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시대의 화제작
황국명
-
글밭단상
파스칼 그로트
김정숙
정영문
이진명
정연희
허형만
-
생각하는 동화
정호승
-
나의사진첩
유경환
-
문학퍼즐
운영자
-
신간도서
운영자
-
재단 소식
운영자
-
SF콩트
성석제
-
재외한국인작가
김애란
-
세계의 문학상
김현택
-
번역후기
이성훈
-
번역서 리뷰
김춘미
-
문학현장
공선옥
이정화
곽효환
-
작가를 찾아서
류보선
-
원작 대 영화
최준호
-
쟁점토론
양진오
박철화
-
시론
이동하
-
산수유기
이종묵
-
기획특집
김경훈
와타나베 나오키
성민엽
이경훈
윤영천
-
소설 묘사 사전
운영자
-
작가의 고향을 찾아서
전성태
-
나의데뷔작
최하림
윤후명
-
대산문학상
임동확
이정화
-
한국학의 현장
카트린 라팽
-
명작순례
권영경
유석호
-
문학칼럼
박영근
송하춘
-
대산초대석
장철문
-
한국문학 해외소개현황
곽효환
-
숨은 명작을 찾아
최현식
-
창작 후기
송수경
-
이 계절의 문학
한윤정
-
우리문학의 순간들
이근배
-
가상인터뷰
복거일
-
대작 에세이
박상륭
-
대산칼럼
윤상철
-
한국문학의 얼굴
박현준
1. 손(手) 근래, 한 남성잡지사에서, '손'을 주제로 한 인터뷰를 청한 일이 있었다. (그 잡지가 출간된 뒤, - 이렇게 말하자 - 저들은, '손'에 관한 '진리'가 아니라 '미'를 추구하려 했던 것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에 앞서, 본 졸문의 필자는, 그것이 일단은 너무도 소박한 주제처럼 보여, 어휘사전적이거나 상식적인 얘기 말고 뭘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다, 끝에, 선인들은 그러면 대체 저것을 어떻게 이해해 왔던지가 궁금해져,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려, 저 주제와 관련된 부분들을 조금 읽어보게 되었더랬다. 그런 결과 필자는,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거둬들이는 가장 최초의 도구였기 뿐만 아니라, 권세나 창조력의 상징, 심지어는 종교적 의식(儀式) 자체로까지 이해되어 온, 두뇌 다음으로 중요한 인체기관인 것도 알게 되었던다. '손금보기' 학자들에 의하면, 각 개인의 손바닥에는, 하도(河圖)나 낙서(洛書) 모양, 그 개인의 운세가 금(선)의 형태로 나타나 있으며, 손 연구(Cheirougos, Grk.)하는 이들에 의하면, 사람의 손끝에는, 두뇌 다음으로 많은, 수백만에 이르는 신경세포가 모두어져 있다는 것이었고, 거기로부터서는 방사선이 쐬어 난다고 하는 것이었다. (손으로 하는 모든 치료의 비법은, 이것에 연유하는 것일 것) 그런 것들을 관(觀)했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손은 인체기관 중의 기관이다'라고 정의했었을 것이며, 칸트는 또, '손은 육안에 보이는 두뇌'라고도 했었을 것이었다. 중세적 호서(湖西)의 현자들은 그리고, '손과 남근'은, 인체의 여러 기관 중에서도, 저 따로 '독립된 두 기관'인데 특히 손은, '사람의 다른 자아(man's other self)'라고도 이해해 온 기록이 있다. 영어의 'manifest(化現)'의 어원은, 라틴어의 'manus(손)'에 두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해얄 테다. '아담'을 창조하려 하여, '흙'에다 '침(은 '말씀'이겠거니!)' 뱉아 버무리는, 신의 큰 손이 보인다. 창조와 관계되는한 신은 손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이르고, 이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이르는데, 그런즉 '손'은 '말씀'이다. 