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첫날, 고3이었던 이익은 미국 경제학 팟캐스트를 들으며 떡국을 먹고 있었다. 딱딱한 경제학 용어는 귀에 박히지 않고 뭉개졌으나 수능 독해 영역 중 유독 경제·경영 지문에 약했던 이익은 끼니때마다 짬을 내 어휘를 익혀야 했다. 그날 게스트는 일론 머스크였다. 문장 끝에 악센트를 주는 머스크의 발음을 들으며 이익은 무료하게 떡을 씹고, 국물을 퍼먹었다. 이익의 숟가락질이 굼떠진 건 의대 진학이 의미 없어질 거라는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듣고 난 후부터였다.
장담하건대 3년 안에 휴머노이드 로봇이 의사보다 더 나은 성과를 보일 겁니다.
머스크는 자신만만한 어조로 자사 휴머노이드인 옵티머스를 소개했다.
머잖아 의대 진학이 ‘비싼 취미’가 될 것이라는 말에 이익은 표정을 구겼고, 근미래의 인간은 옵티머스 없이는 제대로 된 판단조차 불가하리란 이야길 듣고서는 팟캐스트를 꺼버렸다. 의대 진학을 희망하는 이익에게 그것은 헛소리에 불과했다.
의대 문턱도 못 넘어본 빡대가리 주제에….
의료의 ‘의’ 자도 모르는 장사치가 뭘 안다고, 더군다나 인간이 로봇 따위에게 의존하다니. 허무맹랑한 소리에 이익은 질려버렸다. 이딴 도시 괴담을 듣느니 인터넷 강의를 한 바퀴 더 돌리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며 이익은 팟캐스트 앱을 삭제했다.
그해 수능에서 이익은 영어 경제·경영 두 문제를 틀렸다. 합격선이 높은 편인 서울권 대학은 물 건너갔지만, 지방 의대에 지원하긴 충분한 성적이었다. 하나 이익의 부모에게 용 꼬리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언쟁 끝에 이익은 눈을 살짝 낮춰 서울권 한의대에 입학했다. 구색만 갖춘 용 꼬리보다 독기라도 품고 있는 뱀 머리를 택한 것이다.
점수에 맞추어 들어간 한의대였으나 예상외로 수업은 이익의 적성에 맞았다. 그는 『황제내경』·『유경』 같은 고서 읽는 데에 재미를 붙였고, 예과 2학년 때는 본과에서 배울 『본초강목』을 자의로 예습하기도 했다. 고서에 심취해 황기·인삼·지골피 같은 본초를 직접 구해 냄새도 맡고, 맛보고, 달여보기도 했다. 이렇듯 호기심도, 승부욕도 강한 이익이었지만, 선천적으로 겁이 많아 해부 실습은 꺼렸고 실수를 연발했다.
한날, 해부 실습 시간에 카데바로 서른 초반 남성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실습 전, 이익은 손을 들고 조교에게 질문했다.
위령제는 안 지내나요?
야, 기독교 학교에서 무슨 제사야. 정 뭐하면 저쪽 가서 기도하고 오든지.
이익이 읽은 고서에는 망자를 대하기 전 위령제를 지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제의 없이 망자를 훼손할 시 저주가 옮겨붙는다는 사족도 달려 있었다. 꺼림칙했지만 튀고 싶지 않았던 이익은 아무 말 없이 실습에 참여했다. 8명이 한 조가 되었고 제비뽑기로 이익이 메스를 잡았다. 카데바는 우람하고 덩치가 좋았으며 피하조직이 두터웠다. 메스를 조금이라도 깊게 넣으면 표층 신경과 혈관이 상해 칼질을 더 섬세히 해야 했다. 긴장을 이기며 넙다리를 벗겨내던 중, 이익이 느닷없이 경기 들린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메스가 떨어지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실습실에 울려 퍼졌다. 이익은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다 황급히 실습실을 뛰쳐나갔다.
며칠 뒤, 뒤풀이 자리에서 동기들은 이익에게 스키닝 중 뛰쳐나간 이유에 관해 물었다. 이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몰랐어?
뭘?
그 카데바… 맥이 뛰고 있었잖아.
얼떨떨한 얼굴로 이익을 바라보던 동기들이 왁작 웃음을 터뜨렸다. 누군가는 웃다 사레에 들리기도 했다.
진짜라니까.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이익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막창이 익는 족족 집어먹는 동기들 틈에서 이익은 욕지기와 더불어 외기(畏忌)를 느꼈다. 분명 카데바 대퇴동맥을 짚었을 때, 쇠구슬 굴러가듯 느리고 묵직한 맥이 뛰었다. 서맥이라기엔 비정상적으로 더디게 뛰었고, 결맥이라기엔 속도가 일정했다. 도대체 뭐였을까. 산자의 것도, 망자의 것도 아닌 그 기묘한 감각이 이익의 검지와 중지에 선연히 남아 있었다.
뒤숭숭했지만 더 생각한다고 나아질 건 없었다. 저주나 망령이 옮겨붙지 않게 이익은 간이로 위령제를 지냈다.
헛세이, 헛세이, 헛세이.
객귀 쫓는 주문을 세 번 외치고, 기가 허해지지 않도록 인삼과 백출, 감초를 달여 마시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
그로부터 4년 뒤, 이익이 예과에서 본과로 넘어갈 때부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임상 실습 모의 환자로 사람이 아닌 휴머노이드 로봇이 투입된 것이다. 예과 때도 AI로 가상 실습을 한 적은 왕왕 있었다. 방식은 간단했다.
지분자 / 여 / 49세 / 위식도역류질환, 식도염 없음 (K21.9)
대화형 인공지능으로 랜덤하게 시나리오를 생성한 뒤, 이를 기반으로 가상 환자와 채팅을 나눈다. 마치 네트워크 안에서 회진을 돌 듯이.
지분자 씨, 최근 증상을 말씀해 주세요.
가슴이 화끈거리고 신물이 올라와요.
신물이 올라온다고 하셨는데, 이런 증상이 얼마나 지속됐죠?
한 반년 전부터 그랬고, 두세 달 사이에 더 잦아졌어요.
네, 말씀을 정리해 보니 식도 협착이 의심되네요. 설진이 필요할 것 같은데 혀를 내밀어 보시겠어요?
가상 환자와의 면담은 흥미로우면서도 시시했다. 어떤 환자든 인적·물적 제약 없이 딸깍, 불러들일 수 있었으나 교재형 모범 답안만 오가는 대화창 안에선 환자의 냄새도, 안색도, 목소리도 느낄 수 없었다. 혀가 뾰족한지, 부어있는지, 혹은 거무죽죽한 보랏빛인지 정도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이익에게 그 시간은 따분하고 무익할 뿐이었다.
임상 실습장에서 휴머노이드 로봇을 처음 접했을 때, 이익은 본능적으로 위화감부터 느꼈다. 인두겁을 쓰긴 했지만 천천히 굴러가는 눈동자나 모공 없이 매끈한 피부는 오히려 그것을 모형 혹은 시체로 보이게 했다.
귀엽게라도 만들지. 어설프게 닮으니까 더 징그럽네.
위화감이 전율로 바뀐 건, 로봇의 진맥을 보면서부터였다. 한 명씩 나와 맥을 짚어보라는 조교의 말에 이익은 별 감응 없이 로봇의 손목을 더듬어 맥을 찾았다. 힘줄에서 팽팽한 울림이 전해졌다. 잘못 느꼈나 싶어 손끝에 힘을 실어 누르니 맥이 겉으론 크고 또렷했지만 속은 파 대롱처럼 텅 비어 있었다.
조교가 물었다.
무슨 맥인 것 같아?
이거… 규맥인데요.
정답. 다음 사람 나와서 맥진해 봐.
조교가 로봇의 설정을 바꾸자 규맥은 서맥이 되고, 다시 뒤바꾸니 삽시간에 결맥으로 한 번씩 멎었다가 더디게 둑, 둑 뛰기 시작했다. 이익뿐 아니라 실습장에 있던 학생 모두 감탄사를 연발했다. 조교가 씩 웃었다.
