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저승꽃이 피었습니다

  • 기획특집
  • 2026년 가을호 (통권 101호)
저승꽃이 피었습니다

어렸을 적 아파트 단지 안에는 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아이들은 숨이 찰 때까지 뛰다가도 술래가 뒤를 돌아보면 일제히 멈추어 섰다. 아주 미세한 떨림과 동요도 없이 숨을 꾹 참았다. 손가락 끝이나 무릎이라도 흔들리면 죽은 것이 되었다. 죽은 아이는 술래 곁으로 가서 손가락을 걸었고, 그러면 죽음은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죽은 아이들은 줄줄이 연결되어 하나의 긴 사슬이 되었다. 살아 있는 아이들은 술래가 보지 않는 찰나를 노려 몸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고, 발끝을 앞으로 내밀며, 죽음과 삶 사이의 강을 아슬아슬하게 건넜다. 살아남은 아이는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망자들을 해방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놀이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지만, 술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죽은 척해야 했다. 생존은 언제나 정지된 순간을 요구했다.

 

꽃의 시간

꽃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동안 묵묵히 자란다. 아침마다 같은 화분을 들여다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지만, 며칠 뒤 문득 잎 하나가 펼쳐져 있고 줄기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꽃은 마치 놀이 속 아이들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만히 서 있다. 흘러가는 구름은 다가올 날씨를 어느 정도 예고하지만, 꽃의 시간은 좀처럼 예견되지 않는다. 우리는 꽃이 어느 방향으로 몸을 뻗을지, 언제 피고 언제 시들지 알지 못한 채, 다만 그 변화를 뒤늦게 발견할 뿐이다. 시간의 본질적인 불확정성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꽃은 오히려 그 불확실함 속에서 생을 이어간다. 삶은 예측 가능해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기에 계속 자라난다는 사실을 꽃은 조용히 보여준다.

나는 지난 몇 해 동안 여러 지역의 여성 노인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그들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업을 이어왔다. 그들에게 처음 눈길이 머문 것은 얼굴 주름이나 굽은 허리보다도, 그 몸을 감싸고 있던 화려한 꽃무늬 옷이었다. 시간이 가장 깊게 새겨진 몸 위에 가장 선명한 꽃들이 피어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무늬는 생애 마지막 계절을 지나가는 꽃잎처럼 보이기도 했고, 서서히 쇠퇴하는 몸 안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 생명력이 피어오르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래된 나무껍질을 닮은 피부 위에 인쇄된 꽃들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젊은 날의 기억과 노동의 시간, 반복된 계절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이 한 겹씩 포개진 시간의 무늬였다. 그 꽃은 피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이 지나온 시간을 다시 피워내고 있었다.

 

딸의 시간

작업을 하는 바쁜 딸은 어느새 일 년에 엄마를 만나는 횟수가 점차 줄어든다. 오랜만에 집에 갈 때면 엄마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알로에 마스크팩을 꺼내 딸 얼굴에 붙여 주곤 한다. 그녀가 어렸을 때 외할머니도 늘 이렇게 해주셨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알로에가 귀했는데도 마당 한쪽에 심어 두고 뜨거운 불에 데었을 때,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났을 때 늘 알로에 잎을 잘라 미끈한 점액을 발라 주셨다고 했다. 알로에는 대를 이어 딸들을 돌봐온 식물이었던 것일까? 그렇게 알로에는 세상 모든 어머니처럼 딸들의 생활 속에서 믿음과 돌봄의 물질이 되었고 만병통치약처럼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나는 차가운 점액이 흐르는 팩을 붙여 주는 엄마의 손과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피부밑으로 시간의 그림자가 검은 꽃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할머니들의 화려한 옷감 아래로 많이 보던 그 꽃들. 시간은 그렇게 다른 모양으로 그녀 얼굴에 꽃을 하나둘 피워 내고 있었다. 

 

버섯의 도착 

사람들은 그 검은 꽃을 꽃이라 부르지 않는다. ‘검버섯’이라 부른다.

의학에서는 색소가 침착된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이라고 설명하지만, 사람들에게 그것은 끝내 끈질기게 지워야 할, 숨겨야 할, 없애야 할 얼룩이다. 스마트폰 화면 속 얼굴들은 언제나 매끈하고 화사한 흰빛을 띠고 있다. 카메라와 AI 기술은 시간의 굴곡과 얼룩을 끝없이 삼켜버리지만, 인간의 껍질은 조금씩 검어지고, 거칠어지고, 얼룩져간다. 결코 딸의 시간은 흰색으로 흐르지 않는다. 조금씩 번지고, 스며들며 군데군데 튀튀한 반점을 남긴다. 그렇게 시간은 피부 위에 자신의 지도를 완성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검버섯도 버섯이라면?

버섯은 죽음을 먹고 자라는 생명이다. 낙엽과 썩은 나무, 오래된 시간을 양분 삼아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피부 위에 피어난 검버섯 역시 한 사람이 살아낸 계절과 노동, 햇빛과 눈물이 응축되어 나타난 시간의 버섯은 아닐까. 그것을 병변이나 얼룩이 아니라 버섯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깊은 흙냄새와 오래된 숲의 향기를 머금은 버섯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조금은 사랑할 수도 있을 텐데.

