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혼자서 하는 일이다. 예술가는 작품으로만 승부한다. 그러나 문인도 사람인지라 뜻맞는 이들끼리 만나서 담론을 하고 서로 북돋우는 일을 왜 마다하겠는가.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정자를 짓고 시인, 묵객들이 모여 시로 문답하는 모습은 떠올리기만 해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런데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문학 동네에도 정치판 못지 않은 선거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창조』, 『폐허』, 『백조』 등 동인지가 신문학을 꽃피웠고 정지용, 김영랑 등이 만들었던 『시문학』이 우리 시의 현대화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시대적 당위였다. 그러나 카프의 이념적 집단화, 일제 강점기의 어용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의 천황 충성과 전쟁 선동 등은 문학을 훼손하고 오도하는 불행한 사건들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문인들의 집단적 편가르기는 한층 심화되었고 글쓰는 일에 더 전념해야 할 문인들이 단체장을 두고 자리다툼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척박한 시대에 어렵게 글을 쓰면서 서로 다독여 주어야 할 사이에 돈도 안되고 권력도 없는 자리를 두고 얼굴을 붉힌 까닭이 무엇인가. 좁은 울타리 안에서 아침 저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니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사양을 하고 억지로 떠맡기면 앉아도 보는 그런 미덕쯤 있을 법한데 그게 아니었다.
문단 선거라는 것이 그저 봄바람쯤 살랑살랑 부는 것이려니 했는데 1973년 정초에 불었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는 아예 사라호 같은 태풍이었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이 이를 두고 한 말인가. 현 이사장인 김동리의 아성에 조연현이 도전장을 낸 것이다. 김동리는 누구인가. 임화, 이태준 등이 깃발을 올린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 1946년 서정주, 박목월, 조연현 등 신인군을 모아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당당히 지휘를 했던 우파 문학의 선봉장이 아닌가.
소설로나 이론으로나 김동리는 당대 거장이었다. 그러면 조연현은 누구인가. 1948년 『문예』지의 주간을 맡았었고 1955년 『현대문학』의 창간에서부터 주간으로 18년 동안 막강한 권좌를 지켜왔었다. 문예지는 창간호가 곧 종간호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단명하는 풍토여서 50년대 후반에 『문학예술』, 『자유문학』 등이 의욕을 가지고 우수한 작가들을 배출하기도 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는데 유독 『현대문학』만 독야청청 장수를 누리고 있었다.
신춘문예 등으로 나날이 문단 인구는 늘어가는데 막상 발표지면이 없어 『현대문학』에 작품 한 편 싣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려웠다. 그 당시만 해도 문학출판이 활발하지 않던 때라 『현대문학』은 문학지망생 뿐 아니라 지식층에서 널리 읽히는 잡지였다.
모든 선거가 그렇듯이 73년 정월의 총회를 앞두고 선거 열풍은 72년 하반기부터 불기 시작했다. 김동리 진영은 부인이자 소설가이며 문단의 대모로 불리는 손소희가 참모장이요, 특공대장으로는 이문구가 있었다. 조연현 진영은 문덕수가 참모장이었고 이문구 상대역으로 신세훈이 있었다.
한국문인협회가 창립된 것은 1961년 12월 30일 충무로 수도여자사범대학 강당에서였다. 박종화, 김동리, 서정주 등이 이끌었던 한국문학가협회와 김광섭, 모윤숙, 백철 등이 이끌었던 한국자유문학자협회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50년대 문학을 꽃피우고 있었는데 5·16을 만나서 강제 해체되었다가 몇 달 만에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시키는 대로 두 단체를 하나로 묶게 된 것이다.
지금 예총 산하의 단체들이 모두 그때 생겨났는데 음악, 미술, 연극 등 명사로 이름을 짓게 되어 있었다. 문단 한 살배기 신인이었던 나는 명동에 나갔다가 구경삼아 창립총회장에 갔었는데 먼저 이름짓기부터 실갱이를 하기 시작했다. 즉 한국문학협회로 해야 다른 단체들과 돌림자가 맞는데 자유문협 측에서 그것은 한국문학가협회의 "가"자 하나만 뺀 것이 된다고 해서 돌림자를 못쓰고 문인 자가 들어간 것이다.
