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근대모더니즘 소설의 선구자인 구보 박태원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재조명과 기념사업이 이루어졌다. 이에 구보의 장남 박일영 씨가 구보가 북로 가게 된 1950년 구보와 그의 가족들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상술한 기고문을 보내왔다.
자신과 가족 친지들의 기억, 직접 평양을 방문해서 관계자들을 만나고 자료 조사한 결과 등을 종합한 이 글에서 박일영 씨는 ‘구보가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북으로 갔다’는 그간의 월북설을 부인하고 ‘남조선문학가동맹 평양시찰단’의 일원으로 뽑혀 사실상 납북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 근대문학의 위대한 작가 구보 박태원의 운명을 가른 그해 1950년에 관한 기고문을 싣는다. 박일영 씨는 현재 구보의 일대기를 정리한 글을 준비하고 있다.
<특별기고>
구보, 남조선문학가동맹 평양시찰단 일원으로 사실상 납북되다
글 / 박일영_구보 박태원의 장남
6.25 동란
나 일영(一英)은 열두 살 나이에 42세가 된 구보(仇甫)의 손을 잡고, 1950년(그 때는 단기를 썼으니 4283년) 6월 28일 늦은 오후, 북쪽에서 들리던 포성이 멎은 지도 두 식경이 훨씬 지난, 한 이레 전에 하지였으니 긴 여름 해는 아직도 한낮처럼만 느껴지던 때, 성북동 골짜기에 있던 싸리 울타리 집을 나와 마전터를 가로 질러 보성 고개를 넘어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렀다. 인파가 꽤 붐볐고, 종로 4정목 네거리 못 미처 동대문 경찰서 건너편 전매서 골목의 둘러선 아이들 사이로, 태극기를 띠처럼 접어 어깨에서 허리로 두른 순사가 피를 흘린 채 엎어져 있는 주검을, 내 생애 최초로 목격했다. 전쟁이었다. 만화에서나 보던.
우리가 네거리에 나서자 동대문 쪽에서 집채만큼 육중한 무쇠 탱크가 캐터필러 소리도 요란하게 전차길 위를 질주하는데, 긴 포신 뒤에는 전투모와 나뭇가지로 위장을 한 인민군들이, 예의 따발총이라는 걸 가로들고 앉고 서서 무표정하게 지나간다. ‘어, 저렇게 무거운 게 전차길 위로 지나가면 후제 전차는 어찌 댕길구. 전차길이 짜부러져서……’ 난 그런 생각을 하던 어린이였다. 인민군들의 서울 입성을 환영하는(?) 인파는 더욱 많아지고, 군데군데 그 때까지 못 보던 인공기(북의 인민공화국 국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도 간간이 눈에 띄자 우리는 부지중에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감을 느꼈다.
그로부터 한 이틀, 속내는 몰라도 겉으론 평온한 그런 나날들이 지나갔다고 기억한다. 그러던 중 세상이 바뀌고 사흘째, 1950년 7월 초하루 낮때 쯤 해서, 두 마리 거위가 목을 땅으로 길게 뻗고 꺽꺽거리고 개가 사납게 짖는 속에 우리 집에 손님이 왔다. 키도 크지 않은 이가 깡마른데다 머리를 치켜 깎아 단정해 보이긴 하지만 어딘지 눈귀가 올라붙은 게 성깔이 있어 보였는데, 미소조차 조금은 싸늘하게 느껴지는 게 갓 서른을 넘겼을 젊은이였다. 아버지를 대하는 품은 아주 정중했다. 그리 길지 않은 대화가 있은 후 아버지는 외출 준비를 하시며 어머니와 몇 마디 짤막한 대화 뒤에, 눈이 똥그래진 우리들을 뒤로 하시고 그를 따라 집을 나섰다. 그리고 일주일이 다 되도록 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았다.
