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선선한 날씨 덕에 한결 편안한 밤을 보내고 있지만 뜨거운 열기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지난 여름밤을 잊을 수 없다. 열기에 들뜬 우리네 몸은 연신 구조 신호를 보냈고, 우리는 사방이 닫힌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인공의 냉기로 이 신호에 응답했다. 그러나 날로 뜨거워지는 태양의 열기는 기후 위기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내 피부 가까이 바짝 다가왔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인공의 냉기로 지구를 태우는 거대한 불길을 잡을 수는 없다. 불길을 가라앉히려면 물이 있어야 한다. 물과 불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으면 생명에 치명적이다. 기후 위기는 지구의 특정 지역에서는 극도의 가뭄을 낳고, 다른 지역에서는 대홍수를 일으키고 있다. 가뭄과 홍수, 이상 열기와 이상 추위는 물과 불의 균형이 깨어졌다는 신호다. 이제 지구가 보내는 이 다급한 이상 신호가 들리지 않는 곳은 없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물과 불과 흙과 공기를 우주를 구성하는 4원소라 불렀다. 4원소는 죽어있는 물체가 아니라 생성적 잠재력을 지닌 살아있는 물질이자 영혼이다. 그것은 생명체에 필수적인 기본 요소이자 만물의 원초적 뿌리다. 인도 자이나교는 여기에 식물을 5원소로 추가한다. 식물은 생명을 선사하는 4원소들을 모으면서, 이 원소들에게 적당한 양의 열과 습기와 미네랄과 산소를 제공함으로써 활력을 불어넣는다. 생명이 자라고 자신을 표현하려면 원소들 사이에 적절한 비율과 균형이 유지되어야 한다. 이 균형이 깨어지면 생존은 불가능하다. 식물은 생성된 존재이면서 세계를 생성하는 원소로서 원소들의 균형을 맞추는 데 기여한다. 식물은 광합성 작용을 통해 대기에 산소를 공급하고 잎이 떨어져 썩으면서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 적정 비율을 유지할 경우 네 원소는 식물이 자랄 수 있게 환대를 베풀고, 식물은 네 원소에게 활력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인간은 지구의 변화를 초래한 산업활동을 통해 원소의 한계치를 행성적 규모로 키움으로써 원소들 사이의 적정 비율을 무너뜨렸다. 인간중심주의의 오만과 생산력주의라는 탐욕이 일으킨 재앙이다. 오늘날 이 재앙은 기후 재난과 제6 멸종이라는 끔찍한 형태로 다가오고 있다.
인간이 일으킨 재앙 앞에서 생명의 지속을 위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로를 찾아야 한다는 호소가 새로운 절박성을 띠고 다가온다. 이 호소를 현실적 가능성으로 옮기려면 여러 층위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대기 온도를 높이는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와 재생에너지 사회로의 전환, 이윤 추구를 위해 자연을 도구화하는 자본주의적 산업구조의 재편, 지구의 허파라 할 수 있는 숲의 개간과 삼림 벌채를 막기 위한 실질적 노력 등등 다가올 파국을 멈추거나 완화하는 직접 행동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재앙을 일으킨 우리네 삶의 방식과 그것을 지탱하는 사유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최근 들어 동물 연구와 포스트휴머니즘이 학계의 새로운 관심사로 부상한 것에는 인간 중심적 사유를 넘어 생명과 접속하는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려는 문제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비인간 행위자들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그들과 인간의 관계를 밝히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런 형국에 ‘식물의 사유’를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식물은 인간과 공통성을 찾기 어려운 생명체이다. 오랫동안 식물은 우리에게 익숙한 ‘존재의 사닥다리’에서 가장 하층에 속한 존재, 감각과 의식과 사유가 일어나지 않고 이동을 할 수 없는 존재, 그리하여 인간과 동물에게 먹을 것과 생산의 원자재를 주지만 의지와 욕구와 주체성이 결여된 피동적 존재로 이해되었다. 식물에는 고등 동물이 발전시킨 중추신경계가 없다. 따라서 머리가 없다. 한국어에서도 ‘식물인간’, ‘식물 정부’라는 표현은 가장 모욕적인 언사이다. 우리 문화에서 식물성은 무기력과 무능력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식물을 통해 인간중심주의가 일으킨 폐해를 넘어설 사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러나 식물을 통해 생명을 사유하려는 움직임은 최근 서구 인문학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에서도 가장 도전적인 영역으로 남아 있다. 원숭이에게서는 인간과 동물을 갈라놓는 심연을 가로질러 모종의 연결성—이를테면 프란시스 발이 침팬지 연구를 통해 밝혀낸, 침팬지 사회의 권력 질서와 인간 사회 권력관계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지만, 들판에 핀 들국화에서 인간과의 접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식물은 안과 밖, 개체와 집단, 유기체와 환경, 삶과 죽음을 분리해 사고하는 우리의 익숙한 사유 관행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실상 식물이라는 존재를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식물을 만나는 일은 식물학자나 유전학자, 미생물학자의 몫이거나 시인들의 상상력에 맡겨졌다. 식물에 관한 한 과학과 시가 철학을 대체해 왔던 것이다.