다음은 회장 선출에서 또 팽팽히 맞섰다. 한국문협 쪽이나 자유문협 쪽 모두 회장감이 넘치는데도 색깔이 없는 분을 뽑자니 76세의 고령이고 문단을 떠난 목사님인 전영택을 모셨다. 어부지리란 말은 이런 때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2년 뒤인 63년 박종화가 회장에 복귀했으나 실세는 부이사장인 김동리였다. 김동리는 68년 문인협회 기관지로 『월간문학』을 창간, 지면에 목마른 문인들에게 단비를 내려 주면서 1970년 박종화를 밀어내고 이사장으로 앉으면서 문인협회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조연현의 바둑 실력이다. 조연현은 "단 하루도 바둑을 안두는 날은 거의 없다"고 글을 적을 정도이다. 6급 정도의 실력인데 잡지사나 학교 어디를 가도 바둑판 앞에 앉아 있었다. 바둑 급수는 약하지만 그의 선거 급수는 9단쯤이 아니었던가 싶다.
왜냐하면 그가 73년 김동리와 대회전을 치르기 위해서 71년부터 포석(布石)을 하고 있었던 것을 김동리는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조연현은 정초 이석, 문덕수, 신세훈을 불러 시인 단체를 새로 만들라고 한다. 1957년 한국시인협회가 결성되어 잘 해오고 있는 터에 문예지 주간이 왜 시인 단체가 필요했을까. 그 까닭은 이렇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단 인구에서 시인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한국시인협회는 초대 대표간사 유치환에서 신석초, 조지훈, 박목월이 회장을 맡아오고 있었다. 목월은 김동리와 동향으로 조연현으로는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보고 시인 단체를 새로 만들어서 시인들의 표를 얻겠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시문학』의 창간이었다. 『현대문학』 하나로는 팽창하는 시단 인구를 다 감당할 수 없어서라면 설득력이 있겠으나 71년 8월에 창간하고 선거에서 이긴 뒤인 73년 9월에 내놓았으니 문협 이사장을 위한 득표 전략의 하나임이 명백해진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큰 문단적 사건이지만 이럴진대 『현대문학』 주간의 칼자루를 쥐고 전국 방방곡곡의 문인들 하나하나에 어떤 당근과 채찍이 오고갔는가는 짐작할 일이다.
1973년 1월 27일, 서소문 명지대 대강당에는 6백53명의 문인들이 운집해서 투표를 하고 있었다. 중풍으로 병석에 누운 칠순의 김광섭이 간신히 부축을 받아 투표장까지 나왔으니 얼마나 많은 문인들이 문단의 두 세력에 휘둘리고 닥달질을 당했을까. 이희승, 김팔봉, 부산의 김정한도 투표를 했다. 결과는 김동리 3백21표 대 조연현 3백12표, 9표차로 김동리가 앞섰으나 과반수 미달로 재선거를 치러야 했다.
2차 선거날은 48일 뒤인 3월 17일 숙명여대 강당에서 열렸다. 1차 선거에서 박빙으로 나타났으니 2차전으로 가는 약 50일은 걷잡을 수 없이 혼탁해 있었다. 인맥과 학맥이 얽히고 거기에 체면과 인정이 얽혀서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고 있었다.
그 싸움에 나도 희생양이 되고 있었다. 나는 학교 은사인 김동리를 처음부터 지지하고 나섰으니 상대 쪽에서 아예 치근대지 않아서 좋았다. 그런데 1차 선거를 앞둔 2주 전쯤 이문구가 나를 찾아왔다. 서라벌예대 3년 후배인 그는 동향이고 해서 나를 따르는 편이었다. "선배님이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하고 내민 말인즉 시조분과위원장에 나서 달라는 것이었다. 장순하, 이우종 두 사람이 시조 분과에 나섰는데 어찌된 셈인지 두 사람이 모두 조연현 지지라는 것이었다. 다른 분과는 김동리 대 조연현으로 나뉘어서 분과회장을 놓고 뛰고 있는데 시조만이 이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이 오래 전부터 표를 다져놓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리 선생을 위하는 일이라서 거절 못하고 뒤늦게 뛰어들고 말았다. 『신춘시』 동인으로 시 쓰기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시조분과위원장에 당선되는 바람에 그쪽으로 몰리는 바 되었다.
2차 대회에서는 다수결로 이사장을 선출하기로 했다. 결과는 김동리 2백83표, 조연현 3백44표로 조연현의 승리였다. 9표가 모자랐던 조연현의 필사항전의 결과였다. 1차에서 조연현이 앞섰더라면 결과는 또 달랐을 것이다. 믿었던 김동리의 패배로 선거가 끝나, 부이사장에 당선한 김현승을 필두로 신석정, 이호철, 한말숙, 김승옥, 염무웅, 김현 등이 줄줄이 문협 탈퇴 선언을 하고 문협 해체론까지 나오는 등 후유증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상처는 김동리와 조연현의 대결이 문단을 두쪽으로 갈라놓았을 뿐 아니라 적과 동지로 나뉘어 불신과 반목을 떠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근배
글 / 이근배_시인, 재능대 교수. 1940년생.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노래여 노래여』『한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