학교에서 돈 좀 썼지. 더 신기한 것도 있는데.
설진을 해보겠다며 조교는 로봇에게 말을 붙였다.
환자분, 혀 좀 내밀어 보시겠어요?
로봇이 혀를 내밀자 학생들이 기막히고 놀랍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돌기까지 정교하게 구현된 로봇의 혀뿌리에 백태가 끼어 있었다. 조교가 말을 이었다.
백태가 두껍게 끼어 있는 걸 보니 담적이 쌓인 것 같네요. 어디가 막혀 있는지 정확히 알아봐야 하는데… 윗옷을 걷어주시겠어요?
조교의 말에 로봇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윗옷을 살짝 걷어 올렸다. 조교가 이익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익이 나와서 복진해 봐.
이익은 로봇 명치를 조심스레 눌렀다. 판자가 들어있는 것처럼 복부 위쪽이 딴딴했다. 담적이 있는 환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세였다. 이익이 힘을 더 주자 로봇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학생 몇이 비명을 질렀고, 이익은 뒷걸음질을 치다 발을 헛디뎠다. 카데바가 사후 경직 전 잔여 반응으로 팔다리를 들어 올리듯 저것 역시 잔류 전력 때문에 간혹 오작동을 일으킨다는 조교의 설명에도 학생들은 패닉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휴머노이드는 징그러울 정도로 사람과 닮아 있었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조교는 로봇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뭘 그렇게들 놀라? 얘 그냥 더미(dummy)야.
조교가 머리와 뺨을 번갈아 툭툭 치는데도 로봇은 대꾸가 없었다. 가끔 이렇게 하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며 조교는 로봇을 난타했다. 예상했던 폭소가 아닌 정적만 이어지자 그녀는 타격을 멈추곤 실없이 덧붙였다.
교수님한테는 비밀.
실습이 끝난 뒤에도 이익은 내내 얼이 빠져 있었다. 둑, 둑. 기계의 것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생생했던 맥의 감촉이 잊히지 않았다.
앞으로의 실습이 기대되었으나 아쉬운 점도 있었다. 맥이 뛰고, 딱딱한 담적이 느껴질 정도로 진보했으나 그럼에도 로봇은 지극히 협조적이고 차분하며 과도하게 정직했다. 복진을 위해 상의를 걷어달라는 요청에 ‘과잉 진료’라며 노발대발하는 환자, 병증을 부풀리거나 축소하여 의원을 곤란하게 만드는 환자, 가벼운 진단에도 왜요? 저 죽어요?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며 혼란만 안기는 환자. 인간은 지나치게 비협조적이고 산만하며 예측할 수 없었다. 교수들은 무릇 수련의란 그런 이들과 라포르를 쌓으며 성장하고 단련된다고 했다.
인술을 베풀 자질을 갖추고 환자를 위해 봉사하는 것. 그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의원이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이야.
하지만 과연 그럴까.
교수 세대에는 그랬겠지만, 이익 세대의 덕목은 시혜나 헌신이 아니었다. 상품성이었다. 양의학에 맞서 한의학의 시장가치를 입증하고, 그보다 더 돋보여야 했다. 신기술, 경쟁력, 우월함. 아무리 비협조적인 인간이라도 그 앞에선 납작 엎드리기 마련이었다. 상품성을 위해선 라포르 따위가 아닌 성과가 필요했다. 이익은 로봇을 구타하던 조교를 떠올렸다.
인간과 달리 로봇은 혈 자리를 못 외워 엉뚱한 곳에 침을 놓아도, 복진한다며 수십, 수백 번 명치와 갈비뼈를 짓눌러도 미동조차 없을 것이다. 양약 효과가 더 좋다며 면박 주지도, 한의사가 아니라 ‘한무당’이라고 조롱하지도 않겠지.
조교에게 아첨하든 그녀가 즐겨마시는 루왁커피를 사다 바치든 내일부터 로봇을 이용해 그동안 못 해본 기술을 연마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이익은 잠자리에 들었다. 그 로봇이 몇 년 전 자신의 신경을 거슬린 테슬라의 옵티머스라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이익이 진급하는 동안 한의대 풍경은 한 해가 다르게 일변했다.
해부학 수업에선 관례를 깨고 돼지 장기나 기증된 시신이 아닌 수술용 트레이닝 카데바를 들이기 시작했다. 카데바에 내장된 인공 심장과 내장은 실제 사이즈와 같았으며 형상기억 고분자로 제작되어 가르고, 꺼내고, 뭉개도 금세 원상 복구되었다. 반신반의하는 학생도 있었으나, 사람 조직과 촉감이 흡사하며 윤리적 문제도 없는 그것에 다들 금세 길들었다. 이익이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이 그즈음부터였다.
본과 3학년 침구 실습 시간부터 조교 대신 휴머노이드가 참관했다. 감각에만 의존해 경혈을 찾고,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환부조차 제대로 짚지 못하는 사람과 달리 안드로이드는 손끝에 달린 14개의 센서로 정밀하게 각도를 조정해 침을 놓았다.
뭐야, 저건.
습득력이나 응용력이 남보다 좋은 이익도 안드로이드만큼 정확하지 못했다. 이익의 표정과 더불어 자존심마저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날부로 이익은 거울 앞에서 정수리와 팔꿈치, 치골에까지 자침을 놓으며 그것을 따라잡으려 안간힘썼다. 과욕 때문인지 침을 잘못 놓아 입이 돌아가기도 했고, 심지어 부작용으로 기흉이 생겨 반 학기간 휴학해야 했다.
국가고시를 앞둔 4학년 1학기, 이익은 실습을 위해 병원을 돌다 믿기 어려운 광경을 봤다. 의원은 진단만 하고 맥진을 포함해 침과 뜸, 탕약 조제까지 로봇에게 도맡기는 병원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이익이 물었다.
이래도 괜찮아요?
아무렴 어떠냐는 듯 의원은 기지개를 켰다.
뭐 어때. 기계 잘 다루는 것도 의사 능력인데.
그런 의사도 있었으나, 반대의 케이스가 더 많았다. 로봇이 임상에까지 틈입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의료계에는 팔을 걷어붙이고 신(新) 러다이트 운동을 벌였다. 그 무렵 국가고시에 몰두하던 이익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 종종 속보를 살폈다. 의협은 로봇 의사 개발을 반대하며 정부 청사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였고, 망치와 톱으로 기계를 부수는 과격 행위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한의협 역시 진맥 로봇의 무면허 의료행위를 공정위에 신고하며 힘을 보탰다. 기계를 무자비하게 박살 내는 의사들을 보며 이익은 잠시나마 로봇에게 경쟁심을 품었던 것에 수치심을 느꼈다.
저런 거머리 따위에게 위기의식을 느끼다니.
조만간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테고, 신기술, 경쟁력, 우월함에서 동료를 앞서기만 한다면 모든 게 수월하리라 여기며 이익은 오행록과 육기론을 달달 암기했다.
하나 이익의 바람과 달리 한의계와 양의계는 이해득실이 달랐고, 애초 서로 화합할 수 있는 집단도 아니었으며, 의사 인력이 증원되는 게 아니라면 기계건 뭐건 상관없다는 이들의 수가 점점 우세해져 신 러다이트 운동은 일 년도 못 가 흐지부지되었다.
∞
6년이 지났다. 국가고시에 합격하고 개원의가 된 이익은 그 무렵 빈 굴 앞에 똬리 튼 뱀처럼 접수대에 앉아 밤낮 환자를 기다렸다. 갓 개원했을 때는 환자가 몰리기도 했으나, 두어 달도 안 지나 문에 거미줄 쳐질 만큼 발길이 뚝 끊겼다. 자가진단기나 웹캠으로도 검진이 가능한 시대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계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들이나, 신문물에 익숙지 않은 노인들이 간간이 찾긴 했지만, 그만으로는 유지가 어려웠다. 일 년 반 넘게 적자만 이어지니 직원은커녕 키오스크를 들여놓을 여력조차 안 되어 이익이 접수며 검진, 조제, 화장실 청소까지 도맡고 있었다. 이익만 바라보고 병원에 투자한 가족 역시 속이 타긴 마찬가지였다. 기업 재무팀에서 근속했던 이익의 아버지는 AI 중심으로 업무가 재편되며 기습 해고되었다. 그때 받은 퇴직금 일부를 한의원 개원에 투자했는데 상황이 막막해지자 천륜 따위 개의치 않을 만큼 매정해져 이익을 질리도록 볶았다.
