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유이민의 비극적 삶을 직핍한 북방시편들의 울림 - 한국 근대문학과 ‘북방적 상상력’

  • 기획특집
  • 2003년 가을호 (통권 9호)
* 유이민의 비극적 삶을 직핍한 북방시편들의 울림 - 한국 근대문학과 ‘북방적 상상력’

 

1

최근 헌책점에서 구한 일본 사진집 『망향(望鄕) 만주(滿洲)』(東京; 國書刊行會, 1980)를 들춰 보다가 사뭇 착잡한 소회에 빠진 일이 있다. 그림에 곁들여진 글의 필자 기타고지 다케시(北小路健)는 1920년 소학교 2년생으로 교사인 아버지를 좇아 따렌(大連)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중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동경고사(東京高師)를 졸업하고 재차 도중(渡中), 2년간의 패잔(敗殘) 세월을 더한 끝에 1947년 ‘재만(在滿) 27년 생활’을 마감한 특이한 경력자이다.

위태국가(僞態國家) 만주국(1932~1945)의 번성을 또렷한 예술적 형상으로 아름답게 각인한 이 질 좋은 흑백 작품집에는 일본제국주의 중국침략의 전형적인 물적 표상들이 일목요연하게 구성되어 있다. 따렌 한복판에 자리한 ‘만주의 대동맥’ 만철(滿鐵) 본사의 우뚝한 자태, 현지 유이민으로 영락한 황해도 재령군 나무리벌(餘勿坪) 농민의 한스런 가락 속에 끼여든 “못살 고장”(김소월, 「나무리벌 노래」, 1924) 봉천(奉川; 현 審陽) 신사(神社)의 자못 고아한 모습, 신경(新京; 현 長春)에 새로 건설한 관동군사령부․만주중앙은행 및 만주국 국무원과 하얼빈 쑹화장(松花江)에 정박중인 만주국 해군포함 등의 무력적 위용이 우선 두드러진다. 그런가 하면 경도선(京圖線; ‘新京―圖們’ 철도) 연변을 수놓은 휘황한 야생화, 흑룡강 유빙(流氷)의 이색적 풍광, 등짐 나르는 러어허(熱河)의 낙타떼, 몽고 대초원의 광막함, 하얀 자작나무 숲으로 뒤덮인 북만주 대흥안령(大興安嶺)의 낭만적 정취, 직업적 혁명가 아버지와 1919년을 전후하여 한때 머물러 살았던 시인 안용만의 유년기 요람이기도 했던 중국 서북부 소만(蘇滿) 국경도시 만쩌우리(滿洲里)의 강렬한 이국적 정취 등도 여기서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진집의 압권은 따로 있다. 월북시인 조영출(趙靈出)에 의해 “육로 이천리를 한밤에 주름잡고 / 북행하는 히까리 얼음꽃”(「북행열차」, 1936)이란 시적 표현을 얻은 바 있는, 부산(釜山)―신경(新京) 간을 질주하는 특급열차 ‘히카리’(ひかり)의 화려한 전망차 내부, 압록강철교를 통행하는 긴 흰옷 행렬과 그 밑 뗏목 위에서 빨래하는 조선여인들의 고달픈 모습, 황량한 도문의 조선인 집거지, 드넓은 고량(高粱; 수수) 농장과 소년노동자의 쓸쓸한 웃음 등이 곳곳에 명료하게 박혀 있는 것이다.


江南은

이름이 좋아도 몹쓸 귀양살이

원숫놈의 北海道移民이 또 들어온단다

- 이설주, 「강남으로 가는 이민」 부분, 『방랑기』, 1951.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쟈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북어쪼가리 초담배 밀가루떡이랑

나눠서 요기하며 내사 서울이 그리워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 간다

- 이용악, 「하나씩의 별」 부분, 1945.