창조력은 또한 '남근'이라고 이르는즉, '말씀'은 곧 '남근'이다, 남근은 그리고 손이다. '눈'도 이 '남근'의 상징이라고 이르는 것을 좇으면, '손·말씀·눈' 등이 다름 아닌 '남근'이어서, 사람의 행위나 소통하기 따위의 모든 짓은, 대상과의 간통이라고 말해야 될 듯한데, 그래도 괜찮은가 모르겠다. 여기 어디에, 상극적인 것들의 상화(相和)의 비밀이 있어도 보인다. 그건 그러려니와, 필자는 '자이니즘(Jaina敎)'을 기초로 한 진화론자(進化論者)라는 것부터 밝혀둬야, 어떤 부분, 얘기가 되풀이 되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양해를 구할 수 있겠을 뿐만 아니라, 자아 올리려는 말의 실끈이 든든해 질성부른데, 그것도 필자는 육신적 진화(Darwinism) 뿐만 아니라, 정신적 진화(Religionism - 이런 말도 있는가 몰라?)까지를 아우르는 진화론자라는 것을 좀 알아줬으면 싶으다. 유정(有情)은, 육신적 진화를 그 끝까지 달성하고 난 뒤에는, 정신적 진화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이(이 단계부터 혼[魂], 또는 인식의 눈이 뜨인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인데, 육신적 진화의 마지막 단계는 '오관(五官, Pānkēndriya)'을 깨워내기까지가 아닌가 하곴는다1). 이 오관을 구비한 유정은, 이 우주 내에서는, 아직은 '인간'뿐인 듯한데, 자이나교 경전("UTTARĀDHYAYANA")이 가르치는 충격적인 사실의 하나는, 어떤 유정이 어떻게 '인간'으로 태임을 받았다 해도, 오관을 확실하게 구비해 있는 인간은 매우 드물다는 그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얘기는, 필자가 근래 쓴, 『神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라는, 졸책 속에 취급되어 있으므로, 이 자리에선 생략하기로 하는다.) (하던 얘기로 되돌아 가기로 하자면,) 인간이 판켄드리야를 성취할 수 있었던 그 진화의 동력은, '손과 언어'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것쯤은, 누구나의 추측일 수 있을 게다. 양자는, '체(體)/용(用)', 또는 '기표(記表)/기의(記意)'의 관계나 같은 것이어서, 분리할 수도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닐 것이지만, (헌다더라도, 또 아느냐, 손이란 저 따로 노는 놈이라고 이르느니, - 이것은 이솝이 오래 전에 밝혀놓은 얘기지만 - 마음인지 뭣인지 고상한 체하는 녀러 것은, 천체의 운행을 궁구한다고 하는데, 손이란 것은, 곁의 물색 좋은 계집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지, 글쎄 뉘 알겠느냐?) 말하기의 편리를 위해, 양자를 구분해 말하기로 한다면, '손'은 보다 더 '문명(CIVILIZATION, culture)' 쪽에, '언어'는 '문화(CULTURE, civilization)' 쪽에 더 기여했었지 않나 하는 우견이 있다. 강조하지만, 이런 분류는 그리고도, '말하기의 편리를 위해서'라는 전제를 염두에 두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인데, '문명'은 그 기본이, 보다 더 물질적이며, '문화'는 보다 더 정신적이라는, (가설적) 주장도 그럴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문명이 자연을 이해하고, 그것을 판켄드리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뿐만 아니라, 정복(이라니? 그게 무슨 망언인가?)