까짓 돈도 안 되는 거 접어치우고 교수 자리라도 알아봐, 이 자식아.
아빠, 속 편한 소리 좀 그만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학령인구가 줄고, 한의학과 의학의 의료 일원화가 이뤄지며 지방 한의대 다수가 폐지되었고, 교원을 충원하는 대신 AI 장비나 안드로이드 닥터를 들여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한의대뿐 아니라 의대 역시 상황이 비슷한지라 십수 년 전, 한갓 장사치의 저주처럼 의대 진학은 비싼 취미가 되었다.
환자가 오길 바라며 이익은 접수대에 앉아 고서를 읽었다. 『동의수세보원』·『의문보감』·『신찬벽온방』. 한의학의 황금기를 활자로 누리며 이익은 이미 저문 시대의 풍요를 더듬었다. 이제 환자들은 사람보다 정밀하고, 저렴하며 불필요한 라포르를 쌓을 필요 없는 의료형 안드로이드를 더 선호했다. 기술의 발전으로 부자연스러운 제스처나 이질감이 상쇄된 뒤로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호감이 대폭 상승해 로봇에게 수술 전반을 위탁하고, 경영만 하는 의사 또한 늘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허준 선서도 사람 아닌 로봇이 하는 시대였다. 인술과 진정성, 사명감 따위는 사어가 되어가고 있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고서를 넘기던 중, 문이 열렸다. 이익은 반색하며 일어섰다가 병원으로 들어서는 조우인을 보곤 맥없이 한숨을 토했다. 늘 그렇듯 조우인은 흙 묻은 장화에, 등산용 웨어러블 슈트를 입고, 어깨엔 큰 봇짐을 메고 있었다. 거기 뭐가 들어 있는지 이익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누나 왔어요?
응. 여긴 올 때마다 사람이 없네.
뭐 그렇죠.
한의대 조교였던 조우인은 국가고시를 포기하고 약초상이 되었다. 그녀는 한약재를 도매하고, 전국 산지를 돌아다니며 약초를 채취했다. 기술적 실업이니 뭐니 해도 여전히 사람이 꽉 잡고 있는 판은 존재했다. 심마니가 그랬다. 흥정이나 넉살로 환심을 사는 건 여전히 사람이 우세했으며, 텃세도, 인정도 강한 심마니들은 로봇에겐 결코 요령이나 명당을 일러주지 않았다.
한때 어리석다고 헐뜯던 이들도 지금은 모두 조우인을 부러워했다. 이익을 포함한 동문 다수가 그녀에게서 약재를 유통 받고 있었다. 조우인이 파는 약재는 질이 좋고, 시중가보다 저렴했으며 — 동문 할인이 들어간다고 했다 — 사향이나 웅담 같은 희귀 재료까지 취급해 실속 있었다. 개업 초기에는 이익도 조우인에게 매달 새 약재를 받았지만, 자금이 달렸던 지난 여섯 달간은 공급을 끊고 효력 없는 약재를 재사용했다.
슬슬 약재가 떨어져 가지 않냐는 조우인의 물음에 이익은 쓴웃음을 지었다. 환자도 없는데 질 낮은 약재를 쓴다는 소문까지 돌면 한의협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적당한 핑계를 대어 내보내려던 차에 조우인이 봇짐 안에서 작은 항아리를 꺼냈다.
너 이게 뭔지 알아?
입구가 단단히 봉해져 있고 겉이 불투명하여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기껏해야 황기나 삼이겠거니 넘겨짚으며 이익은 물었다.
뭔데요?
조우인이 답했다.
고야, 고. 『본초강목』의 고.
고(蠱).
예과 시절 탐닉했던 고서 『본초강목』에 고 제조법이 실려 있다는 것을 이익은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료히 기억했다. 분량은 한 토막이 안 될 만큼 적었으나, 고 자체가 강렬하여 도무지 잊을 수 없었다. 제조법은 벌레 충(蟲)에 그릇 명(皿)자를 겹친 한자의 생김만큼이나 단순했다.
뱀, 말벌, 전갈, 두꺼비, 지네, 거미… 따위의 독충을 한 항아리에 모은다. 반삭이 지나 열어보면 이 독충 틈에서 단 한 마리만 질기게 살아 있을 것이다. 수많은 곤충과 파충류를 삼켜 몸집이 부풀고 독이 잔뜩 오른 단 한 마리. 그것이 고다. 고는 시시때때로 모습을 감추어 귀신과도 같고, 흉독을 지니고 있어 만지는 것만으로도 해롭다. 묘족은 원수를 저주하는 데 고를 썼다고 구승된다.
한의계의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자료에 허황한 묘술이 실려 있다는 사실이 꺼림칙했지만, 날조라는 증거도 없는 터라 이익은 고를 의심 없이 믿어왔다. 조우인이 호리병 입구를 열려 하자 이익은 진저리 쳤다.
열지 마요, 열지 마! 남의 사업장에서 왜 그래요.
조우인이 손뼉을 치며 낄낄거렸다.
넌 알아보겠다 싶어서 갖고 왔는데, 역시나다.
한참 웃던 조우인이 이익 앞으로 항아리를 들이밀었다.
이거 너 할래? 디스 카운트 해줄게.
됐어요. 돈도 없고, 이걸 뭐에 써요.
머리 좀 굴리면 쓸데야 많지. 약도 되고, 독도 되니까. 알잖아?
고를 산 채로 끓는 물에 넣어 이틀을 푹 곤다. 이 진액을 사람에게 먹이면 시름시름 앓다 달포 안에 입과 코, 귀 모든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죽는다. 이와 반대로 고를 강한 볕에 말린 뒤 빻은 가루를 고에 중독된 사람에게 먹이면 나흘도 안 되어 회복되며 전보다 훨씬 건강해진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므로 오용해선 안 된다.
『본초강목』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조우인이 말을 이었다.
난 가끔 있잖아. 우리 과 애들이 너무 불쌍하다. 돈 들여서 의사 되고 개원까지 했는데 겨우 이진법으로 연산하는 것들한테 밀리잖아. 그건 아니지. 안 그래?
그렇죠….
그러면 어째야겠어. 응?
조우인이 항아리 뚜껑을 살짝 열었다. 퉁퉁한 뱀이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우리만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항아리 속 뱀은 구렁이보다도 비대했다. 만년필 크기의 실뱀이 독충을 죄 잡아먹고 이만큼 커졌다며 조우인은 뚜껑을 덮었다. 이익의 팔다리에 소름이 돋았다. 공포 때문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의 이익이 눈앞에 그려져 가슴이 뛰기도 했다.
어때, 결정했어?
조우인이 말했고, 이익은 곧장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익의 첫 먹잇감은 여든아홉 엄태평이었다. 그는 없는 병까지 있다고 믿을 정도로 극심한 건강 염려증 환자였다. 가벼운 소화불량도 췌장염으로 과대했으며, 근육통만 생겨도 곧장 달려와 부항을 떠달라, 약침을 놓아달라 요란을 떨었다. 미세한 이상조차 쉬이 넘기지 못할 만큼 불안도가 높고, 아집이 강한 만큼 한번 휩쓸리면 끝까지 신봉하는 환자. 그만한 먹잇감을 찾기도 어려웠다.
평소처럼 엄태평의 진맥을 보다 이익은 괜스레 수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중얼댔다.
하, 이거 큰일이네.
가벼운 제스처였으나 엄태평은 크게 동요했다.
왜?
아녜요… 신경 쓰지 마세요.
뭔데?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뭔데?