구인회와 카프
어머니는 아버지가 낯선 젊은이를 따라 나가신 후 이틀은 우리들이 혹 아버지에 대해 물을까 겁을 내시는 듯, 내 생각에는 대수롭지도 않은 일에 웃기도 하시고 별로 맛도 없는 그런 반찬을 만들어 놓으시고도 맛있다고 우리들도 먹어 보라며 혼자서 맛이 있는 양 ‘냥냥, 아 맛있다’를 연발하시기도 했지만, 우리들은 우리들대로 집히는 데가 있었다. 굳이 변변한 답변을 가지고 있지 않을 어머니를 위해 묻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되도록 다투는 일도 삼가고 조용히 책을 본다든가 마당을 거닌다든가 하면서 나름대로 아버지가 얼른 돌아오셨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사흘이 지나자 어머니는 학교 때 배구 선수였을 뿐 아니라, 조금은 괄괄한 성품에 덜렁대는 품이라서, 더는 조바심이 나 집에 계시지 못하겠다는 듯, 흰 모시 치마저고리를 뻗쳐 입으시고, 우리들에게는, ‘내 휭 허니 문안에 좀 댕겨오마’며 행선지나, 무슨 볼 일이란 말도 없이 집을 나가셨는데, 어린 동생들까지도 늘 하듯, 어디를 가느냐, 나도 따라가고 싶다든가, 돌아오는 길에 먹을 것을 사 와야 한다든가 하는 일도 잊었던지, 어머니는 아주 수월하게 집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 © 운영자
박태원과 함께 활동했던 작가들. 이상, 박태원, 김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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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도 둘째 날도 나갔다 오시면 진솔 버선 신고 나간 걸 어느 정신 빠진 녀석이 밟았다든가, 전차 길을 건너는데 자전거를 탄 상고머리가 달려들어 하마터면 핸드백을 놓칠 뻔했다든가 하는, 우리가 기다리는 소리는 단 한 마디도 비추는 일 없이, 덥단 소리만 연해 해 가며 휘갑을 치시곤 했지만, 우리는 아버지에 관한 궁금증을 단 한 마디도 묻지 못하고 답답해하기만 했다. 사흘째 나갔다 오시더니, 예의 하던 객적은 소리는 않고, 한숨만 쉬시며, 그 날도 어느 녀석에겐가 밟힌 버선을 벗어 터시다, 누나들 들으라는 듯 하시던 이야기는, ‘앞집 배정국 씨랑 누구도 누구도 다들 사흘 닷새만에들 나오셨는데, 아버지와 정선생님만 아직도 무슨 조사들을 받고 있는지 소식이 없다고, 어제도 그제도 좀 들어가 알아 달라고 청을 했건만, 어쩌면 동기 간인데, 그 위에 아버지가 그들에게 어떤 형님이고 오라버닌데, 뭬 그리들 바쁘다고 나 몰라라, 모처럼 하는 청을 뒷전으로 돌리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말 섭섭하다’고 혀까지 끌끌 차셨지만, 우린 그 일에 관해 어떠한 의견도 낼 수가 없는 노릇이, 도무지 무슨 일로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들에게 억류가 되어 있다든가 잘못이 있어 닦달을 받고 있다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집히는 데가 있었다. 아마 이번 일은 무엇 보다 서울신문에 연재하시던 「임진왜란」이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먼저 올라갔다 내려온 친구들은 모두가 이념을 떠나서 구보와 막역한 벗들이다. 특히나 구인회를 뭇던 당시의 유명짜한 분들은 여럿이 동란 전에 식솔하여 월북을 했지만, 구인회가 탄생할 때의 세태나 당시 쇠해 가던 카프를 생각 한다면, 그리고 당시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그들이 카프에 정면으로 맞서서 만든 구인회는 아니지만, 회원들의 면면이 카프 맹원들의 작품을 좋게 평하지는 않았을 뿐 아니라, 문단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이라지만 북에서의 입지는 그리 순탄치 않았던 것이, 카프 안에서도 해산을 원치 않던 축들은, 해방이 되자 이북으로 올라가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올라간 때는 인민 공화국 정부 수립을 위한 기초 작업이 마무리 단계였으며, 그리고 그 무렵 해서는 이미 반동이나 친일파의 숙청이 끝나가는 때여서, 뒤늦게 올라간 사람들은 남쪽에서의 명성으로 자리차지는 했지만, 그 까탄으로 해서 오히려 그들의 입지를 좁혀 놓아, 실질적으로 남쪽에서의 심사나 사상 검사랄까 과거 왜정 시대와 남한 정부 수립 후의 동향 특히 보도연맹 가입 등에 대한 반성문 내지는 자술서 같은 것을 요구하는 부류들은, 당성이 강한 젊은 층으로, 남한 사회에는 생소한, 이념적으로만 무장이 잘 된, 그들이 말하는 소위 핵심 엘리트 당원들이라면, 아버지와 같은 작가들에 대한 심사 지연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서울신문이 남한 정부의 기관지였고, 출신 성분이 외국 유학을 다녀올 만한 재력을 지닌 부르주아인데다가, 해방되고 그렇게도 많은 책들을 묶어냈으니…… 게다가 구인회가 순수 예술을 표방하고 나선 사람들이니, 그들의 작품 어디에서 이념을 찾고 의식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나야 이런 소릴 해선 안 될 문외한이긴 하지만.
내가 평론가 백철 선생을 경향신문사 부사장실에서 만난 것은, 소설가 정비석 님과 마주앉아, 내게 8-보(八甫) 란 호가 안겨지던 60년대 중반 그 무렵으로, 선생은 내가 구보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마치 아버지를 대하듯 그렇게 다가앉으며, “실은 내가 구보와 가깝게 지내고 싶어, 마음속으로는 늘 노력을 많이 해왔네만, 일이 여의치 않았던 것은, 내가 카프에 얽혀 글을 쓰며 살아 갈 때는, 부친은 상허와 더불어 순수문학을 부르짖으며 우리들 맞은 짝에 서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고, 해방이 되어 내가 방향을 틀어 민족진영으로 오자, 자네 부친은 나와는 다른 좌파에 기우는 듯해서 서로 사귈 기회가 없었는데, 나로 말하면 일생을 평론으로 살아 온 사람이니 이런 말을 하네만, 부친은 그간에 작품들로 미루어보아도 결코 북으로 갈 분이라곤 생각되지 않아. 내 생각으론 해방이 되고 그 편에 서게 된 것도 친구 탓이고, 난리 통에 북으로 간 것도 ‘동무 따라 강남 갔다’고 밖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내 연전에 사상계에도 똑 같이 그렇게 썼다네”하며 내 손을 잡고 바라보던 반백의 교수의 눈에 연민의 정이 묻어나던 것이 생각난다.
