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잠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야, 들어 봐.”) 눈을 뜨니 밖에 비가 오고 있었어. 나는 우산이 없어서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고. 내 마지막 우산을 그저께 맥주 역사 수업 때 강의실에 두고 왔거든. 저녁에 약속이 있었는데 일단 어쩔 수가 없어서 다시 잤어. 만나기로 한 게 그 친구였어. 내가 제헌절이 쉬는 날이니까 그때 보자고 했었는데, 제헌절이 공휴일 아니게 된 지가 언제인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엄청 구박을 했던 애. 잠깐 잠들었다가 눈을 떴고 계속 비가 오고 있었어. 저녁 약속 때 그 친구에게 내가 쓴 책 한 권을 주기로 했는데 집에 책이 없는 거야. 『구름과 목동과 한가로운 개들』이라는 제목의 단편집인데 소규모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 주변 서점에서 팔지도 않았고. 비가 오는 건 일단 잠옷을 입고 비를 맞으며 우산을 사 온 뒤에 씻는 걸로 해결할 수 있었고, 책은 약속 장소까지 가는 도중 있는 서점들 중 하나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조금 더 잤어. 다시 눈을 뜨니 출발할 시간이 지났는데 비는 그쳐 있더라. (“지금도 비가 오고 창문이 열려 있고 저녁이잖아. 빗소리 때문에
내가 네 말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지도를 찾아보다가 익숙한 이름의 서점이 있어서 전화를 걸었어. “혹시 『구름과 목동과 한가로운 개들』 있나요?” “아, 그 책은 지금 없는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직원분이 말을 걸었어. “혹시 지금 입고를 해드리고 이틀 정도 뒤에 가져가실 생각은 없으신…거죠?” “네, 제가 오늘 조금 급하게 필요해서요.” 사실 이때 핸드폰 충전을 안 해놓아서 핸드폰이 꺼지려고 했는데. “그런데 제가 이 서점 직원인데요,” 직원이 덧붙였어. “사실 제가 이 책을 제가 읽으려고 방금 입고하던 중이었거든요. 그냥 신기해서 말씀드려요…” “아이고, 아쉽네요. 타이밍이 조금만 더 잘 맞았으면 제가 살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책은 못 산 채로 약속 장소로 갔어. 사실은 친구도 내게 책 한 권을 주기로 했는데 깜빡하고 책을 가져오지 않았대. 그리고 대뜸 이런 말을 하는 거야. “그런데 제헌절 쉬는 날 맞더라. 원래 공휴일이었다가 아니었다가 다시 쉬는 날이 되었던 거래. 미안.” 그렇게 구박을 해놓고서 말이야! (“그럼 이제 뭐 할 거야?” “밥 먹고 책 읽고 잘 거야.” ―그리고 그는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잤다.)
우리는 만나고 만나고 다시 만난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전혀 비가 올 것 같지 않다.
좋아하는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그 친구에게는
이 년 전에 시를 처음 보냈는데,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일 년 전에도 시를 보냈고,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했다.
어제도 시를 보냈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편지의 내용: ‘매번 시를 읽어줘서 고마워. 그런데 이제는 뭔가를 배울 때도 된 거 아니야?’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에 대해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가는 날에 장이 열린 게 뭐 어쨌다는 건지, 그래서 그게 좋다는 건지 안 좋다는 건지, 안 좋으면 왜 안 좋다는 건지, 그리고 애초에 가기는 어딜 갔었다는 건지… 그러다 예전에 한 친구가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줬는데 그게 정답인 것 같다. 옛날에는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도 일이었는데(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기껏 친구를 만나러 갔더니 하필 장이 열리는 날이라 장에 간 그 친구를 못 보고 돌아와야만 했던 것이다.
오늘의 식단: 나는 매일 파프리카를 먹는데, 도시락통에 싸서
어디서든 먹는데
냠냠 먹는데 그러면 사각사각 소리가 나고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