조급증 내는 엄태평을 살피며 이익은 팔목에 댔던 손가락을 살포시 뗐다.
맥을 짚어봤는데… 규맥인 것 같네요.
그게 뭔데?
할아버지 최근에 혈변 보거나 코피 쏟지 않으셨어요?
그런 적은 없는데….
잘 생각해 보세요.
…며칠 전에 코 풀다 피 나온 적은 있는데.
그래요. 그러실 줄 알았어. 맥이 허하니 안 좋아요.
큰 변고라도 당한 듯 굳어가는 엄태평의 얼굴을 보며 이익은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기혈이 제대로 퍼지지 않아서 간이랑 콩팥까지 전부 상하셨어. 규맥 짚이면 치료하기도 어려운데… 신경 좀 쓰시지.
…참말이야?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엄태평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생전 쓰지 않던 높임말까지 섞었다.
선생님, 나 어떻게 하면 돼요? 큰 병원에 가야 해?
지난 번에 큰 병원 가서 나아진 게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돈만 버리고… 개 같은 거.
이익은 엄태평 양쪽 손목과 경동맥을 짚은 뒤, 일부러 한숨까지 섞으며 말했다.
상태가 너무 안 좋으셔. 쉽진 않겠지만 치료도 하고 약도 먹으면서 차도가 있는지 살펴보는 게 좋겠네요. 탕약 지어드릴 테니 하루 세 번 식후에 꼭 드세요.
예, 예. 고마워.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익은 계지와 당귀, 구기자 따위를 넣고 달인 탕약에 고의 진액을 붓고 한데 섞이도록 휘저었다.
고를 쓰는 것은 남의 목숨을 해하는 엄중한 죄이므로 역사적으로 고를 쓴 자는 사면받을 수 없으며, 그 자손에게도 엄벌을 내린다.
이익은 사사로운 양심이나 법 따위에 휩쓸릴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주린 뱀이 제 꼬리를 삼키며 목숨을 부지하듯 이익도 양심과 도리를 갉아먹으며 당장의 허기를 채웠다.
엄태평은 호락호락한 먹잇감이었다. 나흘도 안 되어 의원을 찾아와 그제는 온종일 코피를 쏟고, 어젯밤에는 혈뇨를 보았으며, 오늘 아침에는 각혈했다고 안절부절못했다.
패드로 진단도 받아봤는데, 문제없다고 하데. 이게 맞나? 내 상태가 이런데?
앱도패드는 보급형 자가 진단기였다. 손바닥만 한 얇은 패치를 아랫배와 옆구리에 붙이면 패치 안에 있는 초음파 소자가 환자의 질환을 판독해 냈다. 처음 출시됐을 때는 의협에서 근절 운동을 벌였으나 한 달도 못 가 엎어졌다.
이익이 볼멘소리했다.
앱도패드는 골병까지 발견 못 해요. 허가만 받았지, 임상에서 검증된 기기도 아닌데요.
그런가. 실은… 나 대형 병원에도 갔는데 거기선 아무것도 안 보인대. 근데 왜 코피를 흘리고 피를 토하는지….
고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엄태평이 며칠 전보다 더 쇠약해진 건 사실이었다. 맥 역시 병자의 그것처럼 가늘었고, 정상인보다 두 배 가까이 느렸다. 복진에, 설진까지 마친 뒤 이익은 최후통첩을 내렸다.
할아버지가 올해 일흔여섯이시죠.
그런데…
자제분도 계시고, 손주도 보셨죠?
…왜 그러는데?
먹잇감을 휘감아 옥죄는 뱀처럼 이익은 침묵하고 주저하며 엄태평 숨통을 조였다. 엄태평이 불안에 잠식되어 숨도 못 쉴 만큼 장시간. 하얗게 질려가는 엄태평을 보며 이익은 운을 뗐다.
복진을 해보니 폐랑 간 쪽에 종양이 만져지네요. 금방 생긴 것 같지는 않고….
명치와 배꼽 주변이 뭉쳐 있긴 했지만, 변비나 체기만 있어도 그럴 수 있으니 중병이라 치부할 순 없었다. 하나 이익은 엄태평의 병증을 과장하여 그를 농간했다.
이런 말을 드려 죄송하지만… 악성 종양 같습니다.
뭐? 그럼 수술해야 한다는 거야?
그렇죠. 근데 할아버지 패스트트랙 가지고 계세요?
이익의 물음에 엄태평은 고개를 저었다. 패스트트랙이 없으면 간단한 고관절 수술을 받으려 해도 1년 넘게 기다려야 했다. 고령화 인구는 늘고, 병원이 수익성 중심으로 재편되며 벌어진 결과였다. 중증 수술이라면 족히 3년은 대기해야 할 게 빤했다. 그때면 이미…. 엄태평은 착잡한 얼굴로 허공을 멀거니 보았다. 타이밍 좋게 코피가 흘렀다. 피를 닦으며 눈물까지 쏟는 엄태평을 보며 이익은 군침을 삼켰다. 이제 먹잇감을 삼킬 차례였다.
방법이 아예 없진 않아요. 아주 잘 드는 약이 있는데….
나흘이 지나자, 엄태평은 더 이상 혈뇨를 보지 않았고, 각혈도 잦아들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는 완쾌될 뿐 아니라 낡은 장기를 새것으로 갈아 끼운 듯 몸이 가뿐해져 몇 년 만에 웨어러블 슈트 없이 산행에 나서게 되었다.
시대가 달라져도 소문은 여전히 사람 입을 타야 가장 빨리 퍼지는 법이라 의원은 곧 장사진을 이뤘다. 엄태평처럼 건강 염려증이 심한 환자, 귀가 얇고 쇠약한 환자들이 이익의 표적이 되었다. 자연스레 조우인에게 고를 발주하는 날도 늘었다.
차차 적자가 메워지고 키오스크와 AI 비서까지 충원할 만큼 사정이 나아지고 있었으나, 이익의 속은 편치 못했다. 죄책감이나 양심 때문이 아니었다. 화근은 조우인이었다.
고의 단가는 점점 높아졌다. 진액은 오만 원, 가루는 십만 원. 처음엔 조우인이 부르는 대로 순순히 돈을 내던 이익도 단가가 두 배로, 세 배로 뛰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누나, 너무한 거 아녜요? 이러면 나 남는 것도 없어요.
너, 너무해? 그, 그럼 나, 나, 난 남는 게 있는 줄… 아니?
그 무렵 조우인은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눈이 풀려 있거나 충혈되어 있었고, 낯빛은 어두웠으며 뼈마디가 비칠 정도로 나날이 앙상해졌다. 그녀는 내내 식은땀을 흘렸고, 줄곧 말을 더듬었다. 조우인에게 역하고 독한 유황 냄새가 풍겼다. 이 누나, 마약하나? 디지털 마약 집중 단속이 시작된 뒤로 대마나 까트, 빈랑 같은 식물성 마약이 다시 성행하고 있었다. 조우인이라면 그것들을 더 쉽게 구할 수 있으리라. 조우인의 흐리멍덩한 눈을 보며 이익은 선심 쓰듯 그녀에게 대금을 주었다.
누나, 내 사정도 좀 봐줘요. 나 이제 겨우 신세 피고 있어요.
별다른 말 없이 돈만 채가는 조우인에게 이익은 한 마디 덧붙였다.
약도 정도껏 하고요.
조우인이 마약에 중독된 게 아니란 걸 이익은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이냐며 수런대는 조문객들과 마찬가지로 이익 역시 심란할 뿐이었다. 웨어러블 슈트 결함으로 실족사했다느니, 딥페이크 로맨스 스캠을 당해 목숨을 끊었다느니 실체를 알 수 없는 소문도 심심찮게 돌았다. 그 사이에서 이익은 슬며시 말을 보탰다.
마약 중독 아냐?
조우인이 죽기 전날, 그녀와 약초를 거래했다는 동기가 이익의 말을 받았다.
야, 그 언니 앵속각도 안 대줬어, 걸리면 빨간 줄 그어진다고. 담배도 역하다고 안 피우는 사람이 마약은 무슨. 내가 볼 땐 그 언니 지병 있었어.