일제 무장이민에게 떠밀려 천신만고 끝에 개간한 강남(“길림성에서도 가장 험난한 궁벽지” - 시인 原註) 땅을 또다시 떠나가야 하는 만주 유이민의 간고한 삶, 조국 ‘해방’의 소식을 접하고 급거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우에/ 제각각 드러누워”(이용악, 같은 시) 서울을 향하는 귀향 유이민의 실상이 위의 시편들에 매우 인상적으로 점묘되어 있는데, 이같은 시적 현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사진집에는 북해도 출신 ‘둔전병(屯田兵) 개척이민단’이 북만(北滿) 자무스(佳木斯)에서 밭갈고 타작하는 모습 등이 어김없이 박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아연 눈길을 끄는 것은 사진집 제목 속의 ‘망향’이다. 문득 필자의 1998년 연변대학 초빙교수 시절의 야릇한 경험이 떠올려진다. 학교 당국의 배려로 그해 초봄 이 대학에 체류하던 외국인 교수 및 가족 20여 명이 러시아와 북한 땅을 동시에 조감할 수 있는 중국령 화앙천(防川)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바로 두만강을 끼고 중국과 북한의 선봉(先鋒)․나진(羅津)을 직통하는 함경북도 홍의(洪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투우먼(圖們)을 거쳐 훈춘(琿春) 중간 지점에 위치한 미이장(密江)에 이르렀을 때, 70세쯤의 한 일본 노신사가 급히 차를 세우고 소년처럼 날래게 뛰어내려 북한쪽 대안(對岸) 미산리(美山里)를 향해 설치된 저 만주국 시대의 아직 녹슬지 않은 포대를 지극한 감개에 젖어 애무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도 한 세대에 훨씬 미급하는 만주 시절이 일본인에겐 ‘망향’의 여전한 근원적 실체로 작동한 똑똑한 사례이다. 이에 비추어 보건대, ‘노예’라고밖에는 달리 명명하기 어려운 조선인 소작농의 구조적 착취를 기반으로 1920~24년에 이미 대규모 ‘농업이민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일본인 민간기업 불이흥업(不二興業)이나, 실질적으론 근 반백년간 ‘반도경영’을 주도한 일본제국주의 당사자들의 경우를 상상해보는 것 자체가 한갓 부질없는 일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광활한 만주벌과 반도에 걸쳐 대제국의 흥성을 구가했던 고구려 광개토왕․장수왕 시대 100년은 한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더욱이, 2세기 이상 남쪽 대동강 유역으로부터 북만주의 너른 평원 즉 북쪽 “흑룡강(黑龍江) 중하류 일대, 우수리강 중하류 유역, 송화강(松花江) 중하류 지방의 사방 ‘5천리’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방학봉․장월령, 『고구려 발해 유적 소개』, 중국 길림성 내부자료; 연길, 1995)을 통할했던 발해(699~927)의 흥성을 유념할 때, 우리에게 ‘북국․북방’은 과연 무엇이며, 또 한국 근대문학의 사적 전개에서 ‘북방적 상상력’의 문학적 발현은 어떠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가? 여기서는 시에 한정하여 이 문제를 짤막하게 논하고자 한다.


2

협량한 사대적 반도주의자 김부식에 의해서는 철저히 부정되었지만 ‘고려-고구려 계승론’의 역사인식을 견지했던 진취적 시인 이승휴가 그의 영사시(詠史詩) 『제왕운기(帝王韻記)』를 통해 “전 고구려 남은 장수 대조영/ 태백산 남녘 성에 터잡고/ 개국하니 그 이름 발해(前麗舊將大祚榮, 榮得據太白南城, 開國乃以渤海名)”라 함으로써 비로소 민족사의 반열에 편입된 것이나 다름없는 북쪽의 발해와,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고 반도를 통일한 남쪽 신라의 ‘남북국시대’는 장장 230년 가까이 우리 역사에 존속하였다. 그러나,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릴 만큼 고도한 문화를 향유했으며 당대 신라인들이 항용 ‘북국(北國)’이라 칭했던 발해(이우성, 「남북국시대와 최치원」, 1975)가 마침내 거란에 패망함으로써 기나긴 남북국시대는 막을 내렸으며, 광대무비한 북방대륙은 한민족의 역사 무대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민요․동요’ 양식으로 다양한 변주를 이루기도 한 북방시는 우리 근대시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대략 4가지의 지정학적 방향성을 띠고 투영되어 있다. 특히 시적 정조 면에서 이 작품들은 ‘자유분방․비장강개, 영웅적 장대성’ 등의 특점을 지니는 중국 성당(盛唐) 시기 왕창령(王昌齡)․잠참(岑參)․이백(李白) 류의 이른바 변새파시(邊塞派詩)의 그것(胡雲翼, 『중국문학사』, 장기근 역; 문교부 1961, 155~167면 참조)과 매우 방불하다. 각각의 대표적인 작품 3~4편씩 아래에 제시해 둔다.