▲ ©운영자
1956년 구보의 가족사진. 구보와 큰딸 설영이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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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가 본 평양 대동강 변에 위치한 선친의 서재. 손때 묻은 사전과 옥편은 언제까지 보시던 거였는지…… 늘 하던 대로 앞은 못 보셔도 책상 위 손 닿을 데 사전과 옥편은 옛날처럼 늘 있어야 했던 건지, 어릴 때 자리를 옮겨 원고를 쓰시려면, 문세영 사전과 옥편, 그리고 강희 자전은 언제나 내가 옮겨 드렸는데…… 잉크병과 철필, 그리고 원고지는 당신이 맡으시고…… 그쪽에서 나온 ‘보존(保存)’이라 손수 써 놓으신 『삼국연의』며 『계명 산천은 밝아 오느냐』를 어루만지다가, 특히 암흑 속에서 한 자 한 자 한마디 한마디를 걸러내어 8부 16권을 구상하셨던 대하역사소설을, 건강이 말을 듣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앞이 보이질 않아서 그예 세 권으로 줄여 다시 쓰셨다고 하지만, 그 많은 원고를 구술로 써냈다면…… 진실로 구보는 글을 쓰기 위해 이승에 오셨으며, 어떠한 환경에 처한다 하더라도 창작을 떠나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외곬의 전업작가였던가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더니…… 삼국지가 폭격으로 쑥밭이 된 전후 평양에서, 종이 난까지 겹친 터에 당할 말이며, 역사 소설로 여생을 마감할 궁리가 어디서 나왔을까 감탄을 해 보기도 했다. 이 얘긴 빗나간 지금의 넋두리이고……
어머니는 좌절하는 일 없이 매일 나가 도련님도 만나보고 손아래 시누도 동원을 해 보고, 시누야 학교 후배이기도 해서 조금은 만만했더랬는데, 이태 전에 단신으로 올라갔다 때때 권총 차고 내려오더니 이젠 숙명 선배 가지곤 씨도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 하기야 나중에 들은 소리지만, 손아래도 한참 아래인 막내가, 언젠가 다옥정에 들른 오라비에게 “오빠는 우리 인민들이 고생하는데 호의호식하여 잘 지내지 않으셨수”하고 나무라는 걸 들었다고 전해 주더란다. 어머니는 매일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이제 더는 안 나가겠다시며도 날만 밝으면 우리들이 보기에 아무 대책도 없으면서도 집에 들어 박혀 있을 수는 정히 힘이 드시는지 나가시곤 하기를 근 일주일이나 되어 갈 때 아버지는 초췌한 몰골에 웃음기도 없이 사립을 들어서셨다. 오시는 맡에 씻지도 않으시고 피로하다며 건넌방으로 들어가신 후 어머니만 몇 번 미음 상에 물 대접을 들고 드나드셨고, 우리들은 애들 소리가 하 요란해도 감히 나갈 염도 하지 않고 집에서들 조용히 보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지, 아직 장마가 그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아버지는 맥고 모자에 분명히 각반은 아닌데 걷기 편한 차림으로 작은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셨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집을 나서자 훤하던 하늘이 차차 어두워지더니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줄기차게 이틀을 퍼붓는 비로 인하여 수원까지 가서 비 긋기를 기다리다 돌아 오셨다. 또 한 번 초췌한 몰골로.
구보의 야맹증
내가 그 때 대뜸 생각해 낸 건 아버지의 심한 야맹증이었다. 얼마나 심하신고 하니, 밤이면, 특히 당시의 성북동 같이 띄엄띄엄 있는 전봇대에 하나 걸러도 아니고 동네 어귀에 하나 정도 있는 외등으론 있으나마나, 개울 건너 배정국 씨 집에 가 바둑이라도 두시려면 나를 지팡이로 삼지 않고는 엄두도 못 내실 정도로 성북동 골짜기에서의 밤은 구보 박태원에게 있어 암흑이었다. 이런 야맹증으로 하여 친한 벗들 사이에는 ‘구보의 평지낙상(坪地落傷)’이란 것이 그리 흉이 될 게 없는 일로 알려져 있었다.
조금 자세히 들어가 보자면, 약주를 조금 과하게 드시고 보성 고개를 넘어 마전터를 지나고 보면 난간이 없는 깊지 않은 성북천이 밤이면 더욱 구불거리고 길어져, 눈이라도 온 날이면 길이고 개울이고 모두가 하야니, 눈 밝은 사람도 눈에 홀려 헛딛기 십상인데, 구보와 같이 부실한 눈에 야맹증까지 있는 사람이야 평지낙상 안 하면 이상하겠다지. 그 위에 거나하게 취해 길이 높았다 낮아졌다 하는데다 혹 눈에 취하기라도 했다면, ‘설영아, 일영아’만 연해 불러가며, 높진 않지만 길 위로 다시 올라오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라서, 운 좋아 동네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모를까, 상상만 해도 못 견디겠는데 한 번은 눈에 홀려 큰일 날 뻔도 하셨단다.
