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식물을 향한 관심과 식물적 사유 사이
식물을 향한 관심에는 성과와 속도, 갱신과 경쟁을 요구받는 현대인이 다른 삶의 리듬을 찾으려는 절실함이 녹아 있다. 한곳에 뿌리를 내린 채 그럴듯한 성취를 서둘러 내놓지 않고 빛과 물, 주변 온도와 습도에 맞추어 살아가는 지극한 무해함. 식물은 뒤처지지 않은 자립적 개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근대적 규율에 지친 사람을 그저 있음으로써 위로한다. 그러니까 반려식물과 숲 치유의 유행은 사소한 취미 풍조로만 취급될 수 없다. 과잉 연결에서 역설적으로 심화하는 고립감, 자유로운 이동을 칭송하면서 정착 기반을 허무는 사회적 변동, 돌봄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사적인 부담으로 떠넘긴 체제가 낳은 문화적 징후가 얽혀 있다.
다만 식물을 향한 관심이 식물적 사유와 같아지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게 짚어야 한다. 식물적 사유는 취향의 이명이 아니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생명의 표준으로 삼아 온 사고를 근본적으로 되묻는 일이다. 위에 언급한 빛과 물 외에 토양과 미생물 등은 배경이면서 식물을 구성한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나중에 굳어지는 다양한 요소가 겹치면서 한 사람을 이룬다. 그렇지만 근대성은 다층적 관계에 빚진 주체를 독립적 개인으로만 표상하고, 의존을 미숙함의 징표로 취급해 왔다. 그러한 고정관념을 교정하는 패러다임이 생명 연대와 결부된 식물적 사유이다.
이는 모든 존재가 하나임을 선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각각의 행위자 혹은 행위소(actant)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속하고, 같은 권한을 행사하지 않기에 균등한 책임을 질 수 없다. 얽힘은 화해를 위한 결론을 성급하게 도출하기보다, 이에 대한 혜택과 손실의 양상을 더 정확히 따져 볼 것을 요구한다. 이 글은 식물이 동시대 문화에서 어떤 이미지로 유통되는지, 식물이 단독적 주체 신화를 어떻게 비껴가는지, 생명 연대가 공생의 미담을 넘어 어떤 책임의 윤리를 요청하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사물을 인간의 가치 기준에 맞추어 재단하는 논리를 의심하고,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의 흔적을 언어로 포착하는 시의 속성까지 논의에 포괄한다.
2. 우리가 사랑한 초록의 그늘
카페의 관엽식물은 생기를 불어넣는 소품으로, 건물 외벽의 식물 줄기는 개발의 친환경성을 증명하는 표지로, 숲을 조망하는 호텔 객실은 자연과의 접촉을 고급스러운 체험으로 바꾼다. 이처럼 식물은 도시의 인공성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이를 지속하는 데 이바지한다. 세련된 공간 디자인은 식물 생장에서 보기 좋은 부분만 남긴다. 마른 잎은 자르고, 지나치게 자란 줄기는 묶고, 원하는 수형을 벗어난 식물을 교체한다. 생명 활동은 의도된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용된다. 환대받는 것은 식물 자체라기보다 식물로 연출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인 셈이다. 초록이 넘치는 공간에 도리어 식물성이 부재할 수 있다는 역설은 여기서 생겨난다.
식물을 은유하는 초록은 청결함과 윤리성을 표시하는 기호로도 쓰인다. 포장지의 잎사귀 문양, 광고를 채우는 푸르름은 친환경 상품(기업)이라는 인상을 준다. 무엇을 얼마나 채굴하고 운반했는지, 어느 지역의 환경이 그러한 과정에서 훼손되었는지, 폐기된 물건이 어디로 가는지는 초록의 표면 뒤에 가려진다. 그럼에도 제품에 기재된 ‘자연 유래’라는 문구는 그래도 착한 소비를 했다는 안도감을 준다. 식물을 매개로 한 치유 담론에서도 같은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지치면 숲으로 갔다가 소진된 심신을 추슬러 다시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라는 메시지는 어떤가. 이는 삶을 병들게 한 조건을 그대로 둔 채 개인의 적응력을 높이는 처방으로 귀결된다.
