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은 네 살이 되던 1947년 영등포에 정착한다. 만주에서 난 그가 해방과 더불어 모친의 고향인 평양으로 들어왔다가 월남한 길이었다. 그에게 정착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베트남, 해남, 제주도, 광주, 평양, 베를린, 뉴욕, 공주 교도소, 예산, 일산…… 올해로 회갑을 맞는 그의 인생여로를 얼추 헤아려 보아도 그는 정주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작가 연보에 영등포 시절을 무슨 희망사항처럼 ‘정착’으로 적고 있다. 황석영은 1959년까지 12년 동안 이곳에서 자랐다. 중간에 피난생활이 있기는 했어도 유년시절을 보낸 영등포의 십여 년은 그나마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긴 정주의 시간이었다.
당시 영등포는 일제가 세운 국내 최대의 공업지대였다. 한때는 시흥군의 군청소재지였고 서울과 용산의 채소 공급지였던 영등포는 1912년에 조선피혁공장이, 1919년에는 경성방직공장이 세워진 이래 꾸준히 산업단지로 성장하다가 일제의 구획정리사업을 통해 1940년께에는 조선 최대의 근대공업지대로 탈바꿈했다.
이처럼 영등포는 아시아에서 서구 근대화를 선취한 일제가 세운 도시였다. 황석영은 1980년대 말 동경의 변두리 니시고야마(西小山)를 방문했을 때 어린 시절 자신이 보고 자란 영등포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베이커리며 우체통 따위가 1950년대 영등포의 풍경들과 너무나 흡사했다는 것이다. 당시 영등포에는 철도청 서울공작창이 있었고 고려방직, 제일방직, 전남방직의 방직공장들과 경기염직, 한국인쇄, 동서맥주, 중앙주조, 조선타이어 따위의 대규모 공장이 밀집한 곳이었다.
폐허, 그리고 근대의 아이
황석영의 가족이 정착한 영단주택은 이때 세워진 취락이었다. 영등포역을 나서 왼편으로 문래동까지 공장지대였고, 그 외곽인 지금의 영등포동이나 당산동 일대에 영단주택이 건설되었다. 지금도 골목 속에 드문드문 남아 있는 영단주택은 나무대문에 붉은벽돌과 잿빛 콘크리트 기와를 한 아담한 가옥이었다.
해방 공간의 영등포는 격동의 현대사 맨 가운데에 있었다. 황석영의 가족이 그러하였듯 해방과 더불어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지에서 동포들이 대이동을 하였다. 영등포는 귀국 동포들의 정착촌이나 다름없었다. 황석영은 선전문구가 어지러운 공장의 담벼락, 검은 먼지가 이는 공단길, 도시락을 들고 출퇴근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적색노조의 10월 파업 등을 보고 자랐다. 또한 영등포역에 닿은 기차는 남도에서 올라오는 이농민들을 끊임없이 토해 놓았다. 역 주변에는 매음굴이 형성되고 사람들의 아귀다툼과 근대적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황석영의 문학적 성과 중 하나는 폐허의 서정성을 미학으로 획득한 점일 것이다. 붉게 녹이 슨 고철더미와 거품을 내며 썩어가는 웅덩이, 철길 옆에 누운 기차 화통에서 자라는 까마중 등 일찍이 우리 문학에서는 낯선 폐허의 물상들이 그의 손끝에서 서정성 짙은 풍경으로 태어났다. 근대 산업화의 산물인 이런 물상들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은 사회학적 상상력으로도 뻗어나갔다. ‘잡초’나 ‘배운 사람’, ‘장사(壯士)’ 등의 용어가 주는 사회적 의미와 정서적 환기력까지도 포착해내게 하였을 것이다. 폐허의 시간 동안 자신을 ‘근대의 아이’로 키워준 영등포를 그는 ‘고향’이라 여기고 있다. 아직도 그는 영등포의 동무들과 뛰어 놀던 꿈을 아련한 느낌으로 꾸곤 한다고 하였다.
세 겹의 시간이 공존하는 영등포
초기 단편「잡초」,「아우를 위하여」는 최근 책으로 출판된 연작 『모랫말 아이들』과 더불어 영등포에서 보낸 작가의 유년시절이 생생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들에는 모두 ‘수남’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 작가의 분신으로 등장한다.
‘그해 여름의 땡볕을 생각하면 지금도 혀뿌리에 끈끈한 침이 엉겨붙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문장으로 시작되는 단편 「잡초」는 수남이 9․15 서울 수복 후 피난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목격한 주검들과 연결되고 끝내 죽음에 대한 한 인식을 드러내게 된다. ‘지금도 내게는 죽음이 뜨거운 뙤약볕과 직결되어 있고 점액질과 같은 끈적한 느낌 가운데 있는 듯 여겨진다.’