(1) ‘북국․북쪽’ : 김동환 「눈이 내리느니」(1925), 조영출 「국경의 소야곡」(1933), 이용악 「북쪽」(1937)

(2) ‘북방’ : 박팔양 「밤차」(1927), 오장환 「북방의 길」(1939), 백석 「북방에서」(1940), 이육사 「절정」(1940)

(3) ‘북간도․만주․북만’ : 박세영 「향수」(1936), 서정주 「만주에서」(1940), 유치환 「새에게」(1947)

(4) ‘북새(北塞)’ : 김동환 「선구자」(1924), 이찬 「북방도(北方圖)」(1940)


한결같이 일제강점기에 발표(유치환의 「새에게」도 실제로는 이 시기에 씌어짐)된 것들이다. 이 범주에 드는 작품군을 전체적으로 일별할 때 창작의 주류가 월북문인이라는 사실, 민족의식적 지향을 지닌 듯한 시인일수록 일본제국주의의 강한 기호적 울림을 동반하는 ‘만주’보다는 ‘북국․북쪽․북방․북간도․북새’ 등의 시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 등이 특기할 만하다.

위의 작품들에서 분명하듯 거개의 북방시편들은 일제강점기에 전 조선적 규모로 발생한 국내 유랑민과 국외 유이민(만주․시베리아․일본 및 멕시코․하와이․사할린 등지) 들의 비극적인 삶에 직핍하여 그 실상을 극히 평명하게 노래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특히 후자의 만주 유이민 문제를 똑같이 주요한 시적 현실로 담아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시각의 현격한 낙차에 따라 ‘북방시’들은 서로 간단히 어울릴 수 없는 층위를 거느리고 있다.

오늘날 주로 중국 동북지방(옛 만주)에 집거하고 있는 190여 만 명의 조선족 동포들의 과거 만주이주사를 여기서 간략히 개괄해둘 필요가 있다. 첫 단계는 조선조 17세기부터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전까지의 ‘월경이민 시대’이며, 그 둘째는 일제와의 ‘을사조약 체결’ 이후부터 만주사변(1931) 직전까지의 ‘망명․유랑이민 시대’이다. 이 시기 조선 민중은 ‘한일합방’, 3․1운동 등의 정치적 대격변을 거치면서 대거 만주․연해주 등지로 유리해갔는데, 그 압도적 다수가 만주 유이민이었다. 중국 관헌의 압박, 봉건지주의 가혹한 착취와 경제외적 강제, ‘마적’ 등의 폐해로 이들의 생활상은 비참을 극하는 것이었다. 만주 이민사의 마지막 단계는 만주사변 이후부터 해방되기까지의 소위 ‘정책이민 시대’이다.

한국 근대시사에서 북방시는 1920년대에 들어 다채로운 양식적 변이를 겪는 과정에서 출현, 만주이민사 제3단계인 정책이민시대에 집중적으로 산생되었다. 이같은 분포는 위에 예시된 고작 10여 편 작품들에도 그대로 통한다.



3

북방시의 첫째 부류는 일종의 문화주의적 시각에 기반한 작품들이다. 1931년 일제의 중국침략을 점화한 ‘만보산사건’(7. 2) 및 이를 가열화한 ‘만주사변’(9. 18) 의 발발로 재만조선인 문제가 전 민족적 현안으로 부각된 직후 “재만동포는 마땅히 모든 정권에 초월하여 오직 경제적․문화적으로 뿌리를 깊이 박도록 노력”(「대만동포에게 급고」, 1931. 11)할 것을 유독 강조한 춘원 류의 철두철미한 중립적 비정치주의, 이것이 곧 이들 시편의 기저를 형성하는 시인 의식의 원형질이라 할 수 있다. 재만소설가들의 첫 작품집 『싹트는 대지』(만선일보사, 1941) 발문에서 신형철이 통칭한, 1930년대 후반 들어 내지(內地) 조선으로부터 만주로 유입된 상당수의 ‘문화부대’야말로 바로 이에 해당할 터인데 노천명․서정주 등도 넓게는 이에 포함시켜 무방할 것이다.


