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헬스 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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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년 가을호 (통권 1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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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치 월세를 밀린 어느 날, 나는 직장을 구했다. ‘하이노보랩’이라는 건강보조식품 업체였다. ‘하이노보랩’은 신원보증서의 보증인란에 적어둘 만한 지인이 없다고 주장하는 내 고집스러운 성격상의 취약점을 너그럽게 긍정하는 아량을 보여주었다. 적은 월급이지만 그것 때문에 달아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리고 사실 말이지, 나는 달아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건강식품을 간간이 챙겨 먹으며, 어쨌든 하루하루 잘 살아가자는 희망을 품고 있었으니까.

내가 맡은 일은 오프라인 전문점이나 온라인쇼핑몰로 들어갈 상품들의 재고를 확인한 뒤 각 지역과 매장별로 선호하는 건강보조식품들을 분류해 엑셀 파일에 저장하고, 현장에 파견된 홍보 도우미에게 홍보물 진열법이나 간단한 상품 교육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친절하고 꼼꼼해서 마케팅팀 팀장 눈에 금세 들었다. 한 달간 수습 기간을 마치고 나자, 1년 계약 직원이 되었다. 팀장은 직접 키토산 제품 90그램짜리 세 통을 축하 선물로 챙겨줬다. 나는 퇴근 전에 키토산과 면역력, 신체 밸런스 케어, 품질과 흡수성에 관한 내용을 찾아 두 장의 편지지에 각각 그 내용을 출력해 뒀다. 그리고 키토산 두 통에다 이 편지지를 각각 한 장씩 부착한 뒤 뚜껑에는 보라색 리본을 두르고서 쇼핑백에 담았다. 리본을 달지 않은 내 몫의 한 통은 사무실 내 책상 서랍 안에 넣어뒀다.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종섭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종섭이는 지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키토산에 관한 얘기를 했고, 종섭이는 ‘구제할 수 없는 고등학생들’에 관해 얘기했다. 종섭이는 입시학원 특별 관리반에서 2년 3개월째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성적이 부진한 고등학생 몇 명이 종섭이 앞에서 그다지 구제받고 싶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문제집을 찢어발겼다. 종섭이는 그중 한 명을 붙잡았는데, 그 학생은 갑자기 어린아이로 퇴행해 자기 엄마를 학원으로 즉각 데려오더니 볼멘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종섭이는 수학이 아름다운 학문이라는 자기 믿음을 부끄러워하고 회의하면서 모든 게 귀찮아졌다고 했다. 종섭이는 그날 밤 내가 전해주고 싶은 선물이 있다고 하는데도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대신에 학원 건물 5층 계단에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빌리 아일리시의 유행 지난 팝송을 열아홉 번 정도 들었고, 다음 날 아침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다음 날 정오쯤 되자 종섭이는 열이 오르고 위경련이 일어 학원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선지 기분이 나아져서 나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받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종섭이가 빌리 아일리시를 듣던 그 저녁 시간부터 나에게 새로운 일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보라색 리본을 키토산 제품에 두르던 그 저녁에 나는 어쩐지 친절한 소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 감정의 연장선에서 키토산 제품 하나를 들고 주인집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주인집 딸이 땀에 젖은 회색 면 티셔츠 바람으로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오후 네 시경에 우선 한 달 치 월세를 이체했다고, 나머지는 곧 보내드리겠다고 말했다. 애초에 주인집 딸 통장으로 월세를 넣어주기로 약정했기 때문에 내 인사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나무랄 데 없이 공손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모델처럼 예쁜 주인집 딸은 시큰둥한 얼굴로 “그래서?”라고 대꾸했다. 나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바보같이 굴게 됐다. 내게 어울리지도 않는 풍부한 손동작과 한 톤 높인 목소리, 그리고 어색한 웃음으로 썰렁한 농담을 던졌다. 상대는 여덟 시 뉴스의 아나운서처럼 굳은 표정이 됐다. 나는 어서 내 방으로 돌아가 버리려고 했다.

“어, 잠깐.”

주인집 딸은 그렇게 말하고는 실없이 웃었다.

“좀 들어오겠어?”

주인집 딸은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실내로 들어섰다. 주인집 딸은 방으로 들어갔다가 흰색 티셔츠로 갈아입고 나와서는 정수기에서 물을 한 잔 뽑아 마셨다.

“응, 그래. 나오민이란 이름으로 돈이 들어와 있어.”

“그렇죠.”

“내 이름이 김혜자인 건 그 뭐야, 예전 그 유명한 조미료 광고를 했던 국민배우랑 상관이 좀 있거든. 울 엄마가 열성팬이라서 내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네. 그쪽이 불편하지만 않다면 혜자 언니라고 불러.”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주인집 딸, 그러니까 혜자 언니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다짜고짜 고함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자 언니가 거기에 대고 “싫어”, “뭐가?”, “그래서?”, “그것 참으로 안 됐네” 등과 같은 말만 해댔다.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하고 끊었다. “넌 완전 돈 놈이야!”

나는 탁자에 주저앉은 혜자 언니 쪽으로 키토산 제품을 밀어놓았다. 혜자 언니는 갑자기 고개를 탁자에 처박고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날이 점점 어두워졌고, 실내에 불을 켤 수가 도저히 없는 상태로 내 배와 혜자 언니의 배 속에서 울려 나오는 꼬르륵 소리를 들어야 했다. ‘혜자 언니’란 말이 비로소 입에서 떨어져 나왔다.

“혜자 언니, 뭔지 몰라도 기운을 내야죠.”

그러자 혜자 언니가 고개를 들었다.

“아까 나한테 전화한 개자식 때문에 내 강아지가 놀라 뛰다 차에 깔려 죽었어. 예삐는 그렇게 죽어선 안 되는 거였는데. 여기로 도망쳐 오고 나서 한동안 잠잠하길래 안심했는데, 그게 끝이 아녔어. 이젠 다 글러 버렸어.”

 

*계간 <대산문화> 2026 가을호(통권 101호)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기준영
소설가 / 소설집 『연애소설』 『이상한 정열』 『사치와 고요』 『내일을 위한 힌트』,
장편소설 『우리가 통과한 밤』 『와일드 펀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