문학도 마냥 결백하지는 않다. 예컨대 꽃은 사랑과 덧없음을, 나무는 인내와 고독을, 낙엽은 상실과 쇠락을 뜻하는 상징으로 통용된다. 미적 전통을 구축한 업적과 별개로, 식물을 인간 내면의 객관적 상관물로 제한한 틀에서 자연의 물질성은 조명받지 못한다. 식물이 등장한다고 그것이 곧 생태적이지는 않다. 인간의 정서를 비추는 거울로만 활용된다면, 시는 인간 중심주의를 미학적으로 되풀이할 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와 같은 호명(김춘수, 「꽃」 부분)을 보라. 이름 부르기는 무심히 지나치던 대상과 새삼 소중한 관계를 맺는 사건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꽃은 인간이 불러 주기 전에도 이미 꽃이었다. 식물과 교류하는 언어는 내가 너에게 의미를 주었다는 자부심이 아닌, 내 의미 부여가 너의 존재를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는 겸손함이 요구된다.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해석이 닿지 않는 부분을 억지로 메우지 않는 태도이다. 전시되는 이미지에서 생명 활동으로 옮겨 놓으면 식물을 둘러싼 시야가 달라진다. 식물을 본다는 것은 꽃의 아름다움 외에 흙과 물, 빛과 온도, 생산과 운송, 돌봄과 폐기의 연쇄를 들여다보는 일. 숲을 본다는 것은 나무들이 어우러진 장관만이 아니라 곤충을 위시한 여러 생물의 활동, 개발의 압력, 접근권의 차이를 살피는 일이다. 초록의 아래를 들여다볼 때, 식물은 인간을 위로하는 대상에서 세계의 면면을 총체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비평적 주제로 탈바꿈한다.
3. 가만히 있음의 역동과 얽힘
괴테가 쓴 『파우스트』의 행보가 예증하는 바, 근대적 인간은 스스로 환경을 통제하면서 의지를 관철하는 개척 주체이다. 이러한 사고관 아래 한곳에 뿌리내린 식물은 움직이지 못하는 부수적 개체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정착은 행위의 결핍이 아닌 행위의 다른 방식일 따름이다. 식물은 위험이 닥쳤을 때 주변 변화에 몸 전체로 대응한다. 뿌리는 물과 영양분이 있는 쪽으로 뻗어 나가고, 잎은 빛과 온도에 맞추어 방향과 상태를 제어한다. 씨앗은 바람과 동물의 털과 배설물을 빌려 다른 장소에 퍼진다. 정착은 가만히 있음이 아닌 계속되는 조율이다. 따라서 자율성은 얽혀 있는 관계망 안에서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으로 고쳐 이해해야 한다. 식물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얽힘이 생명 활동의 일반적인 메커니즘이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과 구별되는, 물질들의 역동성을 중시하는 신유물론의 테제도 이와 같다. 이를테면 몸은 단일한 형상이 아니다. 공기와 음식, 미생물과 화학 물질, 기술과 제도 등 온갖 행위소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빚어낸 집합이다. 감정도 순수한 내면의 산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타인의 표정과 공간의 분위기, 매체의 속도와 사회적 규범, 몸의 상태 등이 어우러져 정동으로서 작용한다. 그래서 주체는 모든 일의 최초 인자라기보다 여러 얽힘에 의한 잠정적 형상으로 여겨진다. 수많은 접촉이 한 사람에게서만 가능한 방식으로 얽힌 결과가 고유성이다. 그것이 그의 책임을 약화하지는 않는다. 내가 나만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진실은 나를 있게 한 요인들과 내가 바꾸어 놓는 세계를 더 넓고 깊게 살피라는 요구이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김수영, 「풀」 부분)가 그렇다. 이 시는 위에서 기술한, 고립적 자족성을 배격하는 관계적 존재론을 함축한다. 풀의 움직임을 억압받는 민중의 저항으로 읽는 해석은 유효하다. 그러나 이렇게만 보면 작품 내 전개되는 식물적 사유가 사라진다. 풀은 외부의 힘에 영향받고, 그에 따라 몸을 굽히면서 부러지지 않는 자세를 취한다. 단단함뿐 아니라 휘어지는 능력, 힘을 배분하는 유연함, 옆의 움직임에 맞추는 군락의 리듬도 저항성을 형성한다.
시에서의 식물적 사유는 소재보다 이상의 입장과 공명한다. 나무나 꽃을 많이 등장시키는 시가 아닌, 하나의 지배적 목소리가 의미를 독점하지 않도록 하는 시. 주체와 객체, 능동과 수동의 구분 불가능성을 남겨 두는 시. 외부를 차단해 완결되는 대신 낯선 언어―물질과 감각을 받아들이면서 형태를 고쳐 나가는 시. 그럼으로써 시인은 자아와 세계를 해명하는 최종 권위자이기보다, 서로 다른 층위의 발화가 부딪치면서도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조율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발화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글쓰기를 행한다.