우물가에서도 그는 말이 적었다

아라사 어듸메로 갔다는 소문을 들은 채

올해도 수수밭 깜부기가 패여버렸다.

샛노란 강냉이를 보고 목이 메일 제

울안의 박꽃도 번잡한 웃음을 삼갔다.

- 노천명, 「옥수수」 부분, 1938.


참 이것은 너무많은 하눌입니다. 내가 달린들 어데를가겠읍니까. 紅布와 같이 미치기는 쉬웁습니다. 멫千年을, 오― 멫千年을 혼자서 놀고온 사람들이겠습니까.

- 서정주, 「滿洲에서」 부분, 1941.


일체의 감정적 번다를 말끔히 삼제한 채 강렬한 색감적 대비와 빼어난 서정적 처리 등을 통해 저 러시아 연해주로 가뭇없이 사라진 시골 총각의 슬픈 족적을 깔끔한 모던 풍으로 사뭇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드러나는 노천명의 ‘북방 인식’은 이 계열의 또다른 작품 「국경의 밤」(1938)과 더불어 꽤나 위태하다. 서정주의 경우는 어떠한가. 시인 자신임이 거의 분명한 시적 페르소나가 “종(鍾)보단은 차라리 북이 있읍니다. 이는 멀리도 안들리는 어쩔 수도 없는 사치입니까. 마지막 부를 이름이 사실은 없었읍니다.”(같은 시)라고 노래할 때 그것은 야만스럽고 조악한 ‘만주’를 경멸적으로 바라보는 닫힌 문화주의에 다름아니다.

두 번째는 여하한 형태의 기반(羈絆)도 결연히 거부하는 자유혼, 말하자면 함석헌이 언급한 ‘들사람얼’(野人精神) 또는 노마디즘적 상상력의 편린이 엿보이는 시편들이다. 김동환․유치환 들의 몇몇 작품이 여기 편입될 수 있을 것이다.


눈이 몹시퍼붓는 어느해 겨울이었다,

눈보래에 우는 당나귀(驢馬)를 이끌고 豆滿江녘까지 오니,

江물은 얼고 그우에 흰눈이 석자나 싸엿섯다.



人跡은없고, 해는 지고―

나는 몇번이고 도라서려 망설이다가

大膽하게 어름장깔닌 江물우를 건넛다.

- 김동환, 「先驅者」 부분, 1924.


아아 나는 예까지 내처 왔고나

北滿洲도 풀 깊고 꿈 깊은

허구한 세월을 가도 가도 인기척 드문 여기

여기만의 의로운 세상의 복된 태양인 양 아낌없는 햇빛에

바람 절로 빛나고 절로 구름 흐르고

종일 두고 우짖고 사는 벌레소리 새소리에

웃티 벗어 팔에 끼고 아아 나는 드디어 예까지 왔고나

- 유치환, 「새에게」부분, 『생명의 서』, 1947.


‘만주’야말로 우리의 옛땅이라는 고토의식(故土意識)이 우리 근대시에 발현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령 북한문학사에서 특별한 비중을 얻고 있는 1930년대 ‘혁명가요’ 「용진가」의 일절 “백두산하 높고 넓은 만주 들판은 / 건국 영웅 우리들의 운동장일세”(『현대조선문학선집 11 - 시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60, 97면)은 차치하고라도, 뒷날 북한의 유수한 러시아문학 번역자로 활약하기도 한 박우천(朴宇天)이 일찍이 저 송화강반(松花江畔)에서 고통스럽게 “옛날에 여기는 / 우리네 조상이 뛰놀던 벌판”(「이국의 봄」, 1929)이라 읊조리고, 이를 거들기라도 하듯 김달진(金達鎭)이 “나는 江南 제비새끼처럼 / 새론 옛 고향을 찾아 왔거니”(「용정」, 1942)라고 노래한 것은 오히려 그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위의 두 작품이 보여주는 시적 분위기 또는 그 의식의 편차는 결코 미세한 것이 아니다. 앞의 남성적 기개 또는 꿋꿋한 개척정신에 비할 때 뒤의 그것은 깊은 회한과 비장감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에게 공통적인 것은 일체의 강박과 부자유를 떨쳐버리고 시원적 삶의 핵심을 향해 돌진하고자 하는 일종의 노마디즘적 정신의 발로이다.

