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처음으로 한국문학제가 열렸다. 러시아의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와 재단이 공동주최하고 한-러간 민간문화교류단체인 삼일문화원이 주관한 이번 한국문학제는 '처음'이라는 것 외에 반세기가 넘도록 단절되어온 한국과 러시아간의 문학 교류를 정상화하고 본격적인 교류의 길로 이끌었다는데 의의가 깊다. 푸슈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체홉, 고리키에 이르는 세계적인 문호들을 낳은 러시아 문학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세계문학의 중심에 위치했다. 특히 러시아 문학은 한국 근대문학 초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활발히 수용되었다. 안톤 체홉을 정점으로 19세기말에 꽃피운 러시아 단편소설은 김동인, 현진건 등으로 대표되는 1920∼30년대 단편문학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던 러시아와 한국은 현대사의 굴곡으로 오랫동안 서로의 관심권 밖에 밀려 있었다. 이번 한국문학제는 한-러간의 오랜 공백을 뛰어넘어 새롭고 본격적인 문학 교류의 새장을 연 계기로 평가받고 있다.
6월 5일부터 11일까지 러시아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등 2개 도시에서 열린 "모스크바 한국문학제"는 한국문학 학술대회, 러시아어역 김소월 시선집 『진달래꽃』 출판기념회 및 한국문학의 밤, 한국문학 특강, 러시아 작가들과의 교류 등으로 진행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에드왈드 발라쇼프(시인, 고리키문학대 교수), 표트르 레제킨(소설가), 아나톨리 김(소설가), 니콜라이 니쿨킨(평론가), 이라니 카사트키나 리보브나(평론가, 모스크바국립대 교수), 김려호(평론가, 고리키문학연구소 교수) 등 여러 문학인들이 참여하였고 한국에서 시인 정현종(연세대 교수), 평론가 유종호(연세대 교수), 문학연구가 조동일(서울대 교수), 러시아문학자 김현택(한국외대 교수), 시인 곽효환(대산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등이 참여하였다
한국문학 학술대회 (6월 5일,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 강당)
“러시아와 한국, 새로운 문학 지형을 향하여”를 주제로 열린 한국문학 학술대회는 양국의 작가, 평론가, 학자를 비롯하여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문학과 러시아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논의의 깊이를 더하는 장이었다.
한국에서는 유종호 교수가 "국가간 문화 교류를 위하여 - 특히 러시아와 관련하여"라는 발표로 양국 문화 교류의 흐름과 현황 및 이번 한국문학제의 의의를 정의하였고, 조동일 교수는 "세계문학사와 한국문학사"를 통해 세계문학사의 이해의 틀 속에 구비문학의 변천, 공동문어문학과 민족어문학, 근대 민족문학의 특성 등에 대해 고찰했다. 정현종 시인은 "시에 대한 몇가지 생각"을 통해 특유의 시론을 산문으로 펼쳐 보였다. 김현택 교수는 "한국에서의 러시아문학"을 통해 러시아문학과 한국문학과의 영향 관계를 분석하였으며, 곽효환 재단 문화사업팀장은 "한국문학 해외소개의 현황"에서 한국문학 번역의 역사와 러시아 소개 현황을 진단했다.
러시아측에서는 한국계작가 아나톨리 김이 "한국문학에서 주인공의 개성화 - 춘향전을 중심으로", 니콜라이 니쿨틴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 연구원이 "러시아에서 한국의 구비문학 - 가린 미하일로프스키의 기록을 중심으로",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인 김려호 교수가 "김소월 서정시와 '世界苦'의 문학", 소설가 표트르 레지킨이 "최인훈 소설 『광장』의 사회·도적적 실험", 모스크바국립대의 이리나 카사트키나 교수가 "한국 중세기 여류 시인들의 시조", 니 나탈리야 동방학연구소 연구원이 "세계 서정시 장르 속의 한국시조" 등에 대해 발표했다.
