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문화의 발전 과정을 보면 성쇠와 기복이 엇갈려 왔음을 알게 된다. 태평성대일수록 문화의 꽃이 활짝 피어났고 억압과 고통의 시대일수록 문화의 꽃이 시들고 창의적인 활동이 위축되었다. 시대적 상황이 문화 발전에 미친 영향이 컸던 것이 사실이지만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왕조 시대에는 어떤 인물이 왕권을 잡고 권력을 행사했느냐에 따라 그 시대의 문화 수준이 결정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왕조 시대를 보면 세종과 영·정조 시대의 문화 수준과 다른 시대의 문화를 비교하면 그러한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절대 권력의 왕조 시대는 끝나고 국민주권 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화예술에 대한 의식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와 같이 문화의 운명이 절대자 한 사람의 수중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그 나라의 문화정책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가에 따라 문화 발전의 속도와 내용이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근세사를 보면 대체적으로 문화 부문이 정치·군사·경제 등 다른 분야에 비해 우선순위가 밀려나는 경우를 목격하게 되는데 그것도 역시 그 나라가 처해 있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문화 정책을 정부에만 맡기지 않고 민간단체, 그중에서도 특히 경제 주체인 기업들이 문화 발전을 위한 지원사업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한 대표적인 현상이 선진국에서 번지고 있는 메세나 운동이다.
우리나라에서도 9년 전인 1994년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가 창립되어 현재 157개 기업이 참여한 가운데 공식적으로 문화예술 활동의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금년 6월에는 메세나협의회의 3대 회장으로 박성용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이 취임하여, 과거 '1기업 1문화운동'에서 '1사 1문화운동'으로 강도를 높여 기업들의 보다 적극적인 문화예술 지원사업을 유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메세나 활동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활동이나 지원자'를 뜻하는 프랑스어인 메세나(Mécénat)는 고대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장관을 지냈고 정치가, 외교관, 시인으로 활약하면서 로마 문화가 번영을 구가하는데 중심 역할을 했던 가이우스 마에케나스(Gaius Cilnius Maecenas, BC. 67∼AD. 8)에서 따온 말이다. 그는 스스로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호러스(Horace), 버질(Virgil) 등 당대 예술가들과 친교를 맺고 그들의 예술·창작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데 어느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사건의 하나로 기록된 14∼16세기의 문예부흥(Renaissance)도 사실은 메세나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메세나 운동가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가(家)라 할 수 있다. 14세기 말 지오반니 메디치가 메디치 은행을 일으킨 이래, 1737년 토스카나의 지안 가스토네 메디치가 죽을 때까지 3백년간 '꽃의 도시' 피렌체를 세계 문화의 중심으로 끌어올렸고, 메디치가의 강력한 후원 아래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저명한 화가와 단테, 마키아벨리와 같은 거인이 등장하였다. 메디치 가의 권력 획득 과정은 바로 르네상스의 태동과 그 문화사적 의미를 결정짓는 배경이 되었다.
그 가문이 얼마나 큰 권력을 행사했는가는 "평화와 전쟁을 결정하고 법을 통제하는 자는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이름만 뺀 나머지 모든 점에서 왕이었다"는 말로 알 수 있다. 한 때 국부(國父)의 칭호를 받았던 코시모 데 메디치는 14세기에 벌써 유럽 16개 도시에 은행을 세웠고 사재(私財)를 시정(市政)에 투입, 학예를 보호·장려하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그래서 지금도 메디치가는 문화예술에 관한 한 세계의 대표적인 후원자로 꼽히고 있다.
오늘날에는 미국의 카네기, 포드, 록펠러 재단과 일본의 니폰 파운데이션, 도요다 파운데이션 등이 모기업의 지원을 받아 문화예술과 과학기술의 대표적인 후원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의 메세나 운동은 이제 태동 단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기업의 측면에서는 문화 산업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문화 상품을 잘 포장해서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점과 기업의 이미지와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문화·예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두 가지 점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더 나아가, 투자 개념에서 기업의 특성에 맞는 문화예술을 적극 활용하는 기업도 생겨나고 있다. 이제는 과거의 단순한 지원활동인 스폰서십(Sponsorship)을 뛰어넘어 양자가 서로 도움이 되는 파트너십(Partnership)으로의 전환이 적극적으로 모색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에케나스 또는 메디치와 같이 경제적 이해 관계를 초월해서 순수 문화예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재력가들이 나오기를 바란다는 문화계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볼 만할 것이다.
- 윤상철
- 글 / 윤상철_대산문화재단 상임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