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역전의 명수, 종희가 있는 우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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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년 가을호 (통권 101호)
역전의 명수, 종희가 있는 우리의 사랑

역전의 명수

 

우리는 늘 역전을 합니다.

말하자면 뒤집기

바람을 거슬러 걷기

아까 했던 생각을

다르게 하기

 

해피엔딩일까요?

사슴이 사자를 사냥하고 토끼가 늑대를 물어뜯고

파도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그리운 세계라면 좋겠지만

 

친구여

네가 먼저 나를 떠났다.

일방통행로를 거꾸로 달리는 자동차들.

자동차를 앞지르는 오토바이들.

과거로 돌아가서 널 피해갔다면 좋았을 텐데.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우리 어디서 만난 것 같지 않습니까?

내 인생의 적도에 닿았는데

왜 이렇게 추운가?

 

오늘도 빙하 위를 걷는 낙타가 됩니다.

열대의 사막을 달리는 북극곰이 됩니다.

결승선은 어디?

역전을 했는데

누가 누구를?

9회말인가?

우리는 이겼는가?

 

오늘은 햇볕과 바람이 좋아서

나는 항복했어요.

거의

완전히

정지했어요.

그러니

 

역전의 명수여 오라.

네 모든 것을 버리고 오라.

아무도 이길 수 없는

최후의 승부를 위해

 

 

 

 

종희가 있는 우리의 사랑

 

당신,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질렀어요.

 

네? 뭐라고요?

 

아까 버스에서 졸다가 말예요. 당신 삶이 다 꿈인 것처럼

 

내 삶이 다 꿈인 것처럼. 그랬나요 제가.

저는 창문이 없는 찻집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

 

창문이 없는 찻집에?

 

맞아요, 찻집. 이런 찻집.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추고 찻집을 둘러보았다. 손님이 없었고 연통 난로가 놓여 있었고 그건 장식용 같았지만

낡고 멀고 조용한 분위기여서

그게 좋아서)

 

무얼 했어요? 찻집에 앉아서.

 

이별을 했어요. 당신과 이별을.

 

이별을. 버스의 꿈속의 낡고 멀고 조용한 찻집에서 이별을.

 

네. 버스의 꿈속의 낡고 멀고 조용한 찻집에서.

 

어땠어요, 기분이?

 

멀. 쓸쓸했지. 죽어가는 사람의 마음처럼.

악몽이었다.

 

……악몽이었구나.

 

(한 사람은 잠시 말이 없다가 레몬차를 한 모금 마셨고 다른 한 사람은 국화차를 한 모금 마셨고 이윽고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물었다.)

 

이별 후에는 무얼 했어요?

 

다른 사랑을 했어요. 다른 사랑과 동물원에를 간 것 같아. 식물원에를 간 것 같아. 국화차를 마셨던가. 레몬차였던가.

 

(한 사람은 창밖의 햇살을 바라보았고 다른 한 사람 역시 창밖의 햇살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햇살이 화사했는데 마치 그림처럼)

 

버스의 꿈속의 멀고 조용한 꿈. 차를 마시는 꿈. 악몽이 아니네. 악몽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침묵이 깃들고 한 사람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고 다른 한 사람은 한 사람을 바라보며 또 오래 말이 없다가

국화차를 한 모금 마시고)

 

오늘은 아주 멀리 왔어요. 동물도 식물도 없는 곳까지.

 

맞아요. 멀리. 죽어가는 것들이 없는 곳까지.

 

그런데 종희는 안 오네.

 

그러게. 안 오네 종희는. 전화를 좀 해봐요.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종희에게 전화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전화하는 한 사람을 바라보았고 종희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고

찻집 바깥 먼 곳에서 기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종희는 없나봐요. 종희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어째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는데 오래 마주보았는데 먼 데서 다시 기린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그렇지. 종희는 없나봐요. 그건 사고가 아니었으니까. 많은 이들과 함께 사라졌으니까. 사라졌어요. 사라졌다.

 

그런데 어째서 기린의 울음소리가 들려요.

 

그렇네요. 기린의 울음소리가.

 

기린에게 울음소리가 있어요? 기린이 울음을 울어요?

 

울겠죠. 울 거야. 기린에게는 기린만의 세계가 있을 테니까.

 

그렇겠죠. 기린에게는 기린만의 세계가. 찻집이니까 찻집만의 세계가.

그런데 음악 소리는 들리지를 않네.

 

(음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다. 들리지 않을 것이다. 오래된 연통 난로는 영영 놓여 있고 햇빛은 그림처럼 내리고

한 사람은 음악을 듣기 위해, 아니 무엇이든 듣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다시

눈을 떴다.)

 

음악은 들리지 않아도 좋아요. 기린의 울음소리가 들려도 좋아요. 하지만 종희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당신,

 

네.

 

지금 누구와 대화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다른 한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히 기울였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뒤늦게 깨닫고는

입을 벌렸다.)

 

아…… 그렇구나. 그렇네. 하지만 처음부터

알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도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으니까. 비명 같은 것은 좋지 않으니까. 더 슬퍼지니까.

 

(다른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전화가 걸려왔고

종희가 전화를 걸어왔고

먼 곳에서 기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종희가 전화를 했어요. 종희가. 드디어.

 

받아봐요. 종희가 전화를 했으니까.

 

(한 사람이 막 전화를 받는 순간 먼 데서 다시 기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라고 전화기 저편에서 누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외치고,

다음 정류장은 한강진, 한강진입니다,

라고 누가 기계음으로 말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장욱
시인, 소설가, 1968년생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음악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