소월시선집『진달래꽃』 출판기념회 및 한국문학의 밤 (6월 6일,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 강당)
러시아어 번역 김소월 시선집 『진달래꽃』의 출판기념회를 겸해 열린 한국문학의 밤은 한국문학을 몸으로 전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자리였다. 『진달래꽃』의 출판기념회로 진행된 1부는 사업책임자인 이형근 삼일문화원 원장의 인사, 유종호 교수의 소월 시의 세계에 대한 소개, 그리고 역자인 김려호 교수와 러시아 시인 에드왈드 발라쇼프의 "내가 읽고 느낀 김소월의 서정시"라는 간단한 발표로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려호 교수는 "사랑했으나 지금은 떠나가려는 님을 위해 질책도, 푸념도 없이 물러서는 숭고한 정신의 표현인 '진달래꽃'을 중심으로 한 소월의 시 세계는 러시아 문학을 세계적으로 꽃 피운 푸슈킨의 시 세계와 상통한다"고 소개하고 특히 "소월이 남북에서 모두 민족시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고통을 수용하는 숭고한 시 세계와 운율에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어판 『진달래꽃』에는 소월의 시 88편과 작품 해설이 수록되었다.
2부에서는 소월 시낭독과 가곡, 피아노와 바이올린 협주 등이 이어졌다. 특히 러시아어 시집을 이미 출판한 정현종 시인의 자작 시 낭독에서는 '앙코르'가 터져 나오는 등 커다란 반응이 있었다.
한국문학 특강(6월 7일, 상트 페테르부르크 동방학대학)
상트 페테르부르크대학에서 열리는 한국문학 특강은 한국학자와 전공학생 및 고려인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모스크바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을 중심으로 유종호 조동일 김려호 교수의 강연과 정현종 시인의 작품 낭독으로 진행되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동방학대학은 한국학과의 역사만도 60년이 넘는 러시아 내에서 동방학 연구에 가장 오랜 역사와 연구성과를 가진 대학이다.
이밖에도 참가한 한국 작가들은 정태익 주러시아 한국대사의 초청으로 한-러작가들의 만남을 비롯하여 러시아 작가들과의 교류를 비롯해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 등을 예방하였다.
이번 행사를 마치고 유종호 교수는 "러시아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러시아 사람들의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고, 한국문학에 대한 실속있는 연구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아울러 한국의 국운이 뻗어 나가고 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고 소감을 밝혔고 정현종 시인은 "정치·경제 교류도 물론 중요하지만 문학 작품을 통한 사람과 사람, 가슴과 가슴의 교감이 우선되는 정다운 사귐이 바탕이 돼야 할 것임을 이번 행사를 통해 실감했다"고 말했다. 조동일 교수는 "토론 시간 부족이 아쉬웠지만 양국의 대표적인 기관이 공동으로 준비하여 수평적이고 내용있는 학술문화 행사의 이상적인 전범을 제시했다. 이런 바람직한 교류가 지속되고 확대되기를 바란다"고 평했다.
한편 러시아측으로부터도 양국 간의 정례적인 문학교류 행사를 제안받기도 했다.
러시아문학은 전세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담고 있다
-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 알렉산드르 쿠젤린 부소장 인터뷰
재단과 공동으로 "모스크바 한국문학제"를 개최한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는 러시아문학 이론의 토대 위에 세계 각국의 문학을 연구하는 러시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국립 문학연구기관이다. 1932년 설립되어 러시아 형식주의와 구조주의 이론의 산실이었으며 사회주의 시절 줄곧 러시아문학 연구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8권으로 된 『세계문학사』를 발간하기도 한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의 부소장이자 러시아과학아카데미 회원인 알렉산드르 쿠젤린 부소장을 만났다.
-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는 어떤 기관인가.
