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풍경의 발굴
평양의 맛, 좋은 소고기가 만들어낸 '모란대 불고기'

  • 오래된 풍경의 발굴
  • 2026년 가을호 (통권 101호)
평양의 맛, 좋은 소고기가 만들어낸 '모란대 불고기'

1935년 5월 5일 자 동아일보 석간 5면에는 ‘모란대 명물 불고기 금지’라는 기사가 실렸다. “평양 모란대 송림 속을 놀이터 삼는 주객에게는 매우 섭섭한 일이나 모란대 송림의 명물인 ‘불고기’는 옥외에서 굽지 못하기로 되었다 한다. 모란대는 풍치가 좋은 곳이라 부민의 유람지요 또한 유원지인데 이 ‘불고기’ 굽는 연기로 말미암아 청청한 솔나무가 시들시들 마를 뿐 아니라 고기 굽는 냄새는 유람객 혹은 산보하는 이에게 불쾌를 주어 말썽이 많았던 바 대동서(大同署)에서는 부당국과 협의하여 풍치림(風致林)을 보호하는 의미에서 불고기 옥외 영업은 일절 금지하기로 되었다 한다.” 1930년대 평양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기였던 불고기가 굽는 연기로 위기에 처했다.

 

소문난 평양의 소고기, 평양우

평양 불고기는 품질이 좋아 전국에서 이름이 났던 ‘평양우’에서 나왔다. 평양의 소는 체구가 크고 매우 유순하여, 일 시키는 데 적합하고 석회암층에서 사육하였기 때문에 맛이 좋았다. 당시만 해도 소는 노동을 위한 소와 고기로 먹기 위한 소로 나누어졌는데, 평양우는 이 두 가지에 모두 적합했다.

평양우는 주로 평안남도 산간지대 들판에서 키워졌다. 평양 인근 읍면 소재지 우시장에서 유통된 소는 대부분 평양의 평양축산조합을 통해서 도축되어 고기로 유통되었다. 1930년대 초반부터 평안남도에서는 평양우의 소고기 품질 등급을 올리기 위해 비육우(肥肉牛) 육질 개량 정책을 펼쳤다. 평양우는 일본에 비해 가격이 싸서 살아 있는 생우(生牛)와 소고기가 진남포 항구를 거쳐서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 1922년 8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평화박람회에서 ‘평양우’는 이등상을 받았다.

 

중국 심양 인근 조선족 마을의 숯불화로와 불고기(사진 : 필자 제공)

 

1930년대 중반 이후 평양 사람들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양의 소고기를 먹었다. 평양 음식점 중에는 소고기로 불고기, ‘스끼야끼’, 갈비 그리고 설렁탕과 비슷한 소고깃국 ‘맹물’ 등의 음식을 판매하는 곳이 적지 않았다. 평양에서의 소고기 소비량이 너무 늘어나자, 평안남도가 1941년 가을부터 음식점에서 손님 한 사람에게 제공하는 소고기 양을 제한하는 규정을 시행했을 정도였다. 맛있는 평양우의 번성 한복판에는 모란대 불고기가 있었다.

 

불고기 냄새가 가득했던 평양 모란대

동아일보사의 평양 지국 기자인 오기영(1908~?)은 동아일보 1935년 5월 1일 자 석간 3면에서 팔로춘색(八路春色)이란 제목으로 당시 평양 풍경을 연재하는 칼럼을 썼다. 그중 5월 1일 자 기사의 소제목은 ‘옛 생각은 잊어야 할까, 낡아가는 패성(浿城)의 봄빛이여!’이다. 여기에서 ‘패성’은 평양을 가리킨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동강 변 40리 긴 숲의 풀빛을 뿌리까지 짓밟은 일청, 일러 두 싸움 통에 총상을 입은 채 서 있는 기림의 늙은 소나무 밑에는 ‘봄놀이’도 한창이다. 소고기를 굽는 것이다. 야유회의 맑은 운치도 있음직하거니와 모진 뿌리가 죽지 않아 살아남은 노송들이 그 진저리나는 고기 굽는 냄새에 푸른빛조차 잃은 것 같다.” 이 글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싸움터였던 평양에서 살아남은 늙은 소나무가 1935년 당시 사람들의 소고기 굽는 냄새에 몸살을 앓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쓰였다.

1935년 5월, 급기야 평양 대동경찰서는 옥외 불고기 금지 조처를 내렸다. ‘모란대 불고기 금지’의 기사는 동아일보뿐만 아니라, 매일신보에도 실렸다. 매일신보 1935년 5월 5일 자 4면 기사를 보면, 개인이 모란대 숲속에서 불고기를 구워 먹었던 것이 아니었다. 모란대에는 을송정·봉황각·기림정과 같은 상호를 내세운 불고기 음식점이 있었고, 이 음식점에서 불고기 굽는 냄새가 모란대 숲에서 진동했다. 그런데 평양 불고기를 둘러싼 역사에는 조리법이나 상권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이름 자체를 둘러싼 흥미로운 사연도 숨어 있다.