하게 한 것이라면, 문화는, 자연으로부터의, 또는 짐승으로부터의, 판켄드리야[아담]를 판켄드리야에로의 탈출을 도모케 한 것일 것이었다는 믿음이 있다. 이런 수피(獸皮) 벗기를, 연금술사들은 '불순한 짐승의 순화의 나무 오르기'라고 이르되, 이런 의미에 있어서의 '순화의 나무'는 그렇다면, '자연' 그 자체임은 분명하다. 두려운 것은 그런데, 이솝이 잘 갈파하고 있는 바대로, 인피(人皮) 속에 짐승을 숨겨 놓고 있는 유정들이다. 이 유정은, 판켄드리야이면서 카투린드리야(Kat?rindriya - 사관[四官]을 구비한 유정)에로의 반칙적 역진화를 서둘러버린 것으로 이해된다. 판켄드리야(五官)를 갖추고 있어 이 카투린드리야는, 한 우주를 파괴해버릴만큼 위험스러운, 돌연변이적 괴물이 되어버린 것인데, 아수라족(阿修羅族)의 기원은 그러할 테다. 창조되지 않았던 그것들은, 진화/역진화의 도상에서, 돌연변이를 치러 나타난 것이었을 게다. 수피를 너무 벗다 보면, 춥기도 허긴 추웠을 게다, 수피란 좀 가려웁되, 천상적으로까지 안온한 것임을, 그래서 그것 되입으려, 돌아간 것들이 되돌아 오고 하는 것을―. '손'에 관한 호서식 관법은 대략 저러했거니와, 그러면 호동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건너다 보아왔던지, 그것도 아니 궁금해질 도리가 없겠는다. 이쪽(湖東)에서는 그것이, '남근·창조력·눈·말씀'인 것보다, 훨씬 높은 궛2)의 똥꾸녘을 찌르고 오르다, 급기야는 짤려, '공(空)'의 상징까지 띠게 되는 것을 보는데, (고양이 학살에 동원됐던 남천[南泉]화상의 손도 말해야겠지만, 그러려면 너무 장황해질 일이므로, 그 손은 고양이 목을 조이도록 놓아둘 일이겠다.) 구지(俱지)라는 중이 짜른, 그의 문하생의 손가락이며, 무드라(Mudra, 선[禪]꾼들이 하는 '손의 제스처'. 손으로 그들은, 마음이라는 삼거불을 서리서리 검어 쥐어낸다.) 같은 것을 고려하면, 그렇다. '무드라'에 관해서는, 장황스럽더라도, 아는 만큼은 주억거리고 넘어 가야겠지만, 아는 이들은 아는 것을 두고, 이빨을 맞추겠다고 '눈썹'을 탕진할 일은 아닐테다. 말한 바의 '짤린 손가락' 하나는, 우리의 시각(視覺)에 호소되는 경우겠지만, 청각(聽覺)에 호소하는, 비슷한 것이 또 있다, '한 손뼉을 쳐 내는 소리'가 그것인 것. 구지라는 중은, 누가 뭘 물을라 치면, 그때마다 손가락을 하나 뻗쳐 세워, 묻는 자의 눈구녘이나 똥꾸녘을 찌르고 덤비는 시늉을 해 보였다는데, 헌데 그의 사미놈이 스승의 뽄사를 내어 그짓을 하는 것을 알게 되어, 스승이 분기탱천하여 놈의 그 버르장머리 없는 손가락을 싹뚝 짤라버렸다는 고기(古記)가 있다. 그 순간 헌데, 그 제자놈의 눈이 활짝 뜨여졌다는 얘기가 뒤따른다. (손가락과 눈! 이걸로 보건대는, 손가락 짜르기가 다반사로 치뤄진다는, 야쿠자 가족 간에는, 이런 돈오[頓悟]꾼으로 득시글 거리겠느냐? 이 의례[儀禮]는 아마도, 무사[武士]에게는 '칼' 자르기, '남근' 자르기 같은 것일 것이어서, 결국은 송두리째 '몸' 버히기 같은 것일지도 모르는데, 공문[空門]에서도 그것은, '색[色]'의 의미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나서야 공[空]이 보인다.) 구지의 '한 손가락 뻗쳐 올리기' 설법은, 그것이 탁 짤려지고 난 뒤 그의 아손에 의해, 그 선(禪) 기능이랄 것을 다 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누가 그에게 뭘 묻게 되면, 대답을 한답시고, 손가락을 뻗쳐 내려 할 때마다, 거기서는 노상, 가리키려는 것의 실종현상이 일어나곤 하던 것이다. 한 손을 짤린 사내가, 박수를 치겠다고, 남은 손을 휘저을 때도, 그 같은 현상이 일어남을 보게 되던 것. 아마도 공문의 아손들의, 없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려 하는 어떤 대상과, 한 손뼉으로 쳐서 나는 소리 따위에 대한 의미 찾기의 노력은, 그만쯤에서 끝내야 될 듯하다. 