그리곤 정말 며칠 후, 이번엔 한 이레나 그렇게 오래를 종군작가 행렬에 참여를 하셨는데, 아마 낙동강 전투 최전방까지 가셨던 듯, 뒤에 북에 가서 이태나 지나서야 발표를 하신 중편소설 「조국의 깃발」이 내용상으로 보아 그 때 그 행보의 기록이지 싶다. 북에서 아버지의 의붓딸로서 36년을 모셨던 정태은은, 그 내용을 “조옥희 영웅을 형상화했다”고 했다.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이 글이 구보가 월북을 한 후 최초의 글이며, 그 이후 종군작가로서 군관복을 벗을 때까지 이렇다 할 작품 활동이 없었을 뿐 아니라, 문단이나 문학가동맹 같은 집단에 이름이야 올렸겠지만, 적(籍)이 종군작가였기 때문에 휴전 후 곧바로 전쟁의 패인을 들어 남로당 일부를 숙청할 때에도 폭풍을 피해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뒤 잊을 만하면 들쑤셨던 남에서 올라간 구인회 멤버들의 숙청 때에도 크게 부각되는 일 없이 넘어갔던 일은, 역시 휴전이 되기까지 군관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57년에 전향한 문화선전성 기관지의 부주필 말에도, 구보는 어디라서 두각을 나타내는 일 없이, “아직은 위대한 작가가 되기에 앞서 초년병이 되어야 할까 봅니다”라든가, “우선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눈이 어둡고, 다음은 지금의 환경이 글을 쓸 수 없게 하는군요”라고 답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부주필의 해설―구보의 답변을 십분 이해했다는 이어지는 글―로 보아 이것이 구보가 북으로 간 후 수 삼년 간 이렇다 할 작품 활동을 하는 일 없이 견딜 수 있었던 해답이 되겠다.
물론 위에 든 단편에서 볼 수 있는 작품 속 대화라든가 서술 중 북쪽 사람들의 생각하는 방식이라든가, 이북 사투리 구사에 있어, 고개를 외로 꼬게 되는 것이 나만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그의 첫 발표작으로 알려진 「조국의 깃발」에서 대단한 변화 내지는 변이가 일어났다고(?) 할 수도 있겠기에 하는 소리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랄까, 그 단편 하나로, 오랫동안 버티기는 했지만, 구성면에서나 내용면에서 그 이상을 바라기에는 남쪽에서의 해방 전후 작품 성향에 비추어보건대, 구보에게 그 이상은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 격이 되는 고로 좀 더 두고 보자는 쪽으로 흘렀을 가능성도 나대로 상상해 봤다. 하지만 「조국의 깃발」을 다시 거론하고 싶은 것은, 구보의 소설에서는, 특히 대화체에서는 사투리를 쓰는 일이 없이, 언제나 서울 사투리—그러니까 서울 중류층에서 쓰는 말—만으로 대화를 이어간다는 점이다. 이러한 범례에 가까운 사실은 심지어 북에서 쓴 대하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에서도 같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알다시피 『갑오농민전쟁』은 그 배경이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동학란이 주제이고, 주로 전라도 기층민이 주조를 이루는 줄거리이나, 그들이 소설 속에서 구사하는 언행은 모두가 서울말이라는 사실이다. 구보의 경우, 단 한 번이라도 어느 작품의 경우에 예외는 없었는데, 북에서의 첫 작품이라고 보는 「조국의 깃발」에서는 대화체에서의 방언은 물론이고, 당시 구보가 북에서 10년이고 20년을 산 것도 아닌데 도처에 북의 사투리나 그들이 즐겨 쓰는 어투가 나와 있다는 것은, 누군가 알려지지 않은 고마운 사람이 있어 이런 작품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하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경의를 표하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어느 무덥던 팔월의 어느 날, 아버지는 정말 남루하다고 밖엔 표현할 수가 없는 꾀죄죄한 몰골로 사립문을 들어서셨다. 우리 모두는 거위가 울고 개가 짖어 알고는 있었지만, 누구도 나가서 아버지를 부축해 드릴 염도 없이 그저 마음을 졸이며 사립이 지쳐지기만을 기다려―아무도 없었지만 동네 사람 모두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듯 생각되어―우르르 달려들어 아버지를 감싸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무슨 연유로, 또는 무엇을 생각 했기에 그리도 섧게들 울었는지 모르겠다.
그로부터 우리 집안엔 전과 다른 기운이 감돌았다. 될 수 있으면 남에게 묻는 일 없이 우리 큰 아이들은 제각각 스스로 일들을 만들어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그 한 예로써, 나는, 물론 선선히 얻은 대답은 아니었지만, 동네 큰 아이들을 따라 종로2가 한청빌딩이었는지 하는 데 가서 신문을 받아 가지고, 서툴게 거리를 누비며 그래도 크게, “조선인민보, 해방일보 !”를 외치며 전차 길을 잽싸게 건너다녔고, 너무 신문 파는 애 들은 많은 데다 사는 사람은 많지가 않아, 누엿 누엿 석양이 질 때까지 때꼬장 물로 앙괭이를 그리고도 집으로 돌아갈 염도 못 하고 거리를 질주했던 일은 지금도 생각하면 안타깝다.