4. 공생의 미담에서 책임의 윤리로
식물을 거론하면서 빠지기 쉬운 함정은 숲을 완전무결한 협력 공동체로 결론짓는 것이다. 나무와 균류의 상호 부조, 큰 나무가 어린나무의 성장을 돕는다는 이야기는 경쟁을 자연의 법칙으로 내세워 온 사회에 반론을 제공한다. 그러나 숲에는 협력만 있지 않다. 빛과 물을 둘러싼 다툼, 기생과 침입, 질병과 고사, 산불과 폭풍 등의 위협이 도사린다. 죽은 나무가 다른 생명의 거처와 양분이 된다고 이들이 얽힌 모든 양태가 평화로울 수는 없다. 숲은 선한 존재들이 합의하여 꾸린 이상사회가 아니다. 각각의 요구가 충돌하거나 대립하면서도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숲을 조화의 비유로만 사용하는 것은 자연에서 인간이 원하는 교훈만 선별하는 오류를 범한다.
식물적 사유는 숲이 보여 주는 공존의 어려움을 감추지 않는 데에서 출발한다. 함께 산다는 것은 상대에게 전혀 상처를 주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서로의 삶이 얽힌 환경에서 파괴와 배제를 유일한 해법으로 택하지 않는 역량에 있다. 그러니까 생명 연대는 갈등이 사라진 평온이 아니라 갈등을 다루는 섬세한 방식과 이어진다. 모든 생명은 하나라는 명제는 듣기에 좋지만, 차이를 지우면서 현실의 불균형 역시 지울 수 있다. 인간과 식물, 기업과 소비자, 부국과 빈국 등은 같은 세계에 속 하나 같은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더 많은 자원을 점유하고 결정권을 가진 채, 피해를 다른 쪽으로 떠넘길 수 있다. 반면 어떤 이는 타인이 초래한 위험을 피할 수단이나 항의할 방법도, 복구 비용을 감당할 여력조차 없다.
오늘날 널리 회자하는 무해함의 욕망은 이를 방증한다. 주변에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바람은 귀하다. 공격적인 사람보다 온화한 사람을 선호하는 문화적 변화도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소모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은 살 수 없다. 무해함은 자신이 남긴 온갖 흔적을 눈 밖으로 밀어낼 수 있는 사람의 특권일 수 있다. 친환경 제품을 사고 식물을 돌보면서 자연 친화적인 생활양식을 가꾸는 동안, 이를 뒷받침하는 불평등은 가려지기 십상이다. 그것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식물적 사유에 기반을 둔 생명 연대의 윤리는 자신이 아무것도 해치지 않았다고 믿는 자기 정체성으로 환원된다. 어떤 순수는 더러운 과정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은 결과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생태적 위기를 ‘나’의 성실성에만 맡기면 구조는 면책된다. 아무리 꼼꼼히 분리배출하고 유기농 상품을 사용해도 에너지와 주거, 생산 양식이 그대로라면 흐름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생명 연대는 선량한 소비자를 더 많이 길러내는 것보다 자연 파괴를 이익으로 취하는 제도를 고치는 데 무게를 두어야 한다. 무언가의 ‘살림’은 따뜻한 마음으로만 매듭짓지 못한다. 식물의 생은 ‘살림’이 수동적인 대응이 아니라 지속적인 유지와 관리 노동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생명 연대는 창조와 혁신을 칭송하는 문화가 대수롭지 않게 간주한 것, 소소해 보였으나 실은 커다란 가치를 지닌 활동을 사안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잡초와 이끼, 잘린 그루터기와 폭염에 메마른 가로수, 데이터센터가 뿜어내는 열을 식히기 위해 쓰이는 물, 도시 외곽의 폐기물 등은 효율과 편의의 서사에서 쉽게 누락된다. 식물적 사유에 기초한 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 이들을 조명하고, 인간 생활이 그것과 무관하다는 착각을 깨뜨린다. 그때 필요한 것은 연민이 아닌 연루된 자로서의 의식이다. 인간은 동식물의 운명을 장악한 신적 존재가 아니라 같은 공기와 물, 개발 계획과 테크놀로지의 출현에 영향을 주고받는 참여자이다. 생명 연대를 주창하는 시의 윤리적 정치성은 해당 네트워크에 시적 주체와 독자가 포함되어 있음을 밝히는 데에서부터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