그 경계를 넘어서려 하면, 왜냐하면 무참히 환속해버리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패설문(稗說門)의 아손 중의 하나인, 본 패관 따위께는, 까짓 눈썹이야 몇 섬이 불려 나가면 어떻고, 몇 만번을 환속한들 그 또한 어떻겠는가, 세속 떠난 일이 없는 것들이 환속하는 것 보았느냐, 본 패관 투의 '진리'라는 성배의 탐색은 사실로는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던 것. 양문(兩門)의 다름은 그것일 터이다. 그, 그래서 본 패관은, 그 없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려던 것이 무엇인지, 또는, 한 손뼉으로 낸 소리는 어떤 것인지, 그것을 보고 들어 알고 있다는가? 그, 그런 것쯤이라면, 마, 말인데, 저쪽 어디 호젓한 자리에 당도했을 때, 공(公)에게만 귀띔해 주려 하는 즉, 듣고난 뒤 공은 삼가, 행여라도 이똥 구린내를 풍기려 말구라. 만약에 그러려 든다면 공은, 짤렸던 공의 손과 손가락 자리에 새로 순이 돋고 있음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은 다시 짐승의 것인 것, 탓에, 색(色) 쓰려 덤빈다, 치사하다. '공문(空門)'에서는 마무리지어진 것이, '뫎문(몸+말+맘門)'에서는, 저렇게 시작이 되기도 한다. 雜! 2. 갈매기와 까마귀 본 패관이, 삶의 후반기를 살았던 (캐나다) 벤쿠버에는, 바다가 개새끼들로 (달과 바다와 개!) 쌨버렸는데, 비해, 전반기를 살았던 서울엔, 저누무 개새끼가 게새끼들(헥, 이눔은 '달서방'이라고 불리면서도 '가뭄'이라고도 이르는도다. 놈의 진행하는 꼴을 보면, 그것부터도 모순당착이다.) 모양 쌨버맀잖다. 그래 그런지 어쩐지, 갯갓 살이에 홍합이나 게살 맛을 알아버린 짐승의 개지랄인지 어쩐지, 서울에서는 (……이 자리에 주어[主語]랄 것이 들어가야 될 테지만, 만상[漫想]의 즐거움이 무엇이겠느냐?……) 빈번하게 갈증같은 느낌에 당하게 된다. 얼핏 들었기로는, 대개의 종교는, 비나 바다가 '결핍된'(이라는 단어는, 계집이 마을 간 줄도 모르고, 년네 문구멍에다 불쑥 밀어 넣은 강쇠의 시뻘건 육괴같은 것이지만, 그럴 때는 그것에다, '가래침을 죽처럼 발라 준다면, 썩어 문드러진다'는 소리가, 『고금소총』에 있다.) 열악한 풍토에서 일어났다고 함에도, 서울의 종교는 무엇이나 되는지, 그것도 사실은 잘 짚어내지지가 않는다. 어쩌면 서울엔, 삶이 흔전만전이며, 그것이 종교가 돼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울엔 참으로 삶이 흔전만전이어서 인색하지가 않다. 바닷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나게 하잖는가, 마찬가지로 서울에서는 삶 때문에 갈증이 더 심해지는 느낌도 있다. 유마거사께 병문안이라도 간다면, 이 갈증의 까닭을 알아 낼 수도 있을라는가, 는가 모르겠는다. 그래서 그 바닷가에 가 서면, 그것이 무슨 갈증을 어떻게 해소해 주는가? 사실은 그런데, 그것도 알 수가 없는 것이 탈이다. 바닷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진다잖는가. 그런 것을 신밧드 병증이라고 해얄라는가 어쩔라는가는 모르겠어도, 바닷가에만 섰다 하면, 그 속에 풍덩 빠져 죽고 싶음이 일으키는 갈증, 또는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음스런 갈증에 당하는데, 투신하기 대신 항해를 떠난다면, 목적은 어찌되었든, 목적지는 다시 또 뭍이라는 것이, 그러면 문제가 된다. 그래서 보면, 신밧드는, 뭍에서도 못살고 물에서도 못사는, 반인반어(半人半漁) 꼴의, 국적미상의 뱃놈인 것을. 