어머니는 언제부터 일손이 달린다고 나와 일을 하라는 청을, 다섯이나 되는 애들에다 부군이 종군작가 행렬에 올라 있다는 당당한 명분으로 거절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솔선해서, 우리 집에서 비스듬히 건너 있는 자두나무 집 여맹 총무를 따라 나서게 되었고, 나와 동생은 개울을 따라 내려가다 전영필 별장을 지나 보성고개 마루턱 채 못미처에 좁은 다리로 연결이 된 예쁘장하게 생긴 양옥집에 둥지를 튼 소년단에, 신문이 잘 팔려 일찍 들어오는 날엔 나가서 노래도 배우고 잔손 들어가는 일들도 하고 가끔씩 별식도 받아먹으며 그렇게 여름을 보냈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우리 가정의 변화는 한 가지 숨기고 싶은 그런 일이 있음으로 해서 계획 없이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말하고 싶다. 우리로서는 충격적인 아버지의 귀환, 무슨 말이냐 하면, 아버지의 야맹증 때문에 종군작가 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일인가를 우리대로 상상하고 우리가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상을 하여 보라. 적의 공습으로 하여 행군이란 불이 없는 밤에만 해야 한다는데, 어둠 속이라면 두미지석을 분간 못 하시는 아버지의 처신은 상상을 하기조차 싫고 무서운 것이었으며, 밤이 올 때마다 누구보다 아버지의 지팡이가 되어야 할 나로서는 아버지의 처한 상황을 상상하며 얼마나 괴로워했을까를…… 내가 아주 어른이 되고 나서 이태(李泰)의 『남부군』을 읽고는, 소설 속 주인공과 행동을 같이하던 지독한 근시안의 문학청년이, 지리산 토벌대의 작전에 쫒기다 산죽나무 숲에 안경을 잃고, 낮이고 밤이고 앞을 가늠할 수가 없어, 앞으로 나가자면 두 팔을 도리깨처럼 휘두르며 전진을 한다는 대목을 읽고 다시 읽으며, 아버지가 똑이 그 사람이듯, 아버지가 6.25 동란 중에 종군작가로 남부 전선에 두 번에 걸쳐 참전했을 때가 떠올라 아무리 뇌리에서 지우려 해도, 이젠 마치 부친이 그랬다고 어디서 본 듯한 착각에 지금도 생각만 하면 야릇한 전율마저 느낀다. 그런 생활을 북에 가서는 휴전을 할 때까지 계속하셨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일로 해서 모진 바람맞이에 서는 일을 피할 수 있었고, 같이 행동한 동료 ㅇ선생과 ㅅ선생의 배려와 보증(?)으로 쉬 작가 생활에 복구할 수도 있게 되었음은, 차라리 새옹지마의 고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정말 다행인 것이, 유일한(?) 승자란, 아니면 행운아란, 그렇게도 아픈 데서 피 어나는 한 송이 꽃처럼 그리도 처절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이즈막에도 종종 있다.
남조선문학가동맹 평양시찰단
이러구러 더위도 한풀 꺾여 아침저녁으로 시원하진 않아도 찌지는 않게 가을이 기웃거릴 무렵 우리는 다시 손님을 맞았다. 문원 삼촌도 한 번 다녀가셨는데, 우리는 삼촌의 일본이불로 6월 28일 대포알을 막았었다는 이야기도 하면서 삼촌을 반겼지만, 삼촌은 우리의 말이 무슨 소린지 모르는 양, 아니면 아버지와 더 긴한 이야기가 있어 그랬던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건성으로 들으며 마지못해 미소만 짓다가 저녁을 들고 가라는 어머니의 말도 들은 둥만 둥 그렇게 가 버렸다. 그게 우리가 문원 삼촌을 본 마지막이었다.
어쨌거나 손님이 돌아간 후 다시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랫동안 일본말을 섞어 가며 얘기를 하셨고, 우리들은 두 분이 대화 중에 일본말을 하시기만 하면, 우리가 들으면 이로울 게 없 거나 비밀을 요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진행되고 있구나 하면서도 우리는 역시 어린 까닭에 잊으려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지나 알게 된 일로, 그 젊은이의 방문은 아버지가 남조선문학가동맹 평양시찰단의 일원(?)으로 뽑혔다는 전갈이었다.
부친의 작품을 읽으면 어떤 경우는 어이없게도 거의 허무맹랑한 생각도 지어내는 재주를 지닌 천생 작가라 할 분도 있겠지만, 실은 부친 같이 매사에 고지식하신 분도 없어, 그와 가까이 지내는 분들, 특히나 제일고보 동창들은, 구보는 없는 말은 못하는 위인이라는 게 정평이어서, 그런 연고로 이번 평양시찰단에 뽑혔을 거란 생각이 든다. 구보가 현지의 사정을 보고 와서 이남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면, 대부분이 의심 없이 믿으리라는 생각에서였으리라. 일찍이 우리 문단에서는, 북조선에는 예술인들에 대한 배려가 지극하여, 그들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일 없이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여기저기 쾌적한 분위기의 작업실이 마련되어 있는가 하면, 명산대천 어디라서 그런데다가, 가족들의 생계는 물론 의료 교육에 제반 혜택이 식솔들에게 베풀어져, 작가들은 오직 창작에만 매진할 수 있는, 그야말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천국’처럼 알려지기도 했었기에, 그대로는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사실을 알고 싶어하는 심리는 매한가지여서, 믿을 만한 사람이 가보고 이야기를 해 준다면…… 하는, 남쪽의 예술인 중 얼마는 기대를 거는 축들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 봤다.
