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뷔작
불화(不和)하는 삶은 문자의 모든 아침

시 「사춘기 아침」

  • 나의 데뷔작
  • 2026년 여름호 (통권 100호)
불화(不和)하는 삶은 문자의 모든 아침

시 「사춘기 아침」

처음엔 이렇게 썼을 것이다. ‘데뷔 전을 회상해 보는 일은 언제나 서먹하다.’

스물여덟 무렵에야 살아있는 시인들이 활동하는 ‘문단’이라는 개념을 이해했고, 서른 살이 다 되어서야 ‘시인 등단’을 꿈꾸었으니 말이다. 말을 바꾸면, 이립(而立)의 나는 졸업장도, 직장도, 변변한 공부도 한 것 없는 수많은 ‘문청’ 중 하나였다는 뜻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학과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전공과목은 포기하다시피 해서 주로 극작과에 개설된 ‘타 전공 개방’ 창작 과목을 들었다. 앙상블을 중요시하는 연극 작업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얼굴을 아는 후배가 거의 없었고, 어쩌다 인사받은 전공 교수님들은 “넌 무슨 과니?” 하며 되묻곤 했다. 매일 학교에 가고 도서관에 앉아 있었을 뿐,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말 그대로 부유하며 지냈다. 좋겠다. 공짜로 비행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틈입하면 도서관 구석에 앉아 동사무소 공익요원 시절 썼던 원고를 정리하곤 했다. 변두리 농지가 개발되면서 몰려든 투기꾼과 보상을 받게 된 농부들의 자존심 싸움을 종종 보았는데, 버리는 등본 용지 뒷면에 긁적거린 것이었다. 소설 작법을 배우기는커녕 많이 읽지도 않았던 터라, 그저 말이 되도록 문장을 잇는 수준의 이상한 퇴고를 반복했다.

우연히 땅과 관련된 원고를 모집한다는 한국토지공사 주최 대학생 공모전 광고를 보고 별생각 없이 원고를 보냈다. 그런데 원고를 보내고 나자,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상 소감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표절 시비에 휘말려 수상을 박탈당하는 망상 같은 걸 해보기도 했다. 운이 좋았던지, 3학년 1학기 여름 방학 무렵 장려상으로 입선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학교 이름이 적힌 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신경을 쓸 사람도 없었다. 단지 자신을 소설가 지망생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하지만 글쓰기에 매달릴수록 고립되는 느낌이 들었다. 타고난 감각이나 숨겨진 실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비전공자 대상 시 쓰기 수업을 듣던 날에도 아는 시인이라곤 오래전 죽은 사람뿐이었다. 내 모든 글쓰기는 진지했지만, 재미가 없었고 번역 투의 부정확한 문장도 문제였다. 비행하면서 본 게 그렇지. 소설 관련 수업에선 결말을 엮어내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정작 본인이 타 전공자였음에도, 다른 과 소속 수강생들이 받는 예술적 감각에 관한 찬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너무나 쉽게 남의 작품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는 수강생들 태도가 못마땅했다. 문학적 가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열등감에 휩싸인 나는 취미나 교양처럼 가볍게 듣는 수업마저 전공수업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간고사 기간, 어느 글쓰기 수업의 시험 지문 중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 일부가 인용되어 나왔다.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의 시를 처음 읽는 순간 울컥함이 목구멍에서 솟구쳐 올랐다. 시험을 다 보았는지, 보다가 중간에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비행이 아니라 귀신이었나? 마치 기형도 시 한 편을 만나기 위해 긴 에움길을 돌아온 것 같았다. 그날부터 일상의 상수(常數) 자리에 시를 써넣기 시작했다. 겨울방학 내내 닥치는 대로 시집을 읽었다. 비문일지라도 떠오르는 건 모조리 적었다. 노란 은행잎이 낭자한 교문 앞 풍경을 보면서 입학 후 처음으로 숨이 멎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필자의 등단작이 수록된 시집    

서른이 되던 해, 그러니까 4학년이 되자마자 자퇴와 재입학을 반복하면서 서사창작과 3학년으로 전공을 옮길 수 있었다. 불시(不詩)라는 시 창작 동아리를 만들고서 제일 시 못 쓰는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기성 시인들을 쫓아다니면서 술을 마시고 우쭐한 적도 많았다. 좀 후지다. 그럴수록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우울은 깊어졌으나, 속으론 그것조차 시를 쓰기 위한 질료처럼 여기고 있었다. 불화(不和)하는 삶이 문자의 모든 아침처럼 보이던 시절이었다. 서사창작과에서의 졸업을 앞둔 몇 달간, 골방에 틀어박혀 시만 썼다. 지상을 향해 외쳐본 마지막 다짐이었다. 시인이 되지 못한다 해도, 노트에 습작을 긁적이며 살면 그만이다. 일상어 뒤편에서 미쳐 날뛰는 저것들이 보이는 한, 기성 예술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치 나는 시인을 연기하는 배우 같았다. 배우를 연기하는 시인이거나. 그리고 그 첫마디를 어떻게 내뱉을지 늘 궁금했다.

계간 《시인세계》에서 걸려 온 당선 전화를 처음 받은 건 어머니였다. 필명을 적었던 탓에 어머니의 첫마디는 ‘그런 사람 없는데요’였다. ‘당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내방으로 달려오셨지만, 엉겁결에 나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이쪽에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시인으로서 내 첫 마디는 ‘저 기혁이라고 하는데요’였다. 구질구질해 보이는 이것이 등단 무렵 기혁의 캐릭터 분석이자, 연극적 전사(前事)다. 등단작 「사춘기 아침」의 첫 구절은 이렇다 “어떤 장르에는 대사가 없다.” 고백하건대 아무리 후진 연극이라도 고정된 대사는 없다. 오직 미래의 대사만이 러닝타임 내내 불시착하고 휘발한다.

이제 이렇게 쓰려고 한다. ‘만약 내가 시인을 연기하는 배우라면 그의 삶은 사춘기의 풍토로만 연기될 것이다.’ 올해 초 출간한 시집의 제목은 『소설책』이다. 여전히 비행 중인 제목 같다. 습작기의 나였다면 무척 연극적인 상황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 안녕. 내 이름은 뮤즈(Muse)야! 

기혁
시인, 1979년생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소피아 로렌의 시간』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 『소설책』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