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이타미 준
나의 아버지 이타미 준
|
이타미 준(1935-2011년) 도쿄에서 재일한국인 2세로 태어나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한국 이름은 유동룡. 1964년 무사시공업대학 건축학과 를 졸업하고 4년 후 이타미준건축연구소를 설립했다. 지역의 고유한 풍토에 천착하며 돌, 바람, 흙 등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 독창적인 건축 세계를 구축했다. 대표작으로 일본의 ‘먹의 집’, ‘석채의 교회’, ‘M빌딩’, 한국의 ‘온양미술관’, ‘포도호텔’, ‘수풍석 미술관’, ‘방주교회’ 등이 있다. 2003년 아시아인 최초로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2009년 일본의 권위 있는 건축상인 무라노 도고상을 재일한국 인 최초로 수상하였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1970-2011 이타미 준의 궤적』, 『손의 흔적』 등이 있다. |
![]() |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신 아버지는 한국말이 서투셨다. 그래서 건축 일로 한국에 오실 때마다, 어린 내가 곁에서 통역을 해드리곤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현장에 나가 아버지 말을 옮기고, 때로는 대신 약속을 잡기도 했다. 현장에서 정열적으로 싸우다가도 완성되어 가는 건축 앞에서는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시던 아버지 곁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건축가라는 꿈을 품게 되었다. 한없이 따뜻하면서도 누구보다 엄격하셨던 분. 도자기 앞에서는 아이처럼 순수하셨고, 현장에서는 단호하고 절제된 긴장감으로 자신에게조차 타협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1910년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신 조부모는, 재일교포로서 평생 험한 일을 감내하시며 여덟 남매를 키우셨다. 아버지는 그 맏이였고, 대학 시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장남으로서 동생들의 아버지 역할까지 도맡아야 했던 분이라, 자신에게 더없이 엄격하셨다. 평생 대지 스물세 평, 위아래층을 합해 스무 평 남짓한 작은 집에 사셨고, 그 집에는 소파를 놓을 자리조차 없었다. 가족 휴가 때를 제외하면 아버지가 소파에 늘어져 계신 모습을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언젠가 집이 너무 좁아 불편하니 이사를 가자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아버지는 짧게 답하셨다. “건축가는 미니멀한 라이프의 모델이어야 한다.” 그 말씀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홀로 산책을 나가시고, 돌아와 현미죽과 견과류로 아침을 드셨으며, 신문을 읽다 영감이 떠오르면 손에 잡히는 아무 종이에나 스케치하거나 글을 쓰셨다. 사무실까지는 늘 걸어 다니셨다. 삶 전체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던 그 단단한 자세가 오늘의 ‘이타미 준’을 만든 원동력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분이셨기에, 내게 조금이라도 게으른 기색이 비칠 때면 한 말씀씩 하셨고, 나는 그저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건축은 자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현장에서 쓰러져도 괜찮다”고 하시며, 작은 주택 하나에도 당신의 모든 것을 쏟으셨다. 설계가 의도대로 시공되지 않으면 주저 없이 현장에 재시공을 요구하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셨다. 2001년부터 아버지가 타계하실 때까지 십 년간, 나는 아버지의 실무 파트너로 한국 프로젝트 대부분을 함께했다. 그중에서도 방주교회는 가장 깊은 고생의 자리였다. 아버지는 밤새 고민하시다가 아침이면 또 다른 설계를 들고 나오셨고, 시공 중에도 끊임없이 수정을 반복하셨다. 딸이기 전에 실무자로서, 나는 아버지와 현장과 클라이언트 사이를 오가며 그 뜻을 관철시켰다. 고집도 많으셨고, 들어드릴 수 없는 요구도 있었다. 그래도 완공된 방주교회를 마주했을 때, 그 아름다움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이런 분의 딸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그 순간 다시금 깨달았다.
아버지는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다. “쉰이 넘으니. 건축이 비로소 재미있더라. 예순이 지나니 건축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일흔이 되어 이제야 내 오리지낼리티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한 건축가가 일생을 통해 어떻게 자기 세계를 빚어갔는지를 말해주는 문장이었다. 자신을 “마지막 남은 손의 건축가”라 여기시며 끝까지 아날로그 드로잉을 고수하셨고, 컴퓨터 설계를 배제한 채 손으로 그은 선 하나하나에 혼을 담으셨다. 그가 남기신 말 중 내가 가장 아끼는 문장은 이것이다. “현대 건축에 결여되어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온기와 야성미이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 도면을 한참 들여다보시더니 “내 딸 맞다”고 하셨다. “넌 어쩔 수 없이 내 딸이야.” 내 건축 안에서 당신 언어를 느끼신 순간 조용히 웃으시던 그 말은, 지금도 내 마음을 붙잡아주는 가장 큰 위로다.
![]() 방주교회 ⓒ김용관 |
그토록 엄격한 분이 내게는 둘도 없는 술친구이기도 했다. 기쁠 때도, 화가 날 때도, 아버지와 나는 홍어회에 막걸리를 놓거나 고미술 가게에서 사 오신 오래된 잔에 술을 나누며 밤을 새웠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지금 몇 시냐?” 하고 물으시면 내가 시간을 말씀드리고, 그러면 “우리 10분만 더 이야기할까?” 하시며 밤이 이어지곤 했다. 지인을 만날 때마다 당신이 차고 계시던 시계를 풀어 주시던 버릇 탓에, 이타미 준 시계를 가졌는지 여부로 아버지 지인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엄하셨지만 정이 넘치고, 가슴이 따뜻한 분이었다.
2011년, 뇌출혈로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나셨을 때 그 상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실감이 들지 않는다. 매일 출근하는 방배동 사무소가 아버지와 함께 지은 공간이어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앞이 막막할 때 눈을 감고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묻다 보면, 그 질문 안에는 늘 답이 있었다. 내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한 지도 어느새 스물다섯 해가 되었다. 그제야 이타미 준이 바라보셨던 시공간이 어떤 세계였는지 조금씩 이해해 가기 시작했다. 지금 눈으로 그분과 함께 도면을 펼쳤다면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 그 아쉬움은 평생 내 마음에 남을 것이다.
|
|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내가 죽거든 책상 서랍을 열어보거라.” 장례를 치르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정말로 유언장이 나왔다. “이타미 준의 이름을 딴 문화재단과 기념관, 건축상을 만들어라. 이 모든 책임은 내 딸 유이화에게 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이 있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희망 사항이다.” 가족들과 유언을 읽어 내려가던 그 자리에서, 우리는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터졌다. 참으로 그분다운 유언이었다. 그 말씀을 품고, 나는 제주에 유동룡미술관을 세웠다. 기념관이 아닌 미술관인 것은, 아버지의 철학을 동시대 작가들과 나누고 젊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건네는 일이야말로 가장 ‘아버지다운’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가끔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넌 금수저잖아.” 예전에는 그 한마디가, 건축가로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나를 깎아내리는 조롱처럼 들려 모욕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내가 먼저 말한다. 나는 금수저가 맞다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이 그만큼 크고 귀한 까닭이다. 그리고 그 유산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에게 전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도 남기셨다. “시대성을 잃지 말고, 역사 위에 서서 너만의 감성을 키워라.” 그 말은 지금도 내 건축의 중심에 서서,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되어 준다. 손으로 그어낸 한 줄 선에서 시작되어 한 사람 인생 전체를 관통한 예술가 정신, 타협하지 않는 자세, 그리고 끝까지 사랑을 잃지 않았던 한 인간의 따뜻함…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남겨주신 가장 큰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