그러나 어찌 신밧드만 그러하겠느냐, 피안에의 이민 길에 오르는, 업(業)의 보따리가 무거운 중생을 태워, 검은 돛폭을 올려 고해(苦海·상사라)를 헤쳐 나가는, 상선(喪船)의 수부, 보리사트바들도 그러한 것을. 선적한 업의 보따리의 무게 탓이었겠느냐, 그렇게 떠난 배마다 어디선지 난파를 했던지, 바람 잔 날 아침에 해변에 나가 보면, 부서진 그 배의 조각들이며 보따리들이, 풍랑에 실려와 차안(此岸) 가에 흩어져 있다. 하직의 손짓과 눈물 속에서 떠난다고 떠나서는, 되돌아 와 있다. 그래서 차안에는, 그런 항해에 멀미를 일으키고, 못참고 토해 자빠지다 갈매기가 되어버린 신밧드들과, 지혜와 자비에 체해 복통을 치르다 뒤집혀, 서는, 까마귀가 되어버린 보디사트바들이, 중생의 뭍에의, 차안에의, 집착이 홍합이 되어, '다닥다닥 바위를 붙들고 있'는 것들을 쪼으고 있다. 까마귀는 상선(喪船)의 돛폭 같은 그 털빛과, 나르는 다른 유정들이 못가진 지혜 탓에, 무슨 지옥의 종내기들이라도 되는 듯한, 부당한 취급을 받아왔으되, 이 새는, 지혜와 자비라는 겉옷을 좀 잘못 걸치다 뒤집어 입었을 뿐인 것으로 보인다. (타의[他議]와 달리, 이 보지살타의[菩提薩陀義]를 신봉하는 이들께는, 나찰이 동시에 보살이라고 하잖느냐. 이런 관법[觀法]은 우주적으로 할례[割禮]를 치른 자들에 의해서만 가능한 듯한데, 그런 뒤에 '쉬바'나 '칼리'의 숭배속도 일어날 수 있었을 테다.) 서역 정토의 소식은, 그래서 새로 들어보니 차안 바람(風·願) 속에서만, 죽은 적 없는 유령들의 울음처럼, 희미하게 들릴 뿐인 것을, 그런 것을. 허나, 바다를 말하려며, 그것도 사실은 바닷가의 '갈매기와 까마귀'를 말하려며, 저 거룩한 뜻을 가진 사공들, 보리사트바들의 얼굴에다, 말의 썩은 생선을 던지려는 짓은, 옳은게 아닐 테다. 그것이 그리고, 본 패관의 의도도 아니다. '사람' 얘기를 하려면, '동물'을 끌어들여 비아냥거리든, 꾀 많은 늙은네 이솝이, 빠뜨려 먹고, 하지 못한 얘기를 하나 하려는 것이 그만……, 하지만 만상(漫想)의 즐거움이 무엇이겠느냐, 왼발로 달 딛고, 오른발로 해 딛어, 만상에 비틀거리는 자여, 그러다 가랑이 찢어질라! 이솝이라는 늙은네는, 헌데 어쩌면, '홍합'이라는 조개 먹기를 즐겨하지 안했거나, 당시까지의 까마귀는, 갈매기와 별 다름이 없었던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있다. 홍합이란 글쎄, 이 패관께 이해되어지기는, 뭍에의 집착을 여의지 못한 뱃놈들의, 물길 떠나기에서 이뤄진 것인 것이었거니―. 허허허, 오늘 건너다 보니 헌데, 한 젊은 사내가, 홍합을 따며 노래랄 것을 부르고 있어, 귀 기울여 보니 이런다.다닥 다닥 다닥 다닥십리 밖에서 들려 오는 백만대군의 말발굽 소리다닥 다닥 바위를 붙들고 있다. - 차창룡 「채석강 홍합」의 일부노래하며 그는, 홍합을 먼저 눈(視覺)으로 도려 파내서는, 다음 귀(聽覺)로 씹어 먹는데, 사뭇 희한한 홍합 따기러람. 의성어(擬聲語 - 다닥 다닥 말굽 소리)와 의태어(擬態語 - 다닥 다닥 바위를 붙들고 있다)가 교묘하게 야합해 있는데, 그것 뿐만은 아니다, 예술가들의 조금 휘어진 시선에는,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해안으로 달려 오는 바다가, 갈기털을 세운, 떼 말의 질주로 보여 오거니와, 여기 또한 의태어와 의성어의 야합이 있어, 거기서 굳어진 홍합은, 여럿의 음수 냄새를 풍긴다. 어쨌든, 노래하며 홍합 따먹는, 저 젊은 사내, 집 돌아 가는대로, 비린내 나는 설사 탓에 칙간 길이 바쁠 게 걱정스럽다. '의태어·의성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리고 만상의 즐거움을 만끽하려 해서 말이지만, 뭍과 물도 그 '의미'는 같되, 한쪽이 의태어라면, 다른 쪽은 의성어라고 말한다 해도, 이런누무 미친 영감탱이 떠나겠다고, 할망구가 보따리 쌀 일은 없을 테다. 