그러나 구보의 생각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으리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선은 단체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게 첫 번째 부담이었고,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게 그 둘째였을 테고, 셋째는 몸도 쾌차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먼 길을 가야 한다는 게 다시없는 부담이었으리라. 그 위에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여러 날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끼니를 대기가 어려운 작금의 식량 사정에서 더욱 그러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어쩌랴, 세상이 바뀌었으니……
구보가 그런 일들로 머리가 지끈거릴 때 어머니는 먼 길을 떠나는 남편이 숫기가 없어 누구 하나를 사귀자면 몇날 며칠이 걸리고, 식성 또한 꽤 까다로운 데다가 위장 또한 신통치를 못해 건위고장환을 달고 사시는 분인데, 아무리 여름 날씨라지만 집 떠나면 아침저녁으로 기온에 적응하기도 그렇고, 혹 물이 바뀌어 배탈이라도 난다면 그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라, 되도록이면 노자라도 두둑이 마련해 드려야겠어서 생각 끝에 내키진 않았지만 구보의 대표작 “천변풍경” 재판 출판 기념회 때 주위 친구들이 큰돈을 모아 만들어 준 은주전자를 내어 돈 마련을 했다. 번번이 아쉬울 때마다 친정에 가 손을 내밀 수도 없는 일인데다가, 무엇보다 구보는 굶는 한이 있을망정 처갓집 신세는 질색인 위인이라,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낸 생각이다. 한데 뒤늦게 일이 벌어진 것은, 오늘 아침 문안에를 다녀오시더니, 도련님(박문원)도 동행을 하게 되었다는 소리. 처음에는 형님이라면 하늘 같이 아는 아우님이시니 그래도 한숨 돌렸다고 좋아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도련님 노자도 마련해야 할 것이, 아직 도련님으로 말하면 미장가전인데다, 가진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노총각이란 사실이, 허구헌날 쫒기고 들어갔다 나왔다, 나왔나 하면 다시 들어가 앉았고 하기를 밥 먹듯 하다가 난리가 나서 제 발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위인이니, 미술가동맹 대표로 뽑혀 형님을 모시고 가게 되었다는 사실은 다행이지만 노자가 또한 문제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친정인 이화동으로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나로서는 이 일을 지난달까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쓰게 될 원고 내용을 가지고 작은 누나(박소영)와 의논을 하던 중, “얘, 말도 마라, 내가 첫 월급을 타 가지고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은영이 내복을 사오지 않았겠니. 그랬더니 할머니가 조용히 다가와 한다는 말씀이, ‘너 돈 얼른 모아 내 금시계 사내라, 네 애비 북에 갈 때 노자가 없어 네 애미가 와서 울며 졸라, 네 할아버지가 청도에서 사 주신 금시계 팔아서 보냈다’하셔서, 금시계 사 드리노라 몇 달을 헛글 짚으며 살았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 © 운영자
1980년 8월26일자 노동신문에 실린 구보와 권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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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8월 내가 이북에 가서 확인한 바는, 박태원과 박문원의 평양시찰행은 그들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음이 큰 누나와 작은 어머니에 의해 증명되었다. 다만, 나는 평양 ‘방문’이라 했고, 그들은 ‘시찰’이란 어휘 차이만 있었다.
작은 누나 소영이 일깨워 나도 생각이 났던 또 한 가지. 아버지가 떠나시던 날 축대를 내려서시다 다시 들어오셔서, 메고 가려던 유엔군 의무병 가방에 내의와 양말, 그리고 세면도구를 챙겼었는데, ‘여보, 이것 좀 가려 주구료’하며 가만히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던 U.N.(유엔)이란 두 글자. 흰 헝겊을 씌워 바늘로 감치시던 어머니의 자태를 내려다보고 계시던 아버지의 마음 안에 무슨 생각이 흐르고 있었을까.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어머니는 몇 번이나 ‘아야, 아야퍼!’를 연발하며 손가락을 빠시며 아버지를 올려다봤을까, 그 모습을 아버지는 언제까지 기억하고 계셨을까 하는 생각. 어머니는 바느질에 젬병까지는 아니지만 좀 약하시다…… 그보다는 다소곳이 앉아 바느질을 하는 데 어울리지 않는 타입이랄까. 물론 우리 집엔 씽거재봉틀도 있었고, 반지고리엔 별거 별거 다 있었다. 그 때야 물론 경황도 없으셨겠지만……
9.28 수복