장마가 끝난 팔월의 땡볕 아래를 나는 수남이라는 그 아이의 손에 끌려 걷는다. 영등포는 조락과 신생의 이미지가 뒤섞여 있는 풍경이었다. 역 부근에는 백화점이 세 개나 들어서고 상가들이 한창 개축 중이었으며, 멀리 외곽으로 고층아파트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역을 벗어나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붉은 벽돌담과 잿빛 지붕의 경방공장이, 그리고 쇳물냄새 물씬한 작은 철제 임가공 공장들이 즐비하다. 무슨 영화 세트장을 연상시키는 건물들이 일제시대의 모습으로, 혹은 50년대의 얼굴, 70년대의 얼굴로 남아 있다. 두 평도 채 안 되는 구석진 공장에 밀링머신 하나를 두고 나사를 깎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하루 방값 오천원 하는 노숙자 쪽방들도 있다. 아마도 세계에서 제일 많은 고물을 실을 수 있을 것 같은 수레가 좁은 골목을 지나가기도 했다. 연탄 창고와 수레가 아직도 남아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황석영이 자랐다는 낮은 지붕과 붉은 벽돌담의 영단주택들이 허물어져가는 풍경으로 남아 영등포의 가장 깊은 시간을 증언한다. 그곳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을 아무나 붙들고 이야기를 듣노라면 간단치 않을 삶의 역정이 흘러나올 듯싶다.
황석영의 가족이 처음 정착한 집은 영등포시장로터리에서 당산역으로 빠지는 도기장길 부근 한길에 면해 있었다. 어머니는 방직공장의 사무원으로 출근을 하고, 숫기 없는 황석영은 동무들과 어울려 샛강이며 쌍성루, 안양천으로 동무들과 놀러 다녔다. 어린 그의 아침잠을 깨우는 소리는 샛강 너머 여의도 비행장에서 들려오는 비행기 시동 거는 소리였다. 국회의사당이 들어선 그 어름에 예전에는 양말산과 샛강이 흐르고 있어서 가을의 정취를 맛볼 수 있었다. 황석영은 그곳에서 동무들과 메를 캐고 송사리를 잡았으며 둑을 태우며 불놀이를 했다. 이제는 올림픽대로와 노들길이 가로막고 너른 습지의 일부만이 공원부지로 들어가 그때의 자취를 전해준다.
당산 쪽으로 더 내려가서 있었던 중국요릿집 쌍성루. 그 2층에는 미군 댄스홀이 생겨서 득실거리는 양공주들이 아이들의 눈요깃감이 되었다. 때로는 쌍성루 뒤편 공터에 곡마단과 약장수의 가설극장이 세워지기도 했다. ‘조국의 어머니’라든가 ‘자유만세’, ‘아리아 공주’, ‘자명고’가 상영되거나 공연되었다는 영보극장(경원극장의 전신)과 연흥극장이 아직도 남아 영업중이다.
황석영은 영등포초등학교를 다녔다. 집 근처에 영중초등학교가 있었지만 해방 후에 개교한 학교였다. 영등포초등학교는 문래동 역마길변에 깊이 들어앉아 있었다. 제분회사의 뒷문으로 해서 철길을 따라 군대 피복창을 가로질러 공장의 벽돌담 아래로 나서는 지름길로 그는 학교를 다녔다. 황석영이 입학하던 날 비가 내렸다고 하는데 필자가 찾아가는 길에도 소나기가 내렸다. 교정에 가득 싱싱한 비린내를 풍기던 버드나무는 자취가 없고 담 너머로 지친 기차만이 예전처럼 지나갔다. 황석영이 전쟁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많은 선생님들과 동무들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까지 나는 죽음을 보지 못했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가고 음울한 포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밖에 난리를 실감하지 못했었다. 아이들은 어른에 보호되어 있으며, 그런 형편에 대해서 전혀 무방비하고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참하게 파괴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성장한 뒤에도 어른들이 그때의 난리 얘기가 나오면 밤새는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체험담을 엮어나가는 많은 경우를 보았다. 그런데 우리 또래들은 대개는 몸이 불편할 경우 그 시절의 경험을 악몽으로 꾸는 것이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쳐 탈향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영등포를 잊지 못한다. 먹고살기 힘든 고향을 떠나 도시 근로자로 식모로 상경하는 사람들에게 영등포역은 서울의 입구였다. 영등포를 거점으로 구로며 난곡이며 화곡동에 그들은 뿌리를 내렸다. ‘조국 근대화’의 격랑에 휩쓸린 1960년대 말 이후의 영등포를 황석영은 「영등포 타령」이라는 작품으로 그리다가 『장길산』 연재로 아깝게 중단한 바 있다.
다행히 그는 방북 중에 전쟁 전 영등포에서 기관사로 근무했다는 철도원 출신의 한 노인을 만났다. 서로 앞다투어 영등포의 기억을 꺼내던 두 사람은 영중초등학교 화장실 화재 사건을 올렸다. 화장실 변이 끓어서 그 일대에 1주일 동안 냄새가 진동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그 일화를 서로 확인하며 반세기에 육박한 시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노인은 아들과 손자까지도 철도원이었다. 황석영은 그 철도원 삼대의 이야기를 앞으로 소설화할 계획이다. 당대의 걸출한 작가를 키운 근대도시 영등포가 다시 한번 우리 문학의 중심지로 부활할 것이다. 부산에서 출발한 히카리호, 아카스키호, 해방차호 하는 그의 급행열차는 영등포에서 숨을 고르고 압록강 철교를 건너서 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지는 중국 안동(丹洞)까지 달려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