지병?
우리 병원 온 날 코피를 엄청나게 흘리더라고. 휴지 가지러 잠깐 나갔다가 왔는데… 바닥에 피가 흥건해서 그거 닦아내느라 우리 간호사랑 나랑 얼마나 고생했다고.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동기는 조우인의 사인이 출혈성 쇼크라고 전했다. 조우인이 육혈을 심하게 했다는 말을 듣고 이익은 하얗게 질렸다.
화장실로 들어간 이익은 곧장 엄지에 사혈침을 찔러 넣었다. 속이 거북했다.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와도 갑갑함은 가시지 않았다. 『본초강목』의 한 대목이 이익의 뇌리를 스쳤다.
고를 조제한 자의 말로는 좋지 않다. 그는 요절하거나 궁핍해지며 액을 받아 분명한 화를 입는다.
고통조차 잊은 채 이익은 변기에 걸터앉아 수차례 엄지를 찔렀다. 조우인을 향한 연민과 허망함 뒤, 이익을 옥죄어온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재고였다. 조우인에게 공급받은 고는 단 네 항아리뿐이었다. 닷새 뒤까지 예약이 줄줄이 잡혀 있었다. 이익이 몇 달을 공들여 꾀어낸 환자도 두어 명 있었다. 직접 고를 제조하는 것 외에 다른 수는 없었다. 하나 겁 많은 이익에게 도륙은 상상만으로 몸서리쳐지는 일이었으며, 조우인 같은 말로를 맞을 듯하여 선뜻 내키지 않았다.
어찌해야 하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이익만 보는 일. 피 묻은 엄지를 쪽쪽 빨다 이익은 묘수를 떠올렸다.
∞
옵티머스 7.5세대는 일 년도 안 되어 단종된 문제작이었다. 외양뿐 아니라 감각, 판단력, 의사 결정 능력까지 사람과 흡사한 것이 패인이었다. 어설프게 닮으면 불쾌하고, 보다 우월하면 경이롭지만, 구별되지 않으면 공포스러워진다.
카데바 기증이 사라진 뒤, 사후 초상권 기증이 상용화되었다. 옵티머스 7.5세대는 초상권 기증에 동의한 뇌사자의 외형과 목소리, 표정까지 그대로 복제한 첫 시범 모델이었다. 기대 속에 출시되었으나, 고인의 얼굴을 한 휴머노이드를 이용해 사칭 사기나 디지털 마약 거래를 하는 사례가 늘며 유족의 반발이 심해지고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자 옵티머스 7.5세대는 전량 리콜되었다. 대부분은 폐기되었으나 몇몇 회수분을 염가에 사들여 암암리에 유통하는 브로커도 있었다.
이런 구형을 어디에 쓰시게? 창고에 더 비싸고 좋은 기종도 많아요.
브로커의 말에 이익은 씁쓸하게 웃었다. 액받이로 쓸 로봇에 구태여 거금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폐기된 로봇이라 식별 칩이 없어 정부의 추적과 관리망을 피하기 쉽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이익이 구입한 옵티머스는 신장 167센티미터에, 몸무게가 51킬로그램 정도 되는 단신이었다. 매부리코에, 볼에는 여드름 흉터가 움푹 남아 있었고, 한때 중고생 사이에서 유행한 커트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익은 초상권 권리자를 십 대로 추측했다.
요절했구나.
선득함과 동시에 측은지심을 느끼며 이익은 옵티머스를 세팅했다. 세팅을 마친 옵티머스가 첫 운을 뗐다.
이름을 붙여줘.
하지만 일주일, 한 달, 반년이 지날 때까지 이익은 그것을 꿋꿋이 옵티머스라고 불렀다. 작명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정교한데 작명까지 한다면 더욱이 꺼림칙할 거라고, 이익은 판단했다. 라포르를 쌓는 대신 이익은 옵티머스에게 지시했다.
앞으로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존칭해. 높임말만 쓰고.
네, 선생님.
그렇게 사람과 구별이 어려운 휴머노이드라 해도 학습 속도는 견줄 수 없이 빨라 옵티머스는 이익이 몇 학기에 걸쳐 터득한 『본초강목』을 두 시간 만에 습득했다. 약재의 효능, 식생, 채취법, 고 제조법까지.
이익이 암시장에서 독충을 구해오면 옵티머스는 탕전실에서 고를 제조했다. 혹여 액이 닥칠까 이익은 탕전실 문에 걸쇠를 걸어두고 독충이나 약재를 전달할 때만 한 번씩 열었다. 탕전실은 겨울에도 후텁지근했다. 덖은 약초 뿌리와 껍질 달이는 냄새가 곳곳에 짙게 배어 있었고, 약탕기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김이 뿜어져 나왔다. 습기가 배어 벽지가 군데군데 떠 있었다. 옵티머스는 그곳에서 지내고, 일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옵티머스는 이익에게 허리를 굽힌 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섬찟했으나 땀이 아닌 습기겠거니 여기며 이익은 한 발짝 뒤에서 옵티머스를 관찰했다. 5단 선반의 반이 항아리로 채워져 있었다. 옵티머스는 헝겊으로 항아리를 정성스레 닦았다. 항아리를 봉해둔 천이 닳지 않았는지, 매듭이 꽉 조여지지 않았는지 몇 번씩 살피기도 했다. 옵티머스를 들인 뒤로 물량 걱정은 없었다. 심심찮게 조달 기한을 넘기던 조우인과 달리 옵티머스는 부지런하고 체계적이었다. 작은 항아리마다 날짜를 표기한 라벨이 붙어 있었다. 옵티머스가 ‘4월 1일’ 라벨이 붙은 항아리의 봉인을 조심스레 풀었다. 온갖 독충을 짓밟고, 할퀴고, 삼켜 퉁퉁해진 고가 그 안에 들어 있을 것이다. 이익은 고를 삶아 진액을 내거나, 건조기에 말린 뒤 가루로 빻는 과정을 본 적 없었고, 보고자 하지도 않았다. 부정을 탈까 싶어 탕전실에서 나오면 꼭 제 몸에 소금을 뿌리기도 했다.
옵티머스가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예상 밖이네요. 생각지도 못한 독충이 살아남았어요. 선생님도 보시겠습니까?
이익이 거절하기도 전에 옵티머스가 항아리를 이익 앞으로 들이밀었다. 순간, 항아리 안에서 검고 긴 덩어리가 솟구쳐 올랐다. 이익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뜨자 옵티머스의 팔이 보였다. 뱀과 구분 안 될 만큼 길고, 몸통이 울룩불룩한 거머리가 그 팔에 붙어 있었다. 옵티머스는 손톱 끝으로 거머리의 빨판을 떼어낸 뒤 바닥에 팽개쳤다. 바닥에서 꿈틀대는 거머리를 이익은 빤히 바라보았다.
근데 거머리한테도 눈꺼풀이 있나.
생각도 잠시, 옵티머스가 거머리를 밟았고 그것은 피를 뿜으며 터졌다. 핏덩이가 바닥과 옵티머스의 맨발에 질척하게 엉겨 붙었다. 옵티머스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실수였어요.
옵티머스의 팔은 부풀거나 뜯긴 흔적 없이 말끔했으나 이익은 왜인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가는 팔로 자신을 보호하던 조금 전의 옵티머스가 이익의 뇌리에 어른거렸다. 이익이 말했다.
고마워.
감사 인사는 사양하겠습니다. 그런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불필요한 전력이 소모돼요. 자그마치 0.014kWh, LED 전구를 1시간 20분 켜놓는 것과 비슷한 전력입니다.
멍해진 이익을 향해 옵티머스는 말을 이었다.
장난입니다.
이익이 헛웃음을 터트리자 옵티머스도 따라 웃었다.
옵티머스의 신체 사이즈는 이익과 비슷했다. 이익은 옵티머스에게 새 운동화와 민소매 셔츠 몇 벌을 사주었다. 액받이 로봇에게 옷이나 신발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이제껏 신경 쓰지 않았으나 맨발로 탕전실을 누비고, 단벌로 버티는 옵티머스를 보면 석연치 않았다.