▶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는 지난해 창립 70주년을 맞았다. 1920년대 고리키가 세계문학출판사를 구상한데서 출발하여 세계문학연구소로 발전한 것이다. 러시아에서 존경받는 문학연구자들이 역대 소장을 맡아왔으며 동방에서 서방에 이르는 전세계문학을 관심과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세계문학사 연구는 19세기 초 괴테 문학 연구를 중요한 기점으로 보고 있다. 당시 세계문학은 괴테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후 세계 진보사상을 집약한 연구논문들이 등장했다.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에서 펴낸 『세계문학사』는 이 연장선상에 있다. 그밖에 프랑스에서도 완성하지 못한 5권 분량의 『프랑스문학사』 발간을 비롯하여 민속구비문학 연구, 유라시아 구비문학 연구, 문학미학 연구 부문에 상당한 성과를 가지고 있다.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문학 연구는 별도로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과가 크다. 물론 이 가운데는 사회주의 시절 이데올로기로 굴절된 낡은 논문들도 있지만 이를 부끄러워하기보다는 당시 역사의 흐름을 반영한 하나의 결과물로 여기고 있다.
- 러시아문학이 서구문학과 다른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가.
▶ 러시아문학에는 민족정서인 타스카(우수 혹은 향수)를 바탕에 두고 있으며 무엇보다 전세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담고 있다. 푸슈킨이나 톨스토이 등은 서방 뿐만 아니라 동방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작품 속에 담았다. 이들의 작품이 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까지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 19세기 초까지 러시아문학은 서구유럽 사회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문학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있는가.
▶ 19세기 초까지 유럽이 러시아문학을 잘 모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무렵 러시아문학은 부흥기를 맞는다. 푸슈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과 같은 뛰어난 작가들이 등장하였고 푸슈킨이 괴테나 말라르메 등과 교류하며 서로 깊은 인식을 하게 된 것이 거름이 되었다. 위대한 작가와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서 참된 가치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러시아문학이 알려진 것은 러시아의 노력이라기보다는 유럽사회가 러시아문학의 가치를 인식한데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가 지향하는 주요과제는.
▶ 러시아문학 자체에 대한 연구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푸슈킨문학연구소의 몫이고 우리는 세계문학사 속의 러시아문학의 의의를 찾고 있다. 현재 우리의 가장 큰 화두는 '20세기 러시아문학은 무엇인가'이다. 즉 '20세기 러시아문학사' 편찬이 가장 큰 과제이다. 구소련 붕괴 후 20세기를 새롭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선 구소련 시기에 많은 작가들이 해외로 망명하였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들의 문학을 러시아 문학사에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가 과제이다. 동시에 이 시기에 러시아 내에서 이루어지고 발전해 온 문학에 대한 논쟁이 일고 있다. 망명작가들의 문학과 러시아 내에서 이루어진 문학, 이 두 흐름을 담아낸 20세기 러시아문학사를 10년 내에 발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연구소 내에 20세기문학부를 별도로 두고 있다. 그밖에 톨스토이의 새로운 전집을 120권으로 펴내는 것과 고골리 전집을 새로 발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20세기 작가들의 논문집을 발간하고 있으며 러시아 문학관련 DB도 구축하고 있다.
-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의 성과 가운데 하나는 『세계문학사』발간이다. 이 책에 대한 반응과 스스로의 평가는.
▲ 이 책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9권이 준비되었으나 구소련의 붕괴로 발간하지 못했다. 이 책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고 있으며 세계문학사의 관련 논문집에서 보충해 나갈 생각이다. 한국에서 조동일이 『세계문학사의 허실』에서 이 책을 언급한 것도 잘 알고 있다. 그가 하고 있는 『세계문학사의 전개』등의 작업은 매우 인상적이다.
- 러시아 내 한국문학연구 현황과 앞으로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에서 한국문학연구 계획이 있는지.
▲ 한국문학사는 세계문학사에 아직 마땅한 위치를 아직 찾지 못했다고 본다. 러시아에서는 1950년 『한국고전시문학』을 펴내는 등 고전문학에 대한 연구는 일부 있지만 현재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부합하는 한국문학 연구자는 없다. 이번 소월 시선집 『진달래꽃』 발간을 계기로 러시아에 한국문학 소개가 활성화되고 번역자와 연구자 양성도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기회가 된다면 조동일의 『한국문학통사』가 러시아에 소개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