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 시공간 없이는 그 실체와 형상의 표현이 불가능하다. 무언가를 쓰는 한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장소성에 대한 섬세한 감각과 기록을 펼칠 수밖에 없다. 내가 살아온 곳, 살아가는 곳은 외부 세계를 내다보는 거점이기도 하지만 내 정체성을 확인하는 구체적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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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날 북천의 코스모스 꽃길 |
나는 하위 주체의 삶과 목소리를 때로는 직접의 언어로 때로는 유머 감각과 아이러니 어법으로 내면화하려고 했었다. 몇몇 곳에서의 경험과 기억과 회한은 때로는 감각으로 서사로 발현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 장소들과 일상에서 마주치는 의외성을 발견하려고 애써왔다. 의외성이야말로 대상의 새로움을 넘어 대상의 복합성을 발견하고 그것에 접촉하는 한 방법이라 믿었기에.
소소한 일상 중에 작정하여 보지 않고서는 그냥 스쳐 지나갈 것이 뻔한 일회적 사건들을 재빠르게 포착하고 찍어내는 것, 그것을 연쇄적으로 나열함으로써 세계의 이면에 숨겨진 복합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그것이 내 시의 전략이라면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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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천(涉川)…. 지금 내가 십 년째 살아가는 곳이다. 행정상으로는 진주시 망경동. 남강 물굽이가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산동네다. 한때 진주에서는 ‘섭천에 산다’고 하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던 시절이 있었다. 온갖 불량(?)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막무가내가 살았고, 어거지가 살았고, 드잡이가 살았다. 섭천은 그렇게 진주에서도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
1923년 강상호·신현수·천석구·장지필·이학찬 등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 인권운동인 ‘형평운동’이 일어났는데 섭천은 바로 그 천대받던, 가축을 도살하던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다.
2020년에 펴낸 시집 ‘시인의 말’에 나는 ‘제지공장을 지나 정신병원을 지나 북천을 지나 / 백정의 마을 섭천에 와 있다. // 말수도 줄고, 웃음도 줄고, 술도 줄고, 시도 줄었다. // 더욱더 또렷해진 건 / 내 무서운 / 눈빛뿐,’이라고 쓴 적이 있다.
나는 왜, 눈빛이 무서워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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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여름. 진주시 상평공단 끄트머리 한 제지공장 구내식당에서였다. 나는 명찰에 부서와 이름이 새겨진 하늘색 작업복을 입고 점심밥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내 발엔 쇠 징이 박힌 안전화가 신겨져 있었고 내 손엔 무수히 많은 빗금이 비치는 스테인리스 식판이 들려 있었다. 그 식판을 들고 나는 구내식당 벽에 붙은 한 포스트를 보았다. ‘진주상공회의소 주최 <공단문학상> 모집 공고’. 그것이 내 문학의 시작이었다. 미미했고, 어리둥절했고, 방향을 몰랐다.
나는 그 공장에서 만 18년 3개월을 근무했다. 3조 3교대를 했다. 그러니까 쉬는 날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곳에서 나는 산더미처럼 많은 종이를 만들었다. 등단이라는 걸 했고, 시집을 냈고, 문학상을 세 번이나 받았다. 두 번 산재 사고를 당했고 지금도 그 흔적은 왼손 검지와 오른손 손목 위에 깊고 크게 남아 있다. 어쨌거나 손목과 손가락이 잘리지 않고 아직도 붙어 있다.
이것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제지공장에서의 내 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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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으로 종이 공장에서 퇴출당한 나는 정신병원엘 갔다. 이렇게만 말하면 누군가는 드디어 정신이 이상해져서 병원에 입원했나, 생각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정신병원으로 돈 벌러 갔다.
3년. 그 3년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곳에서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고,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아야 할 것을 보았다. 정신병원에서의 3년은 내 많은 것들을 뒤흔들어 놓았고 갈아엎어 버렸다. 나는 110명 안팎이 기거하는 그곳 4층 폐쇄병동의 보호사였다. 그곳 이야기는 불문이다. 결코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
다만 이런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단감나무 과수원을 하는 지인이 있어 값이 폭락한 단감을 얼마든지 따가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내 차 가득 실을 수 있는 최대한의 감을 따서 병원으로 갔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중엔 상태가 아주 나쁜 이가 있었는데, 더러웠다. 손발을 늘 덜덜 떨었고 입 주위엔 무엇이 울긋불긋 돋아나 있었고, 침을 질질 흘렸다. 밥 먹을 때가 제일 더러웠다. 환자들 몸무게를 재는 날이 있었는데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의 몸무게를 다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그를 안고 그를 보듬고 저울 위에 올라가는 것. 그리고 거기서 내 몸무게를 빼는 것. 어느 날 그곳 사람 하나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보호사님, 누가 내 얼굴에 자꾸 혈서를 쓰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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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신병원이 소재해 있던 면(面)의 면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제 그 일은 그만(?)하고 문학관 일을 좀 해보지 않겠냐”고. 그 문학관은 내가 사는 진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북천…………!