산속 버섯을 찍으러 다니는 탐사 동호회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본 적이 있다. 우산처럼 둥근 것도 있었고, 산호처럼 갈라진 것도 있었으며, 젤리처럼 투명한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붉고, 어떤 것은 푸르고, 어떤 것은 밤하늘에서 떨어진 운석 조각처럼 빛났다. 그것들은 마치 지구의 생명체라기보다 다른 행성에서 잠시 날아온 존재 같았다. 땅 아래에서 불쑥 솟아오른 그것들은 오래전부터 다른 세계의 언어를 품고 있는 존재처럼 보였다.

나는 피부에 불시착한 작은 버섯 모양의 검은 우주선을 상상해 보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다른 행성에서 온 우주선들이 하나둘 몸 위에 착륙하는 사건이 아닐까. 세월은 피부에 내려앉아 조용히 신호를 보낸다.

“이제 다른 시간을 볼 준비가 되었습니까.”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에서 빌리 필그림은 어느 날 외계 존재들에게 납치된 이후,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오가며 살아간다. 탄생도, 전쟁도, 사랑도, 죽음도 하나의 풍경처럼 동시에 존재한다. 트랄파마도어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다. 누군가 죽었다고 해도 죽은 자는 다른 순간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다. 시간은 흘러가는 강이 아니라 한꺼번에 펼쳐진 풍경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한데 포개지게 된다.

 

죽음을 껴안고

『세계 끝의 버섯』에서 송이버섯은 바위와 모래를 분해하는 강한 산을 분비하고 소나무와 곰팡이의 상호 성장을 돕는 영양분을 발산한다. 송이버섯과 소나무가 동맹을 맺으면서 함께 돌을 식량으로 바꾸는 까닭에 그들은 유기질 토양이 희박한 장소에서 자신들 영토를 확장한다. 이렇게 버섯은 죽음 가까이에서 기꺼이 그것을 껴안고 살아간다.

죽은 나무와 낙엽, 썩어가는 생명 곁에서 버섯은 가장 왕성하게 자라난다. 생과 사의 경계는 버섯에 단절이 아니라 이웃이 되는 방식이다. 살아 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 균사와 토양, 미생물은 서로를 돌보고 기대며 하나의 숲을 이루고, 끝이라고 여겼던 자리에서 또 다른 생명이 시작된다.

죽음을 품고 살아가는 버섯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피부의 검버섯도 다르게 보였다. 그것은 피부가 낡아 생긴 얼룩이 아니라, 몸속 깊은 시간의 균사가 마침내 표면으로 밀어 올린 작은 자실체일지 모른다. 마치 숲에서 어느 날 버섯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나듯,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시간이 얼굴 위에 조용히 도착한 것이다.

커트 보니것이 상상한 트랄파마도어의 시간처럼, 검버섯은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을 한 점으로 접는다. 젊은 날 얼굴과 지금 얼굴, 아직 오지 않은 얼굴이 하나의 피부 위에서 서로를 비춘다. 그것은 미래가 현재를 침범하면서 과거가 이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늙어가는 일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숲에 조금씩 버섯이 피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워야 할 얼룩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사실 오래도록 몸속에 얽혀 있던 균사의 흔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피부 위에 불시착한 작은 검버섯들은 다른 행성에서 온 우주선처럼 우리에게 조용히 신호를 보낸다.

“당신의 시간은 바야흐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적 놀이에서는 술래가 돌아보는 순간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죽은 아이들은 술래 곁에 줄지어 섰다. 살아 있는 아이들은 그 틈을 비집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살아 있는 아이와 죽은 아이는 서로 다른 편이 아니었다. 모두가 같은 선 위에서 조금씩 순서를 바꾸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시간을 몸 위에 피워 내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죽음 가까이에서 피는 꽃이라 저승꽃이라 불리는 검버섯과 엄마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면서, 엄마 몸에 흐르는 시간처럼 세상 모든 생명에도 저마다 다른 속도와 리듬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꽃이 피고 지는 시간, 땅속에서 균사가 뻗어가는 시간, 죽은 나무가 다시 다른 생명의 자리가 되는 시간은 우리가 세는 시간과는 다른 박자로 움직인다. 그 작은 변화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때때로 우리의 시간을 늦추고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

어쩌면 돌봄이란 다른 존재를 우리의 시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고유한 리듬을 알아차리고 그 곁에 머무르는 일인지도 모른다. 너무 빨리 자라고, 만들고, 버리는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수많은 생명이 저마다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이었을 것이다. 식물의 시간을 상상한다는 것은 인간의 시간만으로 세계를 헤아리지 않고, 아직 보이지 않는 움직임과 죽음 뒤에서 다시 시작되는 생을 믿어보는 일이다.

 

“저승꽃이 피었습니다”

외할머니에게서 엄마에게로, 엄마에게서 나에게로. 시간이 딸들의 몸을 건너왔듯, 언젠가 내 얼굴에도 검은 꽃 하나가 피어날 것이다. 오래된 숲에 버섯 하나가 도착하듯, 한참을 살아낸 시간이 마침내 얼굴에 꽃을 맺을 때를 기대하게 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미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생명의 시간을 듣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조금 천천히 멈추어 서서, 내 곁을 흐르고 있던 다른 생명들의 시간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란다. 

서인혜
시각예술작가, 1988년생
전시 <별비늘 호텔>, <순자붕어 이야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