필자가 아는 한 식물을 사유하는 과제를 가장 독창적으로 떠맡고 있는 철학자가 마이클 마더(Michael Marder)이다. 국내에서 마더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서구권 학계에서는 식물 철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사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1) 그는 현상학, 해체론, 약한 사유(weak thought)를 결합하여 식물 존재론과 식물의 사유를 발전시킨다. 마더에게 식물의 사유(plant thinking)는 네 개의 가지(branch)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식물 존재에게 고유하게 나타나는 비관념적, 비시각적, 비언어적 사유 양식. 마더는 이를 “머리 없는 사유(thought without head)”라 부른다. 둘째, 식물에 대한 인간의 사유. 셋째, 인간의 사유가 식물과의 만남을 통해 식물처럼 변형되는 것. 넷째, 이렇게 변형된 인간의 사유와 식물 존재 사이에 형성되는 공생적 관계.2) 이 네 의미의 결합을 통해 식물의 사유는 무엇보다 먼저 식물 타자와 만나려고 한다. 위 네 개의 정의는 식물 타자와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접촉과 변형과 공생의 서사를 구성한다. 식물을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식물에 고유한 존재 양식과 사유 양식을 드러내고, 우리의 사유를 식물의 사유에 조응하도록 변화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과 식물의 공생적 관계를 창조하려는 것이 식물의 사유가 지향하는 바이다. 인간과 식물의 공생적 관계는 비단 식물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식물이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자연과의 관계로 확장되어 자연과 더 바람직한 관계를 맺으려는 정치적, 윤리적 노력으로 이어진다.
마더에게 식물의 존재 양식, 그리고 그로부터 연원하는 식물의 사유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생태 위기의 사상적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서구 형이상학을 극복하는 작업과 연동되어 있다. 만물을 조율하는 하나의 통일된 원리를 설정하는 로고스 중심주의는 주체와 대상, 내부와 외부, 이성과 감각을 위계적으로 분할하고 개체를 전체에 복속시키는 사유체계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헤겔의 절대정신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은 흔히 태양으로 표상되는 초월적 관념에 이르기 위한 사유의 기획이었다. 형이상학적 명령은 진리를 지금 여기 너머에 있는 무장소적 장소로 초월시키고 존재를 실존에서 분리한다. 여기서 지상의 물질은 생성과 변화의 잠재력과 행위성을 지니지 않은 텅 빈 대상이나 죽어있는 객체로 전락한다. ‘메타퓌직스(metaphysics, 형이상학)’는 ‘퓌시스(phusis, 자연)’를 초월하려는 사유의 운동이다. 『티매우스(Timaeus)』에서 플라톤은 인간을 잎과 가지는 아래를 향하고 뿌리는 관념의 영역에 매달려 있는 ‘천상의 나무(heavenly tree)’에 비유한 적이 있다. 지상의 나무를 뒤집어 놓은 이 기괴한 이미지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형이상학적 관점, 그리고 천상을 향해 날기 위해 지상의 것들을 초월하려는 형이상학적 충동의 표상을 만날 수 있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극복 작업은 메타퓌시스(메타퓌직스의 그리스어)를 다시 퓌시스로 되돌리는 작업과 연동되어 있다. 이를 위해 하이데거는 로고스 중심주의가 출현하기 이전의 그리스 철학으로 돌아가 형이상학의 존재 망각을 넘어설 새로운 사유의 단초를 발견한다.
하이데거가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 철학에서 발견한 퓌시스는 인간이 제작한 인공물처럼 죽어있는 물체가 아니라 스스로 자라고 변화하는 살아있는 존재이다. 하이데거의 용어로 퓌시스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자신을 나타내는(appearing) 존재 사건이다. 그런데, ‘나타남’은 ‘나타나지 않음’을 숨겨진 여분으로 간직하고 있다. 자기 안에서 스스로 생명과 질서를 생성해 나가는 존재가 퓌시스라면, 퓌시스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가 퓌톤(phuton, 식물)이다. 퓌시스(phusis)와 퓌톤(phuton)은 모두 ‘자라다’, ‘싹트다’, ‘생기다’, ‘나타나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 ‘phuein’에서 유래했다. 퓌톤은 퓌시스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 원형이다. 퓌시스가 스스로 생성하고 자라는 자연을 의미한다면 퓌톤은 이 자연의 원리를 가장 생생하게 구현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식물이라는 원형을 제거한 자연에 대한 논의는 불구이자 왜곡이다. 자연에 이르는 길은 식물에 이르는 길을 경유해야 한다.