나는 곧바로 지명에 반응했다. 진주에서 출발해 하동으로 가다 보면 북천 다음은 횡천인데 그 횡천은 ‘황천’으로 읽혔다. 재미가 있었다. 실실 웃음이 나왔다. 처음 발을 디디는 곳이었지만 북천은 내게 너무나 익숙한 곳이었다. 적응하고 말고가 없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과 다를 바가 아무것도 없었다.
문학관이 위치한 곳은 하동군 북천면 이명마을이었는데 이명(理明)을 이명(耳鳴)으로 읽으니 더욱더 신이 났다. 문학관 왼쪽은 봉명산(鳳鳴山), 오른쪽은 계명산(鷄鳴山)이었다. 문학관 뒤쪽은 이명산이다. 봉황이 울고 닭이 울고 이명이 들려?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늘 오전 나는 거의 십 년 만에 그곳엘 다녀왔다. 문학관 앞에서 아는 이를 만났다. 그도 단박에 나를 알아보고 나도 그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문학관 앞, 길 위에 서서 마치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이처럼 이 사람 저 사람 이야기를 묻고 들었다. 북천에서의 나는 문학관 종사자라기보다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고 풀을 베고 산나물을 뜯고 밭을 갈던 현지인이었다.
![]() (구)북천역을 향해 오는 경전선 무궁화호 기차 |
일 년 중 딱 한 달, 북천은 엄청난 꽃들이 피어나는 곳이고, 그 시골구석이 터져 나가라 인간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봄이면 북천에 양귀비와 수레국화가, 가을이면 코스모스와 메밀꽃이 피어난다. 북천역 주변에서 축제가 열린다. 그리고 나머지 열한 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초라해진다. 쇠락해가는 여느 농촌 모습 그대로이다. 무료하기 그지없다.
북천에서의 생존 전략은 무기력이었다. 나도 몰래 북천 연작을 쓰고 있었다. 나는 북천 시편들을 쓰는 데 긴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 퇴고도 아주 조금만 했다. 다시 말하지만 북천과 나는 거의 일체였다. 2013년 그 연작으로 ‘소월시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북천’은 내게 억울하고 답답하고 안타까운 곳이다. 소월시문학상을 받았지만, 그 시편들은 시집으로 묶이지를 못했다. 시집 한 권 분량을 나는 수상 시선집에 다 털어 넣었고 그 51편 시들은 결국 시집으로 나오지 못했다. 말하자면 ‘무주고혼 시편들’이 된 것이다. 지금도 어쩌다가 그것들의 신세를 생각해 본다.
북천은 내 시의 팔자고, 운명이고, 정점 같은 곳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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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노란 어린이집 버스를 몰고 아침저녁으로 진주 시내를 뺑뺑 돈다. 벌써 6년째다. 아이들을 태워 오고 태워다 주는 일. ‘하루에도 수백 번 제 동네를 도는 아이는 / 결국 / 정신이 돌 수밖에 없다는 속설…’이라고 「중국집 오토바이의 행동반경에 대하여」에 썼더니 내가 그 모양 그 꼴을 하며 살고 있다. 나는 에두르거나 정교한 수사에 기대지 않았다. 추상적 언술보다는 일상의 발견에, 지적 통어력보다는 몸의 본능과 직감에 의지해 언어를 찾았다. 그러다 보니 이 모양 이 꼴이 됐다.
어차피 비애와 자조와 후회와 회한과 연민이 나의 몫이고, 그것을 일거에 씩 쓴웃음으로 뭉개버리는 게 내 삶이다. 제지공장과 정신병원과 북천을 거쳐 여기 백정 마을 섭천에까지 내 인생은 흘러와 있지만 나에게 장소는 별거 아니다. 나에게서 시가 다 없어져도 그만, 사라져도 그만. 시와 삶은 내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기려섭천(騎驢涉川)…. 고달프고 애달파도 그저 허우적허우적 내게 주어진 인생을 건너가면 그뿐이다.
진주에는 ‘섭천 소가 웃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처구니없는 일, 터무니없는 일을 만나거나 당할 때 진주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생각해 보면 내가 시를 쓴 것도, 이 글을 쓰는 것도, 섭천 소가 웃을 일이다.
나, 시인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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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집은 / 무덤과 가깝습니까 / 요즘은 무슨 약을 먹고 계십니까 / 무덤에서 무덤으로 / 산책을 하고 있습니까 / 저도 웅크리면 무덤, 무덤이 됩니까 / 무덤 위에 올라가 望(망)을 보았습니까 / 祭床(제상) 위에 밥을 차려놓고 / 먹습니까 / 저는 글을 쓰면 碑文(비문)만 씁니다 / 저는 글을 읽으면 祝文(축문)만 읽습니다 / 짐승을 수도 없이 죽인 사람의 눈빛, 그 눈빛으로 읽습니다 / 무덤 파헤치고 유골 수습하는 사람의 손길은 조심스럽습니다 / 그는 잘 꿰맞추는 사람이지요 / 그는 살 없이, / 내장 없이, 눈 없이 / 사람을 완성하는 사람이지요 / 그는 무덤 속 유골을 끄집어내어 맞추는 사람입니다 / 저는 그 사람이 맞추어놓은 유골 / 유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