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의 문학
독자 없는 시대, 쏟아지는 작가들의 노작(勞作)

  • 이 계절의 문학
  • 2003년 가을호 (통권 9호)
독자 없는 시대, 쏟아지는 작가들의 노작(勞作)

"책이 안팔린다. 특히 문학서는 더욱 안팔린다"는 한숨 속에서도 문단은 활기를 잃지 않고 있다. 독자가 없는 것보다 무서운 건 읽을 만한 책이 없는 것인데 다행히도 읽어야 할 책들은 즐비하다. 서사의 힘이 느껴지는 대형 작품들이 신작·기성작을 가리지 않고 여러 종 쏟아져 나왔고, 우리 문단의 허리인 중견작가들이 부지런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1990년대 여성작가군을 잇는 2000년대 남성작가군이 형성되는 가운데 순문학의 엄숙주의를 넘어서려는 작품들이 주류무대로 등장하고 있다.
  올초부터 김주영의 『객주』(10권, 문이당), 이병주의 『바람과 구름과 비』(10권, 들녘)같은 대하소설의 재출간이 줄을 잇더니 5권, 10권짜리 덩치 큰 작품들이 줄지어 나왔다. 한수산씨는 5권짜리 장편 『까마귀』(해냄)를 냈고 황석영씨는 『삼국지』(창작과비평사)를 10권으로 편역해 선보였다. 『퇴마록』의 작가 이우혁씨도 6권짜리 판타지소설 『치우천왕기』(들녘)를 발표했다. 『서유기』(10권·문학과지성사)가 중문학자 임홍빈씨에 의해 최초로 완역되기도 했다.

  한수산씨의 『까마귀』는 자료수집부터 탈고까지 14년이 걸린 노작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한씨는 소설 『욕망의 거리』에서 지도자의 대머리를 언급했다는 혐의로 5공 초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뒤 1980년대를 우울하게 보내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일제말 나가사키 인근 탄광에 강제 징용돼 원자폭탄에 희생당한 한국인들의 비참한 삶을 접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한 게 이번 소설이다. 작가는 "죽음을 끼고 산다는 게 끔찍했지만 작가로서의 의무감이 소설을 쓰게 했다"고 털어놓았다.

  황석영의 『삼국지』는 황석영과 삼국지란 두 흥행 요소의 만남에 힘입어 출판계 불황 속에서도 높은 판매 실적을 거뒀다. 이 책은 원전에 가장 충실한 삼국지를 표방하면서 동아시아 특유의 세계관·인간관을 되살리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1988년 초판 발행 이후 1천4백만부가 팔린 이문열 『삼국지』의 아성에 도전장을 던진 셈이다. 연말에는 장정일씨도 『삼국지』(10권, 김영사)를 내고 삼국지 시장에 합류할 예정이다.   

  한편 이성복, 김지하, 이청준, 박범신 등 중견 이상 작가들이 수작을 선보여 여름 문단을 풍성하게 했다. 이성복씨는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이후 10년 만에 5번째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을 내놓아 주목을 받았다.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에서 이미 한 시대의 젊은 피, 불온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등극했던 그는 오랜 침묵을 깨고 누추한 일상의 본질을 꿰뚫는 시들을 선보였다. "이 길은 돌아나올 수 없는 길, 시는 스스로 만든 뱀이니 어서 시의 독이 온몸으로 퍼졌으면 좋겠다"는 고백에서 스스로 만든 언어의 그물과 씨름했던 시간들이 느껴진다.

  김지하씨는 지난해 시집 『화개』 발표 이후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고 수묵시화첩 『절, 그 언저리』를 냈다. 『김지하 사상전집』(3권, 실천문학사)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에는 1991년부터 띄엄띄엄 집필해온 회고록 『흰 그늘의 길』(3권, 학고재)을 완성했다. "회고록은 너무 빠른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으나 지나간 시대를 정리하는 측면이 강하다. 글쓰기란 측면에서는 과거의 기억을 자유롭게 비약·교류시키는 해체기법을 도입, 대립과 중심을 거부하는 자신의 사상을 실험했다.      

   이청준씨는 5년에 걸쳐 24종 25권으로 발간된 '이청준 문학전집'(열림원) 완간에 맞춰 2권짜리 전작장편 『신화를 삼킨 섬』(열림원)을 발표해 문학적 저력을 과시했다. "소설이란 결국 인생의 부끄러운 상처와 아픔, 그 마디를 풀어내는 씻김질"이라고 말하는 그는 '씻김질로서의 문화'의 원형을 제주 심방(무당)의 세계에서 찾아낸다. 현실과 넋들의 관계가 악화돼 씻어내야 할 한이 많았던 두 시기, '4·3사건'과 5공초기를 무대로 했다.

  박범신씨는 등단 30주년을 맞아 발표한 자전적 장편소설 『더러운 책상』(문학동네)으로 『완당평전』을 쓴 미술사학자 유홍준씨와 더불어 올해 '만해문학상'을 수상하게 됐다. 등단 초기 '대중작가'로 분류돼 평단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그는 뼈를 깎는 절필기간을 거쳐 중년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문학적 성취와 젊은 감각으로 각광받고 있다. 『더러운 책상』은 열여섯살 문학청년의 예민한 촉수에 포착된 일상과 시대를 담았다.  

  우리 문단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문학동네 제정 '문학동네 신인상', 민음사 제정 '오늘의 작가상' 수상자가 최근 발표됐는데 본격문학의 문제의식을 유지하면서도 대중문화적 상상력이 두드러진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은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은 팍스아메리카나를 구가하는 미국의 이중성에 대해 엉뚱하고 기발한 만화적 상상력으로 직격탄을 날리는 작품이다. 도색잡지를 보다가 들켜 투신자살을 기도하던 주인공이 슈퍼맨의 도움으로 미국에 있는 정의의 본부에 날아가서 보고 들은 일들이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김종은의 『서울특별시』도 서울에 사는 네 젊은이의 일상과 일탈적 행동을 한편의 영화처럼 속도감 있게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요즘 30대 남성작가들의 약진이 눈에 띄는 가운데 대표주자인 김연수, 김종광, 김탁환씨가 신작을 발표했다. 김연수씨의 『사랑이라니, 선영아』(작가정신)는 대학동창생 커플의 결혼을 둘러싼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단순 명쾌했던 춘향전식 사랑과 대비되는 우리 시대 사랑의 자기중심성을 그렸다. 김종광씨도 특유의 유머와 풍자를 담은 소설집 『소주와 짬뽕의 힘』(이가서)을 냈다. 사료와 상상력을 결합시켜 사실(史實)의 맥락과 인물의 내면을 탐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역사소설을 선보여온 김탁환씨도 『방각본살인사건』(황금가지)을 내놓았다.

  우리 문학의 활력이 독자보다는 작가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평단과 매스컴에서 집중 조명된 작품조차도 판매시장에서는 고전을 면하지 못하기 일쑤다. 그럼에도 역사적 소재부터 만화적 상상력까지 우리 문학이 지닌 폭과 유연성은 어느 때보다 넓어졌으며 이는 대중문화·영상문화 우위의 시대에도 문학이 여전히 간직한 젊음의 증거로 볼 수 있다.  

 

한윤정
글 / 한윤정_경향신문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