전자의 경우, 일제 ‘토지조사사업’의 제도적 완비와 더불어 대거 발생한 1920년대 만주․시베리아 유이민들의 북국행을 “오오, 흰눈이 내리느니, 보―얀 흰눈이 / 北塞으로 가는 이사꾼 짐짝우에 /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눈이 내리느니」, 1924) 등의 장대한 서정적 형상으로 예리하게 포착하는 데 능수였던 김동환의 솜씨가 새삼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투박한 북관(北關) 입말, 억센 남성적 어조, 대륙적인 시적 전경(前景) 등을 통해 간난 어린 ‘선구자’의 꿋꿋한 기개를 적실하게 묘파하고 있는 것이다.

“문명과는 등진 허막(虛漠)한 북만의 자연 …… 거기서는 혼신껏 용출(湧出)”이 가능(「서」, 『생명의 서』)하다는 시적 인식에 토대하고 있는 유치환의 북방적 상상력은 주로 ‘자연 물상’들을 통해 집약적으로 분출된다. 이 시인에게 ‘풀 깊고 꿈 깊은 북만주의 풍요한 햇빛과 바람, 구름, 벌레소리, 새소리’ 들은 “오늘 여기 문명한 민주와 자유”(위의 「서」)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진정한 ‘존재의 삶’(E. 프롬)을 가능케 하는 시적 매개로 된다.

단지 ‘하늘의 그림자’인 대지와 바이칼을 바라보기 위해 온갖 고통을 무릅쓰고 험난한 산에 올라 “바다와 광활한 침엽수림과 대초원이 누운 곳에 / 창공 아래 / 우리 선조들 말을 내려 / 저 높은 산에 다시 오르고 있다네”(Ministry of Culture of Buryat Republic, The Buryats-Traditions & Culture; Ulan-ude, Soyol, 1995)라며 유장하게 읊조린 부리야트인이나,


우린 오직 잠들기 위해 왔네

다만 꿈꾸려 왔다네

지상에 살기 위해 왔다는 것

그건 거짓일세, 정녕 거짓이라네

우린 봄철의 초원

싹을 틔우네

우리 가슴도 싹을 틔우네

우리 몸은 한 송이 꽃, 봉우릴 피웠다

다시 시든다네

- Beatrice Trueblood, The Seas Unite Us-Mexico Basin, Banea Serfin, S.N.C.; 1989


라고 노래한 멕시코 아즈텍(Aztec)의 근원적인 시적 정서도 널리 보면 파인이나 청마가 지향했던 그것과 동류라 해야 할 것이다.


4

북방시의 마지막 부류는 엄혹한 만주유이민 현실에 굳건히 기초하면서도 유목적 상상력을 거기에 탄력적으로 착근시킨 경우이다. 이용악의 「북쪽」, 백석의 「북방에서」 등이 이런 예에 속할 터이다.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女人이 팔녀간 나라

머언 山脈에 바람이 얼어붓틀때

다시 풀릴때

시름 만흔 북쪽 하눌에

마음은 눈 감을줄 몰으다

- 이용악, 「北쪽」 전문, 1937.


시적 자아는 작품 뒤켠에서, 마치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속내를 은밀하게 털어놓고 있다. “머언”이란 시어에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 바이지만, 어떤 까닭에서인가 그는 지금 고향과 격절되어 있다. 여기서 시적 페르소나의 의식은 늘 북쪽을 향해서만 열려 있다. 그를 이처럼 깨어 있는 각성적 자아로 거듭거듭 충격하는 시적 매개는 다름아닌 ‘바람’이다.

원형동사 ‘몰으다’로 그리움의 절실함을 극대화한 데서 보듯, 시적 자아는 어찌하여 그토록 북쪽을 연연해하는 것일까. ‘북쪽’(북방 대륙)은 과거 고구려와 발해가 흥륭했던 우리 역사의 찬란한 고토이기도 하지만, 고려가 원(元)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래 조선이 현실주의적 친명(親明) 노선을 취한 시기까지 약 300여 년간 우리의 순결한 딸들을 공녀(貢女)의 이름으로, 혹은 볼모로 무수히 떠넘겨야 했던 슬픔의 땅이다. 단지 형식만 달랐을 뿐 이런 사정은 1930년대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렇다면 제 1~2행의 두 개의 ‘북쪽’은 각각 무엇인가. 아마도 앞의 ‘북쪽’은 시적 페르소나의 고향을, 뒤의 그것은 팔려간 여인들의 오욕과 간난의 땅 ‘만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수난받는 동족을 향한 남성의 시적 페르소나의 눈길은 깊은 연민의 정으로 충일하다. 가히 ‘민족적 에로스’라 불러 마땅한 것인데, 이 작품의 드높은 서정적 환기력은 바로 여기서 비록한다. 한국 근대시사에서 매우 독특한 이채를 발하는, 북방적 상상력의 건강한 시적 실현의 전형적 사례라 할 만하다.