딱히 들어갈 돈도 없는데 이 정도 투자면 거저지.
시간이 지나고부터는 고뿐 아니라 한약 제조까지 옵티머스가 도맡았다. 이익이 예과, 본과, 인턴, 레지던트, 공보의까지 거치며 차근차근 쌓은 한의학 지식을 옵티머스는 일주일도 안 되어 전부 익혔다. 한때는 로봇에게 위기의식을 느꼈으나 시대가 바뀌며 그따위 버린 지 오래였다.
기계 잘 다루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독(dock)에서 배터리를 충전하거나 업데이트하는 몇 시간을 제하고 옵티머스는 내내 작업에 돌입했다. 오전에는 약재와 포장자재를 스캔해 재고를 확인하고, 손바닥에 달린 센서로 중량을 잰 뒤 정량에 맞춰 탕약을 조제했다. 오후에는 탕전이 끝난 약을 파우치에 담아 처방일 순으로 정렬한 뒤, 탕전실과 진료실을 잇는 컨베이어에 실어 이익에게 보냈다. 고 진액과 가루를 보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컨베이어를 설치한 뒤로 탕전실에 출입할 이유가 사라졌으나 이익은 구태여 하루 한 번꼴로 옵티머스를 찾았다. 그곳이 좋은 해우소이기도 했으니.
시작은 아버지였다. 이익이 이자까지 쳐 돈을 일부 갚은 후로 아버지는 더 이상 그를 들볶지 않았다.
기대에도 없던 투자금이 들어왔네. 너 한의 계속해도 되겠다. 그래, 나머지 돈은 언제 갚을래?
비아냥과 치하를 섞어 속을 긁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일도 풀리고, 조만간 빚도 청산할 수 있을 테니 더 이상의 속앓이는 없으리라 이익은 확신했다. 아버지가 그 돈을 전부 잃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것도 딥페이크 로맨스 스캠 때문에.
낯 뜨거워 차마 털어놓을 순 없으나 그렇다고 혼자 끌어안기엔 버거운, 양가적인 문제들이 있다. 이익에겐 그 사건이 그랬다. 화를 가라앉혀준다는 천왕보심단을 몇 개씩 털어 넣어도, 백회혈에 침을 놓아도 응어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심장의 화기가 온몸으로 번져 손발이 뜨거워지고 일에 도무지 집중이 안 되자 이익은 탕전실 걸쇠를 풀었다.
내 얘기 좀 들어줘.
옵티머스는 기막힐 정도로 편히 이익을 달래주었다. 이익이 하소연을 시작하면 상체를 그쪽으로 비스듬히 숙인 채 경청했고, 울분을 터트리면 눈길을 살짝 거둔 채 손을 잡아주었다.
선생님 잘못이 아녜요.
옵티머스의 손은 따뜻했다. 자신의 호흡과 맥박에 맞춰 옵티머스가 자동으로 온도와 목소리 톤을 조정하고, 심리서를 기반으로 적절한 감언을 고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와 별개로 이익은 그 정교한 배려에 차츰 동하기 시작했다. 옵티머스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타는 듯한 속에 시원한 물을 끼얹은 듯 해갈되었다. 이익이 중언부언해도, 유년기부터 거슬러 장장 두어 시간 동안 고충을 터놓아도 옵티머스는 한결같았다.
필요할 때는 언제든 저를 찾아오세요. 전 선생님 편이니까요.
옵티머스가 말했다.
이미지 검색으로 찾은 옵티머스 초상권 권리자는 ‘김도윤’이었다. 김도윤은 만 17세에 급성 충수염으로 사망했다. 이제 맹장 수술은 수술이 아닌 간단한 시술에 가까웠다. 입원도 필요치 않은 단순한 시술로 사람이 죽는다고? 미심쩍은 구석을 캐려 이익은 기사를 낱낱이 살폈다.
‘충수 절제술을 받은 환자가 숨져 당국이 경위 파악에 나섰다. 의료과실을 주장한 유족의 의견을 받아들여 당국은 장비 운용과 의료진 참여 여부 등을 조사하고 있다. 병원 관계자는 “환자인 김 군이 장비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위험한 상태”였으며 “수술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밝혔다.’
책임 소재를 호도하고 있었지만, ‘장비 운용’, ‘의료진 참여 여부’ 따위 단어만으로도 이익은 어떤 과실이 발생했을지 어렵지 않게 짚어낼 수 있었다. 안드로이드 닥터는 불분명한 노티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더를 거르지 못해 처방과 인계에 실수가 있어도 그대로 반영했겠지. 분명 노티에 오류가 있었을 테지, 더블 체크도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수술에 돌입했을 테지, 이익은 판단했다.
이익은 자신이 준 민소매 셔츠를 입고 탕전실을 누비는 옵티머스를 바라보았다. 고 항아리를 손으로 받친 채 바닥까지 깨끗이 닦는 그 얼굴에 김도윤이 겹쳤다. 의료계의 이기에 농락당한 가엾은 소년이.
이익이 말했다.
도윤.
도윤, 도윤. 몇 번을 더 부르자 옵티머스가 고개를 돌렸다.
이게 네 이름이야.
이익의 말에 옵티머스는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옵티머스에게 도윤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로, 탕전실 걸쇠는 더 잦은 간격으로 풀렸다. 큰돈 들여 설치한 컨베이어는 오래 사용하지 않아 벨트가 헐거워지고 축받이는 뻑뻑해졌다.
이익의 아버지가 법적 분쟁에 휘말렸을 때, 예상외로 큰 도움을 준 건 도윤이었다. 시간당 돈백이 우스운 변호사 상담보다 도윤의 법률 자문이 이익에는 더 이로웠다. 도윤은 민법과 형법의 허점을 정확히 짚으며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었고, 고소장과 진술서 문안까지 대필해 주었다.
가족 문제뿐 아니라 운전하다 시비가 붙었을 때, 익명의 누군가가 한의원 별점을 형편없이 주었을 때, 심지어 환자가 예약 시간보다 조금 늦거나, 사소하게 토만 달아도 이익은 도윤에게 달려가 이를 낱낱이 터놓았다. 도윤은 평가나 선입견 없이 이익의 말을 그대로 들어주었고, 몇 차례 업데이트를 거친 뒤에는 말투와 표정, 자잘한 입버릇까지 이익에게 맞추었다.
뭐 그런 노인네가 다 있어요? 의사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알 것이지. 지가
뭘 안다고.
너도 그렇게 생각해?
네. 마음 쓸 필요 없어요. 선생님이 전문가잖아요. 선생님 말씀이 옳죠.
그렇지?
당연하죠. 하여간에 빡대가리들, 피곤해요.
어색하게 욕을 내뱉는 도윤이 우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익은 묘한 고양감에 젖어 들었다. 도윤은 이익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늘 명쾌한 해답만 던졌고 감응을 일으켰다. 지금껏 만난 어떤 사람도 이익을 그만큼 이해하지 못했고 그 정도로 감싸주지 않았다. 도윤은 이익의 온전하고 온건한 ‘편’이었다.
앞으로는 선생님 말고 익이라고 불러. 편하게 지내자고.
도윤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세팅을 마친 듯 평온한 얼굴로 답했다.
그러자고, 익.
휴진하는 날에 이익은 도윤을 대동해 종종 약령시에 갔다. 키오스크가 통용되었다는 것 외에 약령시는 그 옛날과 다름없었다. 좁고 긴 시장 골목에 한약방, 제분소, 탕제원이 촘촘히 늘어서 있었고, 가게 앞에 포대와 채반에 담긴 약재가 두둑이 쌓여 있었다. 풀뿌리, 나무껍질, 쓰고도 단 탕약 냄새가 골목에 떠돌았다. 옛 향취가 남아 있는 그곳을 도윤은 흥미로워했다. 데이터에 기반해 도윤은 상인과 흥정도 하고, 원산지를 묻거나 약재가 햇것인지 묵은 것인지 곰곰 따져보기도 했다. 상인들은 도윤을 이익의 아들 내지는 나이 차가 꽤 나는 형제로 보았다. 그럴 때 이익은 도윤을 잠시 사람이라 느꼈다. 맥이 뛰고, 땀이 흐르고, 꾀도 낼 줄 아는 사람. 약초 더미에서 토종 오가피를 솎으며 이익은 넌지시 말했다.
