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봄, 칸나 알뿌리를 화분에 심었다. 정말 싹이라도 돋을까 의심이 될 만큼 볼품 없이 생긴 작은 알뿌리를 흙으로 덮고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놓아두었다. 별다른 보살핌도 없이 가끔씩 뿌려주는 물만 먹고도 칸나는 아무 탈 없을 싹을 틔웠다. 지금은 제법 서늘한 그늘을 드리울 정도로 자란 큰 잎사귀들을 달고 있는 칸나를 보며 나는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든다. 뭔가 믿음을 주기에 부실해 보이던 그 작은 알뿌리가 과연 눈이 아리도록 붉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까 하는 의문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오늘도 칸나의 그 화려하고도 섬뜩한 붉은 꽃봉오리를 기다리고 있다.
글을 쓴다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꽃도 잎도 보이지 않는,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민둥산이의 알뿌리인 것을 땅에 심고 그것이 싹을 틔우고 자라 나중엔 아름다운 꽃이 필 때까지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 일. 『꽃이 있는 풍경』을 쓰는 내내 그런 마음이었고 책이 출간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그 마음은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싹이 나오기도 전에, 꽃이 피기도 전에, 내가 희망의 알뿌리를 심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까봐 두렵다. 오랜 밤과 낮을 가슴 졸이며 끌어안고 있었던 라우렌시오와 빈첸시오, 그리고 마르셀리나의 절망과 고뇌, 그 눈물을 벌써 잊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독자들은 언제나 작품 속 주인공과 작가의 삶이 어느 정도 공통 분모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혹시 실제 있었던 일 쓰신 것 아닌가요? 어느 독자의 질문에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건 전부이면서도 결코 전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꽃꽂이를 배우러 문화센터와 꽃시장으로 열심히 뛰어다녔던 시절이 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쓴 커피로 속을 채우며 손가락에 경련이 일어나도록 자판기를 두들겨대야 했던 시간들로부터 영원히 달아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적한 길모퉁이의 카페처럼 예쁘고 아담한 꽃집 주인이 되어 누군가의 가슴에 안길 꽃다발을 만들며 사는 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꽃 이름과 여러 가지의 화형들을 익히며 꽃을 가슴에 안고 다니던 어느 날, 깊은 우물 속에 갇혀 윙윙거리고 있는 바람소리처럼 그들의 존재가 내 잠든 의식을 뒤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푸른 이끼가 돋고 검은 물때가 낀 우물 속 돌멩이들처럼 그곳에 남아 세월을 견뎌내고 있는 라우렌시오와 마르셀리나의 사랑이, 빈첸시오의 절망과 고뇌가, 장남인 아들을 사제로 바치고 실명한 한 어머니의 희생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눈 앞에 있던 꽃가위와 화병들을 다용도실 깊숙이 집어넣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내 가슴 속에 민둥산이 같은, 끝까지 살아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었던, 보잘 것 없는 알뿌리를 하나 심기 시작했다.
『탈무드』를 보면 세상에서 강한 열두 가지 것들에 관한 얘기가 있다. 그 첫째로는 돌이 있다. 돌은 쇠에 의하여 잘려지고, 쇠는 불에 의해 녹아버린다. 불은 물을 이기지 못하고 구름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또한 구름은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이끌려 다닌다. 그러나 바람은 인간을 날려 버리지는 못한다. 인간은 공포에 의해 비참하게 위축되고 그 공포는 술에 의해 사라진다. 술은 자고 나면 깬다. 잠은 죽음만큼 강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죽음조차도 사랑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강한 열두 가지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보다 더 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닐까. 이 책의 서문에서 나는 사랑이란 최후의 용서라고 말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끝내 용서하는 것, 이 세상 누구도 해낼 수 없는 그 용서를 나만이 해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꽃이 있는 풍경』 속의 주인공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최후의 정점을 향해 자신의 모든 고통과 절망을 껴안고 치열하게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열망과 희생과 인내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윌리엄 포크너의 말처럼 이 모든 고통을 견뎌내는 힘이 있는 한, 인간은 불멸할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다리고 있다. 땅속에 묻힌 알뿌리가 자신의 살을 찢어 싹을 틔워내고 열망의 꽃망울을 터트리듯 내 삶에서 뜨겁게 작열할 고통의 꽃망울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