저런 것이, 인류가 함께 누워 자며 꾸는 꿈('집단적 꿈') 속에서는, '인어(人魚)'의 모습을 취해 나타나 있을 것일 것인데,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물고기―. 르네 마그리트의 인어는 그런데, 저 순서가 뒤집혀 있어, 인류의 '집단적 꿈'을 교란하고 있다. 상반신은 물고기며, 하반신은, 대단히 에로틱하다고 해야 할 여인이어서, 그의 인어는, 달밤에 해변에서, 뭍사내와 정을 속삭이는 그런 것이기 보다는, 성욕을 일으킨다. 이 환쟁이의 환 치기의 비결이 늘 저러한데, 예를 들면 '파이프'나 '능금'을, 아주 정교하게 구상적으로 그려 놓고, '이것은 파이프나 능금이 아니올시다'라고 하여, 의태어와 의성어를 역으로 뒤섞어 교란한다. 눈 뻔히 뜨고 보면서, 눈을 도난당한다. 야바위다. 허긴 모르지, 그는, 있어온 구상적 가치 따위에 저항을 보였거나, 비웃으려 했거나, 붕괴하려 했었던지도, 모른다 말이지. 그러나 본 필자의 졸견에는, 있어온 가치는, 붕괴해야 하는 것이기 보다는, 만약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면, 있어 온 것을 기본이나 기반으로 하여, 새로 세워야 하는 것이나, 아닌가 한다. '가치'가 '유행'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그러하다는 얘기지만, 부연해 둘 것은, 이런 경우엔, 무엇이 진리다 라는 기준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일 게다. 사람의 '바다'와의 성교에의 욕망은 그런데, '에로티시즘(Eroticism)'이기 보다는 '타나토스(Tanatos)'가 아니겠는가, 하는 우견이 있다. 이솝이었다면, 재미있게 꾸몄음에 분명한 얘기를 하나 하자는 것이, 이 졸문의 의도였었는데, 스스로 담근 말의 술에, 이 패관이 너무 좀 취했었내비다. 이솝은, 자기와 외계 사이에다, 유리의 성을 쌓아 놓았던 모양이어서, 그의 오관이 거둬들이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은 이 벽을 통과하기에 좇아, 굴절현상을 일으켜 내지 않을 수가 없었던 듯하여, (그의) 수사학은 은유적이며, 얘기는 우화의 형태를 꾸며냈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대로인 것. 때로 그런 것이 그러나, 성가실 때가 있다. 그런 얘기의 의미를 쪼아 내려기는, 갈매기가 조갯살 파먹으려 하기나 비슷해서 그렇다. 그래서 필자는, 그 성가심을 피하려 하여, 까마귀로부터 배운 방법을 써먹으려 하는데, 바다가 흔해빠진 고장의 해안선에는, 신밧드들이 갈매기된 것들과, 보리사트바들이 까마귀된 것들이, 어울려, 왼종일 바다를 쪼아먹고 뭍에다 똥싸고 하는 일로 날을 저물리는데, 거기, 이솝이 보았어야 할 놀라운 광경이 있다. 그것은 이렇다, 까마귀는, 예의 저 홍합(이든, 다른 조개든)을 하나 따 발톱에 꿰 차면, 갈매기와 달리, 그것을 부리나 발톱으로 열려 하기 전에, 우선 하늘로 날아 오른다, 올라서는, 어디 적당한 공중에서 발톱을 풀어, 쥐었던 것을, 땅에다 탁 떨어트린다, 바닥은, 산책자들을 위해 시멘트로 덮어놓아 바위처럼 굳다, 떨어뜨려진 것은 깨진 묵사발이다, 그러면 날아내려 까마귀는, 갈매기처럼 비지땀을 흘리지 않고도, 저 단단한 껍질 속의, 비린 비밀을 파헤친다 ― 놀랍거니! 갈매기는 그때까지도 빈 입으로, 그런 까마귀를 멀건히 건너다 보고만 있다. 이눔 갈매기여, 너는 돼지여, 글쎄 갈매기는 돼지다. 