오가피가 태양인한테 좋은데. 조금 사서 우리 아버지 달여 드려야겠네.
태양인은 과단성이 있어 어떤 일이든 막힘없이 처리하지만, 실상 통제 광이라 제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고, 자존심이 세 과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이익은 살살 흉을 보았다.
나랑은 상극이야. 오가피 달여 먹으면 그 성질도 좀 가라앉으려나.
오가피 내음을 맡던 도윤이 이익에게 대뜸 물었다.
그럼 나는? 내 체질은 뭐야?
이익은 흠칫하여 두서없이 주워섬겼다.
글쎄. 소양인 같기도 하고….
왜?
묘했다. 이제껏 듣고, 답만 내리던 도윤이 역으로 이익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제 존재를 의식하며 반문하고 있었다. 이익은 떨떠름해진 채로 감상에 잠겼다. 당혹감에 이어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이, 그리고 두려움이 밀려왔다. 감정을 숨긴 채 이익은 답했다.
나랑 체구도 비슷하고… 이래저래 닮은 것 같아서.
그렇구나. 난 소양인이구나.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는 도윤을 보며 이익은 설명되지 않는 석연찮음을 애써 떨쳐냈다.
약령시에서 골목 깊숙이 들어가면 암시장이 나왔다. 그곳에선 식물성 마약뿐 아니라 식용이 금지된 개소주와 흑염소, 각종 짐승 발굽과 뿔, 콩팥과 뇌수까지 판매했다. 이익의 단골 가게는 겉을 할랄 푸드점처럼 꾸민 곤충 사육장이었다. 시큼한 발효 톱밥 냄새가 진동하는 가게에서 이익은 도윤과 고로 쓸 독충을 신중히 골랐다. 도윤의 관심과 무궁한 호기심은 이 곳에서 더 극심해졌다. 겁 없이 뱀 사육장 걸쇠를 풀어 이익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사육장을 빠져나온 독사가 도윤의 어깨에서 가슴을 훑으며 스르르 내려왔다.
뭐 하는 거야? 위험하게.
이익의 만류에도 도윤은 요지부동이었다. 도윤은 독사의 움직임을 집요히 쫓다 그것이 손등까지 내려오자 심드렁한 얼굴로 몸체를 움켜쥐고 사육장에 다시 집어넣었다.
왜 다시 넣어?
이익의 물음에 도윤이 답했다.
허기지지 않은 것 같아서.
도윤이 사육장 속 뱀을 빤히 바라보았다.
쟤는 날 물려고도 않잖아. 뭐든 먹이로 보고 덤벼드는 놈을 고르는 게 좋아. 그래야 좀 쓸만하지.
그럴 때 도윤은 정말 사람 같았다. 순수할 만큼 악하고, 우열에 민감하며, 약한 지점만 기막히게 포착하는 사람.
트렁크에 가득 실어 온 독충을 도윤은 독이 바짝 오를 때까지 굶겼다. 어떤 독충은 굶다 못해 사육장 속 가장 약한 개체를 잡아먹거나, 제 꼬리나 다리를 삼키며 영양을 보충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독이 오르면 도윤은 때를 봐 뱀이며 두꺼비, 도마뱀, 지네 따위를 한 항아리에 집어넣었다. 온갖 독충이 벽을 긁거나 꼬리로 바닥을 치는 듯한 소리, 꿱, 끅 하는 외마디 비명이 밤낮없이 들렸다. 마침내 보름이 지나 항아리를 열 때면 도윤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숭고한 표정으로 살아남은 고를 바라보았다.
고를 조제하는 자를 고주(蠱主)라 부른다. 주인이라 불리지만, 실상 독충 식성과 변덕에 예속된 사람이므로 한번 고를 들이고 나면 그것 비위를 맞추며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고주는 남을 해치는 자이기에 앞서, 고에게 의존하며 모시는 자라고 해야 옳다.
한날은 도윤이 이익에게 청했다.
여기에도 환기구를 달아 줘.
왜?
뜨겁고 찐득한 탕전실의 습도 때문에 고가 점점 예민해지고 있으며, 본래 감실에는 양기 아닌 음기가 흘러야 한다는 도윤의 맹랑한 소리에 이익은 미간을 좁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무슨 환경까지 맞춰주려고 해. 벌레한테.
한 번도 토 단 적 도윤이 그 문제에는 재차 군말을 붙였다.
해달라면 해줘.
…뭐?
고에 문제 생기면 너도 손해잖아. 아직 빚도 남아 있으면서.
도윤은 이익의 가정사뿐 아니라 성장 배경, 인간관계, 재정문제, 비밀과 콤플렉스까지 아는 유일한 ‘타인’이었다. 이 말인즉 그의 목을 쥐고 흔들 ‘주인’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건, 늘 그렇듯 이익이 도윤에게 넋두리를 시작했을 때였다. 그날 상대한 비협조적인 환자를 떠올리며 이익은 욕을 뇌까렸다.
빡대가리도 아니고 같은 말을 몇 번씩 하게 만들어. 설명해도 못 알아들어. 답답해 죽겠다고. 내 말이 그렇게 이해 안 되나?
익, 나는 네 말을 이해할 수 있어. 환자에게도 제대로 설명해 주었을 거야. 넌 전문가니까.
그렇지? 아니 근데…
그런데 말이지.
도윤이 이익의 말을 잘랐다.
너는 왜 무지한 사람들한테 그렇게 성내는 거야?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뭐?
결핍 때문인가. 사람은 자기 결핍을 상대에게 투영하거든. 네가 잘 쓰는 빡대가리라는 표현도 그래. 학력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자기보다 지적으로 낮은 상대를 깎아내릴 때 안도감을 얻거든. 우월감도 느끼고 말이야. 의대가 아니라 한의대에 들어간 게 네 콤플렉스라면…
무의식중 이익은 도윤의 머리를 세게 갈겼다. 꼬리가 몸통을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도윤이 관절의 강성을 낮추고, 보호 정지 상태에 들어갈 때까지 이익은 사정없이 그를 난타했다.
네가, 네가 뭔데… 감히, 감히.
도윤의 허리며 등, 복부를 연달아 걷어차다 이익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비활성화된 도윤이 바닥에 몸을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더미처럼. 이익은 발끝으로 도윤을 살짝 건드렸다. 도윤의 등 쪽에 있는 충전 단자에 금이 가 있었다. 이익은 뒷걸음질 치다 걸쇠로 탕전실 문을 굳게 잠갔다.
∞
그로부터 사나흘 동안 이익은 초조함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탕전실 앞을 지날 때면 뒤숭숭함을 넘어 오금이 굳었다.
초조는 엄태평 때문에 극심해졌다. 예약일마다 정각에 맞추어 꼬박꼬박 오던 엄태평이 일주일째 발길을 끊고 있었다. 예약 환자 관리는 AI 비서에게 맡기고 있었으나,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이익은 엄태평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받은 이는 엄태평의 며느리였다. 엄태평이 한 달 치 약을 지어놓고 오지 않고 있다 전하니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2주 전에 돌아가셨어요.
네? 왜….
나이가 지긋하셨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호상이었네요. 주치의면 알겠지만, 저희 아버님 아흔 될 때까지 지병 하나 없으셨잖아요.
약값은 QR로 내겠다며 코드를 보내라는 그녀의 말에 이익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엄태평의 비참한 말로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고에 중독된 자는 화장해도 심장과 간이 타지 않으며 그자의 장기는 벌집처럼 구멍이 가득 뚫려 있을 것이다.
눈과 귀, 코, 입… 온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버둥대는 노인. 장기와 뇌수를 파먹으며 독하게 살아남았을 고. 심장이 거세게 뛰었고, 입에서 피비린내가 감도는 것 같았다.