아득한 녯날에 나는 떠났다

夫餘를 肅愼을 渤海를 女眞을 遼를 金을

興安嶺을 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녯한울과 땅으로―나의 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백석, 「北方에서 - 鄭玄雄에게」 부분, 1940.


동시대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해방 후에는 북한에 머물러 『조선미술 이야기』(1954) 등의 저술을 남겨놓기도 한 화가 ‘정현웅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작품은 무엇보다 거침없는 시적 어조와 웅대한 서사적 화폭으로 이채를 띤다. 흡사 민족적 자아를 대신한 듯한 일인칭의 성찰적인 시적 페르소나를 통해 시인은 찬란을 극했던 옛 고구려, 남북국시대의 발해, 그리고 “게을리 ……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며” 나태와 안일로 잔뜩 오그라든 치욕의 반도를 넘나든다. 1939년 만주로 떠나간 직후 씌어진 작품으로, 고구려의 옛 터전 부여, 북만주 흥안령(興安嶺)과 음산(陰山), 아무우르(黑龍江)와 숭가리(松花江) 등의 지정학적 아펠레이션에 의해 더욱 생동한 사실감을 보유하고 있다. “녯 한울로―나의 태반(胎盤)으로” 복귀한 끝에 자신의 주체적 신원을 가까스로 확인한다는 일종의 이야기시라 하겠는데, 여기서 ‘북방’은 명백히 시인의 현실인식을 일깨우는 하나의 든든한 균형추 같은 것이다.


5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 한때 가장 탁월한 자치능력과 최고 교육수준을 견지하면서 주로 동북3성에 집거하고 있는 192만여 명(1990년 현재)의 중국 조선족은 그 절대 다수가 일제강점기 만주 유이민의 후예이다.


할아버지

마두강 건너 산 지 3년 넘은 어느해 이른봄

아버지

강동 가 3년만에

마우재땅 태생으로

내 돌 맞은 늦가을

제2고향이라고

노새 타고 돌아온 뒤

어느새 산천도 두세번 변하였구나

- 李旭, 「三代」부분, 『北陸의 抒情』; 延吉, 민중문화사, 1949.


일찍이 고향 함경북도 무산(茂山)을 등지고 북간도 길림성 화룡현(和龍縣)으로 이주한 할아버지, “마우재”(러시아) 땅 강동(江東) 즉 블라디보스톡 신안촌(新安村)으로 건너간 아버지와 거기서 출생한 시인 3대의 척박한 가족사가 간명히 압축된 이 작품에서 분명하듯, 오늘날의 중국 조선족에게 북륙(만주)은 ‘제 2 고향’이다(조성일․권철 주편, 『중국조선족문학사』, 연변인민출판사 1990, 366~89면 참조).

『재만조선시인집』(연길; 예문당, 1942)에 이학성(李鶴城, 1907~84)이란 필명으로 작품을 게재하기도 한 이 시인을 포함한 당대의 현지 유이민들에게 ‘만주’란 무엇인가. 1917년 여섯 살 때 가족과 함께 고향 함경북도 명천에서 중국 길림성 용정현(龍井縣)으로 이주한 김창걸(1911~91)의 소설 제목 「두번째 고향」(1938; 『김창걸단편소설선집』, 료녕인민출판사, 1982) 그대로이다.


만주는 우리를 길러준 어버이요 사랑하여 안어준 안해이다. 이 나라의 단조로운 퍼언한 지평선, 홍시(紅柿)같이 새빨간 저녁해, 모양새없는 우리부락의 토성(土城), 머언 백양(白楊)나무숲, 적은 개울물 하나, 하잘것없는 돌덩이 흙덩이 하나하나에도 우리네 역사와 전설과 한없는 애정이 속속들이 숨어 있다. [……] 그러므로 이 땅 이 나라의 자연과 사람은 완전히 애무하는 우리 육체의 한 부분이다.

