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설야(雪夜)」), "퇴색한 성교당의 지붕 위에선 //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외인촌(外人村)」),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추일서정(秋日抒情)」),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 내 호올로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냐."(「와사등(瓦斯燈)」)
한국에서 정상적으로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다소 생경한 한자어로 된 김광균의 대표작 제목들을 기억하지는 못할지라도 그의 인상적인 시구 몇 소절쯤은 머리 속에 담아두고 있을 것이다. 위의 시구들이 보여주듯 김광균은 운율과 청각에 의존하던 서정시의 전통에서 탈피, 현대 산업사회의 감수성을 회화적·시각적 이미지를 사용해 인상적으로 소묘해냈다. 김기림이 30년대 모더니즘 도입에 있어서 그 이론적 기수였다면 김광균은 이를 작품 속에서 가장 선명히 구현한 시인이었다.
초기 산업사회로의 진입을 막 눈 앞에 두고 있던 당시의 낙후된 한국사회에서 도시적 서정과 우수를 주요 문학적 제재로 삼을 만큼 조숙한 미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김광균은 현실 세계에서도 그 미 의식 못지 않은 조숙한 천재성을 뽐내었다. 1926년 불과 12살의 나이에 「가는 누님」을 <중외일보>에 발표하며 등단한 것인데 이는 물론 근현대문학사에서 가장 이른 등단으로 인정받고 있다. 1930년대 들어 『와사등』, 『기항지』 등 그의 대표작들이 포함된 주요 시집을 발표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등의 동인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던 그는 해방 후 『황혼가』(1964년)라는 시집을 발표한 것을 제외하면 시작(詩作) 활동에서 한발짝 멀어지게 된다. 6·25 때 납북된 동생을 대신해 '건설실업'을 운영하면서 피치못하게 기업인으로서의 삶을 걷게 된 것이다. 죽음을 눈 앞에 둔 1989년 마지막 시집 『임진화』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다시 상기시킨 김광균은 "기업을 한 것은 생활의 방편일 뿐이었다. 내가 죽은 뒤에는 시인으로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1993년 11월 23일 종로구 부암동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기차, 전신주, 고층빌딩, 다리, 시계탑 등 현대적 소재들을 새로이 문학 속에 끌어들이고 에즈라 파운드 류의 회화적 이미지의 조탁에 공을 들인 김광균의 시에는 그 새로움에 대한 찬사 못지 않게 현실 생활에 밀착되지 못한 공허한 이미지의 나열이라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김광균과 같이 널리 알려진 모더니스트의 경우 산뜻한 도시 풍경이 상쾌감을 주기는 하나 좀 더 깊은 감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은 도시의 외관에만 주목한 나머지 그 실제에 무관심했기 때문이었다"는 유종호 교수의 지적은 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