문제는 그런데, 갈매기는 글쎄지, 아무리 배가 고파도, 까마귀의 흉내라도 내보려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는 거기에 있을 테다. '인지(認知)의 개발'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그 말은 은연중에 시간의 개념을 저변하고서 쓰여지는 것일 테다. 그래서 말인데, 저 까마귀와 갈매기의 인지 사이에는, 대체 얼마나 긴 시간적 거리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던 것이다. 음식을, 그것도 자동식 오븐(oven)에 넣어, 먼저 익혀서 위장에 넣는 '사람'과, 예의 저 오븐을 위장에 가져, 날것을 먹어 위장 속에서 익히는 '원숭이'와의 사이에는 또, 얼마쯤의 시차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도 더 따라붙는 의문은, 같은 인종이어서, 같은 문명·문화를 향유하고 있음에도, - 말하기의 편리를 위해 이렇게 비유한다면 - 물림 받은 농토에서 거두게 될 비옥한 뿌리나 알곡식을 위해, 보습을 대어 땅을 일구고 씨 뿌리는, 그냥 일반적 농부와, 그 땅의 깊은 속 어디에 묻혀져 있다는, '숨겨진 돌(현자의 돌)'을 캐어내려, (그 땅의) 밑바닥까지라도 파고 내려가는, 이 특정한 농부(는, 광부래야겠는가?)와의 사이의 시차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 농부가 고구마뿌리를 캐내고 있을 때, 다른 농부는, (동화 속에 보이는, 땅의 아래 어느 정원에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지혜의 열매'를 따고 있을 것이다. 이 특정한 농부의 '땅 파고, 깊은 속으로 내려가기'는, (이제껏 견고하던 땅이 어느새 반 바퀴 빙 돌았던지는 모르되,) 연금술사들의 관법(觀法)에는, '불순한 짐승의 순화의 나무 타고 오르기'였으니, 내린다고 하며 이 농부는, 저 '지혜의 열매 나무'를 올랐던 모양이다. 농부 하나는, 입어진 수피(獸皮)를 영위키 위해 땀 흘리고, 다른 하나는, 입어진 수피를 벗기 위해 땀 흘린다. 입어진 수피를 영위키 위해 흘리는 땀도, 한 방울 한 방울이, 금강석처럼이나 값지고 아름답다! 그 땀을 흘려야 되는 것은 그러나, 그냥 '기본'이며, 그래서 그것은 '몸의 종교'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땀의 의미가 강조되고 찬양되어지는 일을 두고는, 얼마를 칭송한다 해도 충분치는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러나, 카투린드리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유정의 교의(敎義)라는 것이, 고려되어지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서라, 하지만 말아라, 더 말하려 말아라! 알아 차렸거들랑은 사미여, 그 표시로 손가락 하나를 뻗쳐 올려 보아라! 흐흐, 그렇다면 이 노궐(老厥)이 어쩔성부르냐? 대번에 그것을 짤라, 마당의 워리놈께 보시나 해버리지 않게? 사미는 그런 뒤, 달을 가리킨다고, 없는 손가락을 뻗쳐 올리려 하면, 달은 없다. (판켄드리야로부터의 진화는, 이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겠거니.) 야야, 저누무 개가 왜 저리 짖어쌌느냐, 아마도 사미놈의, 먹은 손가락이, 뱃속에서 달을 가리키려 그러나 보다. 이래서 생각나는 것은, '문학'이란, 저 어떤 사미의 손가락 하나를 잘못 먹은, 그 개 짓는 소리 같은 것은 아니겠는가, 글쎄 아니겠는가, …… 아니거든, 알아묵기 쉽게 좀 일러도고! 만상(萬象)이 만상(漫想)이려니―.
- 박상륭
- 글 / 박상륭_소설가. 1940년생. 소설 『죽음의 한 연구』 『칠조어론』 『열명길』 『아겔다마』 『평심』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