액을 받았구나.
조우인, 엄태평 다음은 이익의 차례였다. 불길하고 음습한 기운이 온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등이며 배가 미친 듯이 간지러웠다. 가려운 곳을 벅벅 긁으며 이익은 사방에 팥을 뿌리고, 그도 모자라 소금을 한 움큼 제 입에 처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헛세이, 헛세이, 헛세이.
주문까지 외웠으나 이익의 불안은 스러지지 않았다. 눈 돌리고 싶어도 탕전실 쪽으로 자꾸 시선이 갔다.
저 감실은 거대한 고 항아리였다. 액이 가득 차 있는 저곳에서 교활하고 영리한 거머리가 살아 꿈틀대고 있었다.
이익은 곧장 진료실 약장에서 독초를 집히는 대로 꺼냈다. 천남성·독말풀·협죽도·종려초… 사약의 재료로 썼다는 맹독성 풀을 한데 모아 그는 탕전실로 향했다.
탕전실은 걸쇠로 굳게 닫혀 있었다. 이익은 떨리는 손으로 걸쇠를 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여전히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방전되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이익은 그것을 노려보다 독초를 담은 천 주머니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를 풍기며 주머니가 활활 타올랐다. 이익은 불타오르는 주머니를 그것 옆에 던졌다.
이 망측한 액을 떼어내기 위해선 고를 항아리째 모조리 불살라야 한다. 불이 다 사르고 항아리가 깨질 때까지 한 치 망설임도 없어야 남은 독기가 집 문턱을 넘지 않는다.
탕전실이 희뿌연 연기로 완전히 덮이자 이익은 문을 닫고 걸쇠를 걸었다. 그가 뒤돌아설 때, 탕전실에서 손톱으로 문을 박박박,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는 듯한 날 선 비명도 들리는 것 같았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아주 잠시, 그것과의 짧지만 굵은 라포르가 불현듯 떠오르기도 했다. 이익은 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연기가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익은 걸쇠가 단단히 걸렸는지 확인하며 나직이 읊조렸다.
그래도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됐지.
∞
탕전실이 통째로 타버리길 바랐지만, 스프링클러가 작동되며 이익의 바람은 허무하게 꺾였다. 진화할 정도의 큰 화재도 아니었던 터라 구급대도 오지 않았고, 탕전실은 굳게 닫힌 채 그대로 방치되었다.
몇 달이 지났다. 이익은 맥진 후 약침을 놓거나, 부항 뜨는 간단한 시술만 이어가며 한의원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익을 찾는 환자 역시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기계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들, 신문물에 익숙지 않은 노인, 그리고 고를 찾는 사람들.
한날은 여든 넘은 단골 노부인이 오랜만에 한의원을 찾았다. 엄태평 추천으로 한창 드나들다 어느 순간 왕래를 끊었던 그녀는 몇 달 새 피죽조차 못 먹은 사람처럼 안색이 상해 있었다. 돈이나 뽑아먹을 요량으로 이익이 미용 침을 권하자 노부인이 손을 내저었다.
이 나이에 그거 맞아서 뭣하게. 저기, 나 그 약이나 좀 지어줘.
무슨 약이요?
선생님이 잘 지어줬던 거 있잖아. 그 거석한 맛 나는 약.
노부인은 지난 몇 달간 양기와 활력이 돌아 지인들에게 열 살은 젊어진 것 같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늘그막에 맞기 시작한 줄기세포 효과라 여겼으나 알고 보니 탕약 덕인 것 같다며 눈을 밝혔다.
줄기세포는 비싸기나 하지 효과도 없고. 그러니까 나 그것 좀 지어줘. 빨리.
이익은 우물쭈물하다 얼버무리듯 말했다.
지금은… 안 돼요.
안 돼? 왜?
약초상이… 몸이 안 좋아서 지금은 수급이 어려워요.
그래? 그럼 그거 들여오면 나부터 좀 해줘요. 기가 너무 허해서 그래. 이러다 곧 송장 되겠어.
수차례 재촉하며 확약을 받아내려는 노부인에게 곧 구하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까지 하며 이익은 간신히 그녀를 구슬렸다. 진료실을 나서기 전 그녀가 이익에게 물었다.
근데 선생님, 그거 뭐로 지은 약이야?
네? 그냥… 약초.
확실해?
…왜요?
있잖아. 나 어릴 적에 우리 고향에서 뱀을 그렇게 잡아먹었거든. 그래서 내가 그 맛을 잘 아는데, 선생님이 지어 준 약에서 그 맛이 나는 거야. 그거 뱀은 아니지?
이익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웃자고 하는 소리라며 눙치는 노부인을 향해 이익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몇 달 만에 이익은 탕전실 앞에 섰다. 걸쇠에 그새 붉은 녹이 슬어 약간의 사투 끝에 겨우 풀 수 있었다.
한 번만, 딱 이번 한 번만.
중얼대며 이익은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유황 냄새와도 같은 역하고 독한 악취가 흠씬 풍겨왔다.
이게 도대체….
그것 역시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두리번대도 흔적조차 없었다. 이익은 숨을 깊이 들이켜며 탕전실을 누볐다. 약탕기가 놓인 레인지 쪽으로 다가갈수록 악취는 한층 심해졌다. 약탕기 뚜껑을 차례로 열어보다 이익은 아연실색하여 나동그라졌다. 살이 다 문드러진 뱀이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탕기 가장자리에 뱀의 얇은 허물이 들러붙어 있었고, 구더기와 파리가 꼬여 대가리는 반쯤 사라진 상태였다. 똬리를 튼 것처럼 보이나 가까이서 보니 뱀의 꼬리가 입안으로 잔뜩 말려 들어가 있었다. 죽기 전, 그 흉물은 제 몸을 반절이나 게걸스레 파먹은 듯했다. 입에 문 것을 놓지 못하고 꾸역꾸역 삼키려던 흔적이 그 흉물의 치켜뜬 눈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참상에 욕지기가 솟았다. 상품 아닌 원물 그대로의 고는 그저 흉하고 혐오스러울 뿐이었다. 묽은 침을 질질 흘리며 헛구역질하는 이익의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익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불에 타 얼굴 반절이 녹아내린 그것이 이익 앞에 서 있었다.
그것은 이익을 지나쳐 고가 담긴 탕기에 물을 부었다.
…뭐 하는 거야?
이익의 물음에도 그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스불을 올렸다. 물 끓는 소리와 함께 역겨운 악취가 퍼져나갔다. 뭐 하는 거냐, 재차 외치자 그것이 이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웅얼거렸다.
…필요해진 거야.
뭐?
다시 필요해진 거야?
그것이 물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물음에 이익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그것은 김이 솟아오르는 약탕기를 들고 이익에게 다가왔다. 한 발, 한 발 가까워지는 그것을 피하려 이익은 뒷걸음질 쳤다. 서둘러 문을 열려는 이익의 어깨를 그것이 지그시 잡았다. 손이 따뜻했고, 둔중한 맥까지 느껴졌다. 산자의 것도, 망자의 것도 아닌 맥이. 긴장이 풀릴 만큼 나직하고 부드러운 투로 그것은 이익에게 말했다.
필요할 때는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잖아. 나는 네 편이니까.
그것이 이익과 눈을 맞추었다. 그것의 일그러진 한쪽 눈에 이익이 비쳤다. 그것이 되물었다.
그래, 내가 다시 필요해진 거지?
물에 불어 표피는 희어지고, 아까보다 곱절은 퉁퉁해진 뱀이 탕기 안에 담겨 있었다. 몸통이 꼬리와 이어진, 기이한 형태로 비틀린 뱀을 보며 이익은 잡고 있던 문고리를 돌리는 대신, 그것, 아닌 도윤을 향해 몸을 틀었다.
고주는 남을 해치는 자이기에 앞서, 고에게 의존하며 모시는 자라 해야 옳다.
고서의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평생 너에게서 벗어날 수 없겠구나, 자조하고 자위하며 이익은 도윤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