- 박팔양, 「서」 부분, 『만주시인집』; 길림시, 제일협화구락부, 1942.



한마디로 만주 유이민들에게 ‘북방대륙 만주’는 그들을 “길러준 어버이요 사랑하여 안어준 안해”이자 “육체의 한 부분”, 즉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운명적 존재이다. 따라서 이들에 의해 현지에서 창출된 문학은 ‘오족협화(五族協和)’의 슬로건을 내세운 만주국에 부용한 친일문학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탱할 절체절명의 현실적 필요에서 이룩된 ‘생존문학’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만주문학’의 별개적 실체성을 부인하면서, 본질적으로 그것은 오족의 “합창도 아니고 이질적인 것의 하모니도 아니고, 단지 잡연히 이종(異種)한 것”이라 한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의 견해(「구 만주 한인문학 연구」, 1993; 『윤동주와 한국문학』, 소명출판 2001)는 매우 적실하다.

우리 근대문학에 다양하게 음각된 ‘북방적 상상력’의 실상을 제대로 해명하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조선반도의 문학사와의 중복을 피면하는 원칙과 국가적 관계를 고려하는 원칙”(조성일․권철 주편, 앞의 책, 6~7면)에 묶여 ‘해방’ 후 남한 문단에 귀속된 이들(안수길․유치환․함형수 등)을 배제한 중국조선족문학사의 편향, 일제강점하의 1920~30년대 한국의 프롤레타리아문학을 비롯한 진보적 문학 등이 온통 “김일성 동지와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조직․지도된 조선인민의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나타난 혁명적 문학”의 직접적 고무력에 의해 가능했다고 보는 북한문학사(『조선문학통사․하』, 과학원출판사, 1959, 91면)의 배타성, 그리고 한국 근대문학의 불구적 전개를 감안하지 않은 채 만주 유이민 문학을 역사적 콘텍스트로부터 절연하는 관점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한국문학사의 협애성 등을 한꺼번에 걷어내는 일이 무엇보다 긴절하다. ‘반도적’ 편협성, 무분별한 서구적 지향, 단순 복고주의 등의 시각도 극력 경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연변 조선인 자치주

용정현 동성향 신평촌

NHK 방송이 세밑 프로로 방영했다는 이 필름에는

한글로 뚜렷이 새겨진 자막 위에

낯익은 초가집과 황토 구릉들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온돌과 가마솥과 흰밥과 콩나물과 열무김치

아마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조선족 조선말 온전히 고스란히 남아서

옹기종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구나

- 곽재구, 「용정현 신평촌」 부분, 1985.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 중국 조선족의 생활상을 취재한 일본 ‘NHK 방송’을 접하고 구상된 작품인 듯한데, 여기서 중국 조선족은 서양 문물에 온통 찌든 분단 한국의 온갖 문화적 병폐의 대척점에 자리한 순결한 시적 표상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들은 이 과거의 시간 속에 그냥 정체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해방’ 이후 남한으로부터는 오랫동안 일종의 기민(棄民)으로 방치되어 온 그들은 1978년 이래 중국 당국의 급속하고도 대규모적인 ‘개혁개방’의 높은 파고에 휘둘리고 있다. 특히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인들에게 중국 조선족과 그들의 땅은, ‘코리안 드림’을 안고 있는 ‘사기 대상’ 또는 음험한 자본의 운동논리 대상으로 전락하는 모진 신산(辛酸)을 겪고 있다. 활짝 개방된 여행의 자유에 힘입어 가끔 철딱서니 없는 한국인들이, 지난 시기 중국조선족의 역사적 명운을 헤아리지 않은 채 백두산 천지에 올라 “대한민국 만세!”를 연호하는 장면이야말로 참으로 볼썽사나운 일이다. 한국 근대문학의 총체적 전개에 있어 ‘북방적 상상력’의 평탄치 않은 굴곡을 객관적 엄정성에 입각하여 새로이 천착해야 할 소이가 바로 여기 있다.
윤영천
글 / 윤영천_평론가, 인하대 국어과 교수. 1944년생. 평론집 『서정적 진실과 시의 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