9월도 중순을 훨씬 넘어 22일, 난 아버지가 떠나시던 때까지는 정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든가 유엔군이 인천상륙을 하게 된다든가 하는 데는 깜깜 절벽으로, 어찌 됐건 아버지가 떠나시고 나서 사날이 지나니 전세가 뒤바뀌는 듯 어머니의 행보도 그렇거니와 소년단뿐 아니라 거리에 사람들도 발길이 잦아지고 무엇에 쫓기는 듯한 어른들의 행보 위에, 전략상 잠시 서울을 비워야 하니 간단한 보따리를 꾸려 의정부까지 오면 북으로 가는 기차편이 제공될 것이니 채비를 하라는 전갈이 온 것이다. 어머니는 여맹 일에 우리 식구 끼니 걱정에 초죽음이 되셔 밤마다 끙끙 앓기만 하셨는데, 이제 5남매를 이끌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이튿날 저녁, 그러니까 25일에 다시 전갈이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운, 쫓기 듯 달려든 젊은이로부터 폭격으로 의정부역이 폐쇄되었으니 동두천까지 나와야 한다는 전갈이었다. 우리는 이튿날 아침 일찍들 일어나, 책가방에 책과 공책을 넣고 제 딴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들고, 막내는 큰누나가 업고, 어머니는 비단보자기에 무언가를 싸들고 보따리도 하나 드시고 성북동 골짜기를 벗어나려 집을 나섰다. 거위 밥도 개밥도 넉넉히 주고 나서……
소풍을 가는 그런 기분은 아니었지만 미아리 고개를 넘을 때는 여기저기 구덩이를 파는 젊은이들을 보며 남부여대 보따리를 지고 묵묵히 올라가는데, 우리의 걸음은 너무도 느려 마치 그들을 구경나온 사람들인 양 그런 착각에 빠질 정도로 굼떴다. 그도 그럴 것이, 네 살 박이 막내가 열여섯의 큰누이에겐 벅찼고, 힘이 든다고 내려서 걸리자니 그 속도가 오죽 했겠는가. 미아리고개 마루턱에서 떡장수에게 물도 얻어 마시고 쉬기도 하다가 고개를 넘어 개울가에 닿았을 때는 이미 해가 서산에 걸렸을 때다. 준비해 간 점심도 이미 끝낸 지 오래니 다시 배는 고파 오고, 어디라서 앉고만 싶은 동생들…… 사리를 아는 큰 것들이야 어디다 대고 떼를 쓸 수도 없는 형편이지만, 아직 어린 동생들은 언제 먼 걸음을 해 본 일도 없을 뿐더러, 아직도 늦더위는 기승을 부리고……
우리가 돈암정 전차 종점까지 돌아오니 이미 날은 저물어 주위는 깜깜해진 뒤였다. 종일을 걸려 미아리고개를 넘어갔다 넘어온 다리로 어떻게 동두천까지 간단 말인가…… 나는 종종 당시의 어머니의 좌절을, 어머니의 결정을, 그리고 그 후에 어머니에게 닥친 운명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그러한 경우에 처한다면 어머니처럼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봤지만, 아직도 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어머니는 그 깊은 성북동 골짜기로 되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버리고 말았다. 간간이 들려나오는 앓는 소리뿐…… 우리도 모두들 녹아떨어졌다. 미아리고개를 넘어갔다 넘어 온 그 대단한 피난길도 고된 데다 먹은 것도 시원치 않았기 때문일 게다. 모두가 낮잠도 자고 뭘 했는지 모르게 시간은 흘러가고, 밤으로 포 소리는 쿵쿵 더욱 커져만 가더니, 유엔군이 인천에서 함포 사격을 한다고 난리들이고, 우리는 석 달 전 했듯이 삼촌이 가져온 무척이나 두꺼운 일본이불을 건넌방에 펴 놓고 아버지 없이 여섯 식구가 그 속에 들엎뎌서 숨을 죽이고 밤을 세웠다.
포 소리는 멀어지다 잠잠해지고 아침이 밝으려는데, 어머니가 무슨 결정을 하셨는지 부랴부랴 집 떠날 채비를 하시면서, 큰누나를 재촉하여 막내를 업으라시더니, 조금 있다가는 생각을 바꾸셨는지, “애는 내가 업을 테니 넌 이 가방이나 들구 날 따라나서라”하시고는 우리들에겐 아무 지시가 없으시다. 아직 결정이 서질 않으시는 게구나…… 나는 아무 것도 못 본 척 이불깃만 손톱으로 후벼 파고 있었다. 우리에게 어떻게 하란 말은 없으셨다. 황급히 애를 처네로 업고 큰누나는 가방 들고 뒤쫓아 나가고…… 총망중에 무슨 상상을 얼마나 하셨기에 우리 삼남매에겐 일언반구 어찌 하란 말도 없이 당신은 먼저 이화동으로 가시겠다고…… 길은 풍문 학교 질러가는 우리 집 뒤로 난 산길을 택하겠노라고. 우리 삼남매는 그냥 일본이불 속에 다리를 넣은 채로 아침을 먹을 생각도,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하는 일 없이, 무언가 무슨 일이든지 일어나야 그에 대한 반응을 보일 거란 막연한 생각에 그냥 그러고 얼마를 보냈던지……
드디어 개가 짖고 거위가 소리를 지르고, 삽작이 부숴져라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군화발로 들어서 일본이불을 장총에 꽂은 창검으로 들춰 보고, “이것들이 아직도 남아 있을 리가 없지!”하더니, 우리는 아주 없는 걸로 치부를 하는지 아무 말도 묻는 일 없이 이불장을 열어 제치고 이불을 한 번 푹 찌르고는, “가자!”하고는 성큼 나가 밖에 서 있던 한 청년과 셋이서 급히 돌층계를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거위와 개 짖는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엊그제 윗목에 밀어 놓았던 책가방을 메고 두리번거리다 어머니가 미아리로 피난 갈 때 드셨던 남빛 비단 보자기에 쌌던 걸 들고 사립을 꼭 지치지도 않고 성북동 골짜기를 빠져나왔다.
단기 4283년 9월 28일 오정 때. 내가 다시 성북동 골짜기를 찾은 건 2008년 구보의 『삼국지』 출판기념회 뒤였다.
한동안 내가 아버지를 궁금해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 산길에서 국방군에게 잡혀 경찰서로 연행되었다는 어머니의 소식을 접하고, 예의 그 예리한 칼날을 꽂은 장총이 이불장을 쑤시던 장면이 떠올라 어머니만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것이 변변치 못한 저것들 탓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느낄 때마다 나는 그 분들을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대체 우린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러며 막연해했다.
