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명작을 찾아
눈(雪)과 눈(目), 서로 쳐다봄과 섞임의 미학

- 서정주의 「눈」

  • 숨은 명작을 찾아
  • 2003년 가을호 (통권 9호)
눈(雪)과 눈(目), 서로 쳐다봄과 섞임의 미학

- 서정주의 「눈」

        눈
 

그때에도 나는 눈을 보고 잇섯다.

솔나무 나막신에 紅唐木 조끼 입고

생겨나서 처음으로 歲拜가는 길이엿다.

 

그때에도 나는 눈을 보고 잇섯다.

萬歲부르다가 채찍으로 어더 맛고

학교에서 쪼껴나서 帽子 벗어 팽개치고

홀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엿다.

 

그때에도 나는 눈을 보고 잇섯다.

風月 팔아 술 마시고

좁쌀도 쌀도 업는 주린 안해 겨트로

黃土재의 언덕을 넘어가는 길이엿다.

 

시방도 나는 눈을 보고잇다.

거느린것은 한떼의 바람과

形體도 업는 몃사람의 亡靈뿐,

인제는 갈데도 올데도 업는

미련한 미련한 韻律의 實務曺長이여.

 

눈을 보러 눈을 보러 온것이다. 나는

해마다 내려서는 내아페 싸히는

하이얀 하이얀 눈을보려고

까닭업는 이땅을 다니러 온것이다.  

      (『평화신문』, 1948년 2월 24일)

 

  운명에의 자각은 자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현듯 그리고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준비되지 않은 '어쩔 수 없는 것'과의 대면은 자아의 내면을 미래의 황홀보다는 공포로 몰아가기 십상이다. 체념과 순응은 자아가 운명을 길들이는 동시에 거기에 깃드는, 그럼으로써 주체의 안정과 보존을 도모하는 일종의 방호벽이자 자구책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끊임없는 허무의 벼랑 속에서 삶에 대한 의욕을 스스로 키우고 다져야 하는 자기성찰과 결단이 항상 요구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미당 시는, 동양적 영원성에 극적으로 귀향함으로써 안정적인 내면과 절제 있는 리듬에 안착하게 된다고 보통 말해진다. 그에 따른 자아의 안정과 성숙은 『귀촉도』(1948)의 곳곳에 '크낙한 꽃'과 '푸른 숨결', '아늑한 하늘' 같은 은은하고 명랑한 이미지의 빈번한 출현을 가져오게 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즈음의 미당 시에서 처량하고 축축한 물기를 찾아보기는 거의 어렵다. 그러나 이런 명랑성의 시학이 곧잘 지적되곤 하는 미당의 세계와 삶에 대한 낙관적 이해와 대긍정을 직접 드러내는 알리바이일 수는 없다.   

  여기 소개하는 「눈」은 『평화신문』에 발표되었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미당의 공식적 시사에는 등기되지 못한 일종의 버려진 시이다. 그러나 「눈」은 저 명랑성의 시학이 시인 자신에 대한 냉정한 응시와 성찰을 전제로 한 것이며 또한 그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증거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눈」의 '눈'은, 「국화 옆에서」의 '무서리'를 제외한다면, 미당 시에서 그때까지는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차갑고 딱딱한 '물'에 속한다. 미당은 자기 삶의 주요한 고비와 전기마다 '눈'이 내렸으며 또한 그것을 착잡하게 지켜봤음을 은근히 고백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결코 녹록찮았을 고난과 결단의 삶과 세월을 환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자연의 이치에 따를 뿐인 '눈'의 변함없는 속성을 고려한다면, 지켜본 자는 시인이 아니라 '눈' 쪽이다. 그런 점에서 '눈'은 자아의 삶에 대한 성찰을 매개하는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그 성찰을 수행하는 또 다른 주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아의 눈(目)과 자연사물 눈(雪)은 서로를 뒤바꿔 입음으로써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객관화하고 역사화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서정주 시 전체를 대표할만한 절창 「내리는 눈발속에서는」을 옆에 놓을 때 완성되는 것이다.

  「눈」의 경우, '나'와 '눈'은, 비록 서로의 삶과 역사에 대한 증언자로서 매개되어 있긴 해도, 서로가 서로를 냉정히 지켜보는 타자의 관계에 아직은 머물러 있다. 그러나 6·25 전란 중에 씌어진 「내리는 눈발속에서는」에 이르면, '눈'은 시인에게 단순한 응시의 대상이 아니다. '눈'은 자아의 운명에 대한 전적인 투기(投企), 다시 말해 운명의 전폭적인 수용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탈바꿈된다. 미당이 "내리는 눈발속에서" 보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이 아니다. 그 대신 온갖 새들과 "낯이 붉은 處女아이들", 작고 큰 '이얘기들', '청산'은 물론, "운명들이 모두다 안끼어 드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봄'에서 보고 듣고 만짐으로의 감각의 전이와 확장은 시인이 언뜻 엿본 삶의 구경(究竟)을 생생하게 부조한다.

  이런 사실을 참조하면, 미당의 해방기 시편에서 생뚱맞은 감이 없잖던 「풀리는 한강가에서」(『신천지』, 1948. 3)의 '무슨 서름'과 '무슨 기쁨'에 대한 동시적인 '바래봄'의 요청 역시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자아에 집중된 「눈」의 시선이 주위의 세계로 넓어질 때 이 시의 탄생은 필연에 가깝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자아의 시야 확장이 언 물(얼음)을 '풀리게' 할뿐더러,  차갑기 그지없는 "하이얀 눈"을 '운명'마저 안아 거두는 "폭으은히 내리는 눈발"로 새롭게 탈바꿈시킨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미당은 미연에 들이닥칠 이런 운명의 장관과 황홀을 예감하고서 「눈」에 "해마다 내려서는 내아페 싸히는/하이얀 하이얀 눈을보려고/까닭업는 이땅을 다니러 온것이다"라고 아주 담담하게 적었는지도 모른다.

 

최현식
글 / 최현식_평론가, 연세대 강사. 1967년생. 평론집 『말 속의 침묵』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