마더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통해 서구 형이상학의 존재 망각을 넘어서고자 했던 하이데거의 사유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덧붙여 ‘식물 영혼(vegetal soul)’을 지상의 모든 생명에 깃든 영혼의 기저(基底)로 재설정하고, 이 영혼으로부터 식물의 사유를 도출하고자 한다. 여기서 사유란 의식(consciousness)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유는 인간의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적 활동만이 아니라 몸 전체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활동이다. 식물은 몸 전체로 빛을 감지하고 숨을 쉬며, 중력을 느끼고, 화학물질을 인지하며, 주변 생명체에 반응한다. 식물의 사유는 “살아있는 해석(living interpretation)”이자, 외부를 향해 일어나는 “비의식적 지향적 활동(non-conscious intentional activity)”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런 식물의 사유는 “머리 없는 사유”이다. 인간은 의식적 활동과 언어적 형상을 취하지 않는 이 “머리 없는 사유”를 오랫동안 억압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식물은 ‘자라는 것들(ta phuomena)’의 원형적 형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퓌시스 논의에 보탠 것은 모든 생명체를 영혼이 깃든 존재로 바라보고, 영혼의 능력에 따라 생명을 구분했다는 것이다. 영혼은 신체와 분리된 정신이 아니라 성장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원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 영혼에게는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고 번식하는 능력을, 동물 영혼에게는 지각과 욕구와 운동 능력을, 그리고 인간 영혼에게는 동물 영혼이 갖고 있는 능력에 더해 사고 능력을 부여했다. 그의 영혼론이 식물-동물-인간의 위계적 구분 위에서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고 생식하는 식물의 영혼, 그가 ‘토 트렙티콘(to threptikon)’이라 부르는 영양 영혼(nutritive soul)은 가장 낮은 단계의 영혼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토대가 되는 근원적 능력으로 재해석될 여지를 남기고 있다. 식물의 영혼은 눈 없는 영혼, 귀 없는 영혼, 다리 없는 영혼이 아니다. 식물 영혼은 동물과 인간에 미치지 못하는 열등한 영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보다 근원적인 생명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식물 영혼은 후일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라 부르고, 들뢰즈가 ‘생성 능력’이라 부르는 것과 일정 정도 조응한다.
식물 영혼은 식물 존재의 실존 방식에 고유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식물은 자신의 모든 부위에 생명을 지니고 있고, 모든 부위에서 자라며, 모든 부위에서 증식한다. 벚나무의 줄기에서 가지를 잘라 다른 땅에 심으면 새로운 벚나무가 된다. (식물은 하나이면서 여럿이다. 다수성). 또한 식물은 한 곳에 뿌리 박은 부동의 존재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느린 속도로 자란다. (식물의 시간은 느리다. 느림). 씨앗은 어둡고 축축한 땅에 묻혀 있다가 아래위 양방향으로 몸을 뻗고, 뿌리와 새싹 사이의 중간에서 몸을 움직여 상단은 햇빛에 드러내 잎과 꽃과 열매로 자신을 나타내고, 하단은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자란다. (식물은 아래에서 위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여러 방향으로 자란다. 중간성). 이런 식물적 성장은 존재의 나타남이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년생 꽃이 겨울 동안 구근에 잠들어 있듯이, 생명은 자신을 남김없이 나타내지 않고 여분으로 숨어있거나 비밀스러운 암호처럼 은폐되어 있다. 식물은 자신의 비밀을 다 드러나지 않는다. (식물에는 언제나 은폐된 부분이 남아 있다. 은폐성). 식물은 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햇빛, 물, 공기, 흙, 박테리아, 곤충, 균류 등 원소를 포함한 여러 생명 존재들과 함께 이들의 환대에 힘입어 자란다. (식물은 타자들과 더불어 자란다. 공유성과 공동성). 식물은 자신의 생명을 신체의 표면에서 외부로 드러내면서 자란다. (식물은 표면에서 외부로 자란다. 표면성과 외부성). 식물은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는 장소와 계절에 순응하면서 공간의 변형을 통해 자신을 나타낸다. 벚꽃은 벚나무의 봄을 표현하고, 익은 버찌는 여름을 표현하며, 낙엽은 가을을 나타내고, 앙상한 가지는 겨울을 향해 있다. 우리는 식물이 표현하는 비음성 언어를 듣지 못하고 그것을 산업적 효용성의 측면에서만 읽어 내거나, 인간의 상징적 의미로 서둘러 해독해 버린다. (식물은 자신을 공간적으로 표현한다. 공간적 표현성과 비음성성).
