로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우당탕우당탕 계단 밟는 소리, 까르르까르르 웃는 소리,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그의 몸을 밟고 지나갔다. 물건 부서지는 소리, 노랫소리, 야릇한 신음도 지나갔다. 한두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축제 전야의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사람들이 거리에서 호텔 안으로 쳐들어온 게 분명했다. 호텔은 폭파될 거야. 콰광. 콰광. 축제의 절정이겠지. 폭파되면 솟아오르겠지. 파편 같은 말들이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를 뚫고 그에게 도달했다. 미친놈. 우리 보고 미친 약쟁이라더니 도망갔어. 호텔의 마지막 손님인 701호의 남녀가 사람들을 몰고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위인들이라는 생각이 휴의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방은 많아. 침대가 없을 뿐이지. 까르르. 콰광. 콰광. 폭약이 필요해. 나 부족해. 더 해줘. 흔들어. 자, 마셔. 까르르까르르. 우리 웃음이 폭약이야. 노래가 폭약이야. 같이 부르자 노래.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노래를 불러 무슨 노래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다만 시끄럽기만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무슨 노래인지 구분되지 않던, 제각각의 노래가 한목소리의 합창으로 바뀌었다. 세상은 오늘 지어지고 내일 철거돼. 철거될 때까지 우리 집. 망할 때까지 우리 세상. 아, 저런 노래가 있었구나. 물 밖의 소리를 물속에서 듣는 것 같은, 모호하고 막막한 상태에서 휴는 감탄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 상황에서 왜 그런 사실이 감탄스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눈물을 흘리게 될지 모른다는 걸 예감했다. 그 예감을 부추기려는 것인지 그 예감으로 부추겨진 것인지, 순간 어떤 목소리들이 그의 공간으로 습격해 들어왔다. 회장님은 부장님을 총애하셨어요. 그건 부정하지 않으시지요? 나를 나무랄 때마다 부장님을 언급했어요. 그러다 보니 내가 야단맞는 게 나 때문이 아니라 부장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잘못이 아니라 부장님 잘못이라는 생각이요. 그게 얼마나 기분을 더럽게 하는지 알아요? 회사의 새 주인은 그를 불편해했다. 근거가 없었다. 더 근거가 없는 것은 이전 주인에게 제기된 엄청난 규모의 횡령과 배임 책임이 휴에게 있다는 주장이었다. 주인의 총애와 신임이 이유였다. 총애와 신임의 증거는 그에게 맡긴 임무였다. 그가 부여받아 수행한 일들, 예컨대 계약과 협상과 보고가 과오의 내용이었다. 회장님의 세상은 문을 닫았어요. 새 문이 열린 겁니다. 이제 새 사람들이 일해야죠. 새 세상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잘 생각해 보세요. 그에게 제시된 한 달은 잘 생각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잘 생각하라고 회사가 내준 시간이었다. 휴는 책임자로서의 소임을 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문이 닫힌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문이 열린 세상에서 책임진다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이 도시에 오면서 자기에게 내린 회사의 임무가 무엇인지 굳이 모르는 체하고자 한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기가 맡은 마지막 임무라는 걸 굳이 모르는 체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광장에서 폭죽을 터뜨리는지 눈을 감고 있는데도 소리가 요란하고 불빛이 번쩍번쩍했다. 폭죽 터지는 소리가 폭탄 터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세상은 오늘 지어지고 내일 철거돼. 철거될 때까지 우리 집. 망할 때까지 우리 세상. 고래고래 내지르는 노랫소리에 금방이라도 건물이 무너질 것 같았다. 세상이 폭발할 것 같았다. 휴는 이 도시에 대해 누군가 써놓은 그 문구, ‘죽기 좋은 도시’를 어디서 읽었는지 생각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이 왜 그런 표현을 썼는지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럴 힘이 없었다. 그 대신 서산봉 정상의 바위에 스며든 사람이 했다는 말이 또렷하게 들렸다. 한 바퀴 돌았으니 이제 돌아가야지. 잠이 몰려 왔다. 바닥이 그의 몸을 꼭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그의 몸이 바닥으로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세상이 고요했다.
7.
축제의 마지막 날, 기술자들이 어반퍼스트 호텔 지하층과 1층, 3층, 5층의 기둥과 내력벽, 그리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보에 구멍을 뚫고 폭약을 설치했다. 건물 외벽에 방호막이 설치되고 사람들의 접근이 차단되었다. 지어진 지 60년 된 7층짜리 건물은 폭발과 함께 순간적으로 주저앉았다. 분진이 일었지만 대단한 양이 아니었고 시간도 길지 않았다. 수습은 신속했고 전문적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잠깐 쳐다보고, 무너진 호텔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입 밖으로 내거나 속으로만 생각한 채 제 길을 갔다. 대부분은 그곳에 60년 동안 호텔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