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비 오는 날의 잠, 우리는 만나고 만나고 다시 만난다

  • 시
  • 2026년 가을호 (통권 101호)
비 오는 날의 잠, 우리는 만나고 만나고 다시 만난다

비 오는 날의 잠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야, 들어 봐.”) 눈을 뜨니 밖에 비가 오고 있었어. 나는 우산이 없어서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고. 내 마지막 우산을 그저께 맥주 역사 수업 때 강의실에 두고 왔거든. 저녁에 약속이 있었는데 일단 어쩔 수가 없어서 다시 잤어. 만나기로 한 게 그 친구였어. 내가 제헌절이 쉬는 날이니까 그때 보자고 했었는데, 제헌절이 공휴일 아니게 된 지가 언제인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엄청 구박을 했던 애. 잠깐 잠들었다가 눈을 떴고 계속 비가 오고 있었어. 저녁 약속 때 그 친구에게 내가 쓴 책 한 권을 주기로 했는데 집에 책이 없는 거야. 『구름과 목동과 한가로운 개들』이라는 제목의 단편집인데 소규모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 주변 서점에서 팔지도 않았고. 비가 오는 건 일단 잠옷을 입고 비를 맞으며 우산을 사 온 뒤에 씻는 걸로 해결할 수 있었고, 책은 약속 장소까지 가는 도중 있는 서점들 중 하나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조금 더 잤어. 다시 눈을 뜨니 출발할 시간이 지났는데 비는 그쳐 있더라. (“지금도 비가 오고 창문이 열려 있고 저녁이잖아. 빗소리 때문에

 

내가 네 말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지도를 찾아보다가 익숙한 이름의 서점이 있어서 전화를 걸었어. “혹시 『구름과 목동과 한가로운 개들』 있나요?” “아, 그 책은 지금 없는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직원분이 말을 걸었어. “혹시 지금 입고를 해드리고 이틀 정도 뒤에 가져가실 생각은 없으신…거죠?” “네, 제가 오늘 조금 급하게 필요해서요.” 사실 이때 핸드폰 충전을 안 해놓아서 핸드폰이 꺼지려고 했는데. “그런데 제가 이 서점 직원인데요,” 직원이 덧붙였어. “사실 제가 이 책을 제가 읽으려고 방금 입고하던 중이었거든요. 그냥 신기해서 말씀드려요…” “아이고, 아쉽네요. 타이밍이 조금만 더 잘 맞았으면 제가 살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책은 못 산 채로 약속 장소로 갔어. 사실은 친구도 내게 책 한 권을 주기로 했는데 깜빡하고 책을 가져오지 않았대. 그리고 대뜸 이런 말을 하는 거야. “그런데 제헌절 쉬는 날 맞더라. 원래 공휴일이었다가 아니었다가 다시 쉬는 날이 되었던 거래. 미안.” 그렇게 구박을 해놓고서 말이야! (“그럼 이제 뭐 할 거야?” “밥 먹고 책 읽고 잘 거야.” ―그리고 그는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잤다.)

 

 

 

우리는 만나고 만나고 다시 만난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전혀 비가 올 것 같지 않다.

좋아하는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그 친구에게는

이 년 전에 시를 처음 보냈는데,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일 년 전에도 시를 보냈고,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했다.

어제도 시를 보냈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편지의 내용: ‘매번 시를 읽어줘서 고마워. 그런데 이제는 뭔가를 배울 때도 된 거 아니야?’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에 대해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가는 날에 장이 열린 게 뭐 어쨌다는 건지, 그래서 그게 좋다는 건지 안 좋다는 건지, 안 좋으면 왜 안 좋다는 건지, 그리고 애초에 가기는 어딜 갔었다는 건지… 그러다 예전에 한 친구가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줬는데 그게 정답인 것 같다. 옛날에는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도 일이었는데(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기껏 친구를 만나러 갔더니 하필 장이 열리는 날이라 장에 간 그 친구를 못 보고 돌아와야만 했던 것이다.

오늘의 식단: 나는 매일 파프리카를 먹는데, 도시락통에 싸서

어디서든 먹는데

냠냠 먹는데 그러면 사각사각 소리가 나고 맛있다.

 

 

 

강보원
시인, 평론가, 1990년생
시집 『완벽한 개업 축하 시』, 비평집 『아주 조금 있는 문학』, 산문집 『에세이의 준비』 『지나가기 혹은 영원히 남아 있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