마더의 실타래를 따라 간략히 요약한 식물의 존재방식과 사유방식은 단연코 ‘반형이상학적’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의 특성을 구성하는 단일성, 총체성, 내부성, 직선성, 분리성, 가시성과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더가 생태 위기에 맞설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식물의 사유에서 찾고, 철학을 “승화된 식물의 사유”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사유가 식물의 사유를 닮아 만물을 하나의 원리에 종속시키는 형이상학적 폭력성과 그것과 조응하는 정치경제 시스템(인간 중심적, 생산력주의적, 착취적, 지배적 시스템)을 바꿀 수 있을 때,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공생의 세계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승화된 식물의 사유에서 문화는 자연의 경작이어야 한다. 문화는 자연을 지배하거나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의 가능성이 온전히 실현되도록 지원하고 가다듬는 것이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철학을 ‘쿨투라 아니미(cultura animi)’로 정의했다. 쿨투라 아니미는 영혼의 배양(culturing) 혹은 영혼의 경작(cultivation)을 가리킨다. 철학은 영혼의 경작으로서 이미 확립된 진리를 포착하려는 논쟁이나 논박과는 상관없다. 이런 일은 영혼을 키우지 못하는 한갓 말다툼에 불과하다. 키케로에게서 철학은 ‘인간 되기’를 지원하는 보조재이다. 그에게 “철학은 인간 영혼 안에서 식물 생명과 같은 것을 재발견하고 식물 곁에서 식물과 연속성을 지니며 자신을 성장시키겠다는 약속을 인간이 지키도록 지원함으로써 다가올 인간성의 토양을 준비”3)하는 일이다.
그러나 영혼을 경작하는 일이 철학자의 임무만은 아닐 것이다. ‘사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인간의 활동 전반이 영혼의 경작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영혼의 경작이 확산되고 증식될 때 그것은 한 영혼 안에 머무르지 않고 영혼들 사이로 흘러 들어가 새로운 정치 질서의 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마더의 명명을 따라 생명에 호응하는 이 새로운 정치 질서를 ‘식물 민주주의(vegetal democracy)’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식물 민주주의는 개체가 전체로 복속되지 않고 개체들의 전반적 성장에 참여하면서도 자신의 유사 독립성을 유지하는 가지와 줄기와 이파리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정치 질서를 표상한다. 그곳에서 인간과 비인간은 서로를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함께 자라면서 자신의 고유한 성장의 과제를 이루어 낸다.
인간 되기와 식물 민주주의를 경작하기 위해 우리는 자주 숲에 가야 한다. 숲에 머무르는 경험은 너무도 중요하다. 숲으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가 망각한 생명의 요람을 다시 방문하여 우리 존재의 식물적 근원과 조우하는 일이다. 식물 존재 주위에서 인간 공동체가 자라고 무르익을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열림을 숲속의 빈터(Lichtung)에서 찾는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숲속의 빈터에서 나무들은 햇살이 열어놓은 공간을 에워싸고 그늘을 지우며 궁극적으로 그 공간을 보존한다. 역사를 통틀어 한결같이 숲은 인간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숲이 개간된 헐벗은 땅에서 니힐리즘은 마침내 실현된다. 우거진 나뭇가지들을 거치지 않고 햇빛이 직접 쏟아져 모든 것들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곳에서는 어떤 열림도 일어나지 않는다. 숲에서 식물들과 함께 머무를 때 우리는 나무들이 드리우는 그늘 속에서 존재의 열림을 경험할 수 있다. 인간의 사유가 식물의 사유를 닮아가는 여정에서 이 감각적 경험을 빼놓을 수는 없다. 우리 모두 숲으로 가 숲에 오래 머물자!
1) 필자는 마이클 마더와 루스 이리가레가 식물 존재와 관련하여 열여섯 개의 주제에 대해 나눈 편지로 구성된 책을 번역하면서 그의 독창적 사유를 국내에 소개하려고 했다. 『식물의 사유: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이명호·김지은 역, 알렙, 2020. 참조. 그러나 그의 본격적 사유를 만나기 위해서는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그의 주저 『Plant-Thinking: A Philosophy of Vegetal Life』 (New York: Columbia UP, 2013)를 읽어야 한다.
2) Michael Marder, 『Plant-Thinking: A Philosophy of Vegetal Life』 (New York: Columbia UP, 2013) p.10.
3) 『식물의 사유』, 3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