가뜩이나 쌍꺼풀이 진 눈이 하가마가 되어, 고개가 위태스럽게 꺾여 잠이 든 은영이(아마 허기가 져서)를 업은 채 들어온 큰누나는, 쓰러질 듯 기둥을 두 손으로 잡더니 이마를 대고 흐느끼며 사연을 늘어 놓았다. 이른 새벽 산허리를 돌던 세 식구는 한 떼의 총검을 장착한 군인들에게 얼마를 끌려가다가 마침 지나가는 경찰에 인계가 돼 경찰서로 연행이 됐는데, 무릎 꿇고 고개를 수그리고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 다행히도 아는 사람이 없어, 어머니가 애 아픈 것만 자꾸 뇌니, 그냥 놓아 줄 의향으로 다른 방으로 보내려는데 한 여자가, 느닷없이 “날로 밑에서 시키는 대로만 했다켔는데 잡아놓고, 위원장 동문 와카노?”하는 소리에 놀라 그쪽을 보니, 여맹에서 일보던 딱정떼 마누라. 어머니는 남고 애들만 내보내서 오는 길이라고.
거기까지 하더니 갑자기 머리를 기둥에 찧어 가며 맹렬히 울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하도 놀라 어안이 벙벙히 섰다가, 종내는 할머니까지 모두가 울어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나중에야, 아주 몇 년 후에야 알았지만, 경황이 없는 중에 졸속 재판으로 종신형을 받고 그 난리 중에도 대전을 거쳐 안동까지 끌려가 5년 7개월 복역하다, 그래도 아버지 친구들의 주선으로 두 번에 걸친 재심 끝에 감형이 되어 집행유예로 어깨 죽지에 벽돌짝만한 푸른 멍을 지고 나오셨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천형 같은 푸른 점은 작아질 줄 모르고, 그렇게 아픈 기억처럼 그렇게 멍에로 남았다.
아버지는 털털대는 트럭 짐칸이나마 차례가 갔다면 그 날로 평양에 닿았으리라……
한편, 그 높은 간만의 차를 이용해 상상도 못할 세계 전사에 남을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밀어붙여 10월 초에는 평양을 점령하고 계속 북진하여, 서부 전선은 이미 압록강을 코앞에 두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올라가시자 전세가 불리해져 곧 종군작가단에 편성되어 낭림산맥 줄기를 따라 후퇴하다가 혜산진까지 밀려 간 모양이다. 정부 기관의 일부는 강 건너에 주둔하고, 추위와 중공군의 참전으로 잠시 전투는 소강 상태에 들어가는 듯했으나, 대대적인 중공군의 남하로 인해 일부의 인민군들은 함께 서울로 진입을 했고, 남쪽에서 올라간 사람들 대부분은 전세를 관망하며 그곳에 남아 있게 했나 보다. 하기야 눈 덮인 종로 네거리에 서서 두고 간 딸을 찾던 임화의 시구를 생각하면 내려왔던 문인도 더러는 있었던 모양이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는 1.4 후퇴로 큰집을 따라 피난을 갔고, 큰누나는 외갓집에 남아 있다가, 북에서 중공군을 따라 내려왔던 고모가 데리고 북으로 갔던 것이다. 큰누나는 두어 달을 고모가 배속돼 있는 부대의 전령으로 뛰어다니며 북으로 쫓기다가 1951년 2월 중순 께에야 혜산진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는 소리를 이후 40년이 지나 평양 광복거리 큰누나의 아파트에서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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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평양, 필자와 큰누나 박설영의 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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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는 휴전이 되기까지 근 3년을 소좌 견장의 군관복을 입고 종군작가로서 개성과 금강산을 잇는 전선에서 한 치의 땅을 더 차지하려는 남북의 치열한 공방전이 이태를 끌 동안 전선을 누비 다가, 전사자들의 시체더미 속에서 막판에 의용군으로 참전한 장 조카(큰댁에 사촌형)도 찾아내 구사일생으로 살려냈는가 하면, 이런저런 실화처럼은 들리지 않을 에피소드도 만들어내 가며 3년을 보냈다고 들었다.
그 길다면 긴 세월을 그 부실한 눈과 몸으로 용케 잘 견뎌 내어, 상한 데 없이 군복을 벗게 된 구보. 스스로도 얼마나 대견해했을 거며, 무엇보다 그를 지켜 준 벗들 ㅇ씨와 ㅅ씨에게 얼마나 고마워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ㅇ씨는 1929년 발표한 두어 작품을 젊은 구보에게 모욕에 가까운 평을 듣고는 다신 소설에는 손을 대지 않은 극작가였고, 나이도 훨씬 위였는데, 그 후에도 들은 바로는 여러 모로 부친을 감싸 준 은인이었으며, ㅅ씨 또한 일찍이 정계에 진출했었고(하긴 ㅇ씨도 후에 두 번이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지낸 분이니), 그래서 종군작가 시절에 체수에 어울리지 않는 중좌 계급장을 달고 수모도 받곤 했다지만 어찌 되었건 구보의 울타리 노릇을 해 준 셈이라면, 그 모진 풍파(세 번에 걸친 대대적인 남한 문인들에 대한 숙청 사업)에도 큰 제재를 받는 일 없이 구보가 작품 활동을 해 나갈 수 있었던 일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