 

불고기가 아끼니꾸가 된 사연

평양불고기 야키니쿠, 매일신보 1941.07.30.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매일신보 1941년 7월 30일 자 석간 3면에는 불고기를 아예 일본어인 ‘야끼니꾸(燒肉)’*라고 썼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1930년대부터 논조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기사를 내보냈다. 일본어에도 능통했던 이 신문사의 조선인 기자들이 ‘불고기’를 한자로 ‘소육(燒肉)’이라고 쓰고, 일본어 읽기로 ‘야끼니꾸’라고 적기도 했다. 2018년 한국어 불고기가 일본어 ‘야키니쿠’에서 왔다는 주장을 펼친 음식 칼럼니스트가 있었다. 그는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소설가 이효석(1907~1942)은 평양에서 4년 정도 살면서 쓴 「유경식보(柳京食譜)」라는 글에서 평양 불고기를 ‘야끼니꾸’라고 부르면서 “요리법으로 가장 단순하고 따라서 맛은 담백합니다. (중략) 소담한 까닭에 몇 근이고 간에 양을 사양하지 않는답니다. 평양 사람들은 대개 골격이 굵고 체질이 강장하고 부한 편이 많은데 행여나 야끼니꾸의 덕이 아닌가 혼자 생각에 추측하고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매일신보 기자 출신 조풍연(1914~1991)은 『서울잡학사전』에서 평양식 불고기의 조리법을 두고 “석쇠에 물을 적신 백지를 씌우고 고기를 얹어 굽는다. 또 양념을 하지 않고 날고기를 익힌 다음에 익으면 양념간장을 찍어 먹는다”라고 회고했다. 소고기의 비육 부분 품질을 개량했던 1930년대 초반 ‘평양우’는 양념하지 않고 그대로 구워도 맛이 좋았던 모양이다.

 

한국전쟁 이후, 평양 불고기가 서울에 오다

19세기 이래 서울 사람들은 평양의 불고기처럼 양념한 소고기를 ‘너비아니’라고 불렀다. 1938년에 펴낸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에는 ‘너비아니’를 “소고기를 얇고 너븟하게 저미어 갖은 양념을 하여 구운 음식”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서 ‘너븟하게’라는 말은 “조금 넓은 듯하다”라는 뜻으로, 곧 소고기를 얇고 넓게 펼친 모양으로 썰어낸다는 말이다. 식민지 시기까지도 평양 ‘불고기’와 서울 ‘너비아니’는 이렇듯 이름을 달리한 별개 음식이었다.

이 구도를 뒤흔든 것이 한국전쟁이었다. 함경북도 학성 출신 시인 김기림(1908~?)은 1949년 7월의 잡지 《학풍》에서 “‘불고기’라는 말이 한번 평양에서 올라오자, 얼마나 삽시간에 널리 퍼지고 말았는지”라고 적어, 해방 이후 남한에서의 불고기 유행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한국의 요리책에 등장하는 불고기는 1958년에 출판된 방신영의 『고등요리실습』에서 처음이다. 방신영은 이 책에서 불고기라는 이름이 너비아니의 속된 말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1960년대 출판된 요리책에서는 불고기를 너비아니와 같은 음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다가 1972년 한정혜가 펴낸 『생활요리: 동양요리』에서는 너비아니란 이름을 쓰지 않고, 대신 불고기라고 적었다.

1960~80년대 오목한 구이판 위에 올린 소고기 불고기를 구우면 구이판의 가장자리로 국물이 모인다. 이 국물을 흰쌀밥 위에 올리고 비빈 다음, 잘 익은 배추김치와 함께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일본식 단맛의 양조간장에 설탕과 양파즙, 심지어 배즙까지 들어간 불고기 양념은 소고기의 아미노산 맛을 극대화해 준다. 이 과정에서 서울식 양념 소고기구이인 너비아니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평양식 불고기가 남한에서 시민권을 얻었다. 

 

* 식민지 시기 신문자료에는 한글로 ‘야끼니꾸’라고 적혀있지만, 한국어 외래어 표기법은 ‘야키니쿠’다. 

 

주영하
음식인류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 교수, 1962년생
저서 『차폰 잔폰 짬뽕: 동아시아 음식 문화의 역사와 현재』 『조선의 미식가들』 『백년식사: 대한제국 서양식 만찬부터 K-푸드까지』 『음식을 공부합니다』 『글로벌 푸드 한국사: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외래 음식의 역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