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기
도봉산 회룡사(回龍寺)의 폭포 구경

  • 산수유기
  • 2003년 가을호 (통권 9호)
도봉산 회룡사(回龍寺)의 폭포 구경

 
편집자 주) 이번 호부터 한국 고전 기행문들을 서울대 이종묵 교수의 도움을 받아 ‘산수유기(山水遊記)’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 


  7호선 전철을 타고 의정부를 향하다 보면 용이 돌아온 역, 회룡역(回龍驛)이 나온다. 회룡역에서 서쪽으로 작은 개천이 흐르는데 용이 돌아온 회룡천(回龍驛)이다. 회룡천을 거슬러 한참 가면 조그만 사찰이 있는데, 용이 돌아온 회룡사(回龍寺)다. 뒤로 도봉산 줄기가 북으로 뻗어 다시 솟구친 사패산 아래다. 곧 의정부시 호원동이다.

  본래 이 절은 681년 신라 신문왕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는데 당시에는 법성사(法性寺)라 하였다. 그후 우왕 10년(1384)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다시 이 절을 중창하였고 태종 3년 (1034)에 회룡사로 고쳐 불렀다. 왕자의 난으로 함흥에 가 있던 태조가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한양으로 돌아오다가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자, 무학대사가 ‘회란용하(回鸞龍賀)’를 기원하였더니, 비로소 움직였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절 이름과 물 이름에 ‘회룡’이 들어간 것이며, 오늘날 전철역도 이 이름을 땄다. 의정부에서 개최하는 축제의 이름도 회룡제니, 회룡은 의정부의 상징이 되었다.

  회룡사의 유래는 오래되었지만, 이 절이 문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다. 이 무렵 이 일대에 전장은 서인(西人)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박세당(朴世堂)이 그리 멀지 않은 수락산 아래 장암동에 살았고 남구만(南九萬)과 그 아들 남학명(南鶴鳴)도 그 서쪽 회운동(晦雲洞)에 살았다. 또 김창흡(金昌翕)도 이곳을 신선의 땅이라 여겨, 단약(丹藥)을 만들려고 이곳에 6~7일을 머물렀던 적이 있다.

  그러나 산은 그 자체로 이름을 얻지 못한다. 산은 사람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는다. 18세기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 1720~1799)이야 말로 우리 역사에 회룡사를 길이 빛낸 사람이다. 체제공은 남인의 영수로 정1품에까지 올랐다. 규장각과 예문관의 제학을 역임하고 한성부판윤까지 지냈으나, 정조 4년(1780) 실각하여 8년간 도성을 떠나게 된다. 그때 머물렀던 곳이 바로 도봉산 아래 회룡동(回龍洞)이었다.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 홍시박(洪時博)이라는 사람의 집을 빌려 온 식구가 이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회룡사와 인연이 생긴 것이다. 채제공은 이곳에서의 삶을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그대의 말이 어디에서부터

    내 사는 푸른 곳으로 왔는가

    폭포가 뿜어대니 산이 어둡지 않은데

    매미 소리 그치니 숲이 텅 빈 듯

    지겨우면 바위 위에서 잠자기도 하고

    시가 많으면 벽에다 적는다네

    하늘이 이런 일을 베풀어주었으니

    남들이 나에게 무엇을 찾으랴

    君馬從何入 蒼蒼我所居

    瀑噓山不暝 蟬罷樹如虛

    懶或巖巓睡 詩多壁上書

    天應餉以此 人顧奈於余

    - 체재공, 「우경모에게 시를 지어 보이다(吟示士仰)」




  우경모(禹景謨)라는 사람이 채제공이 살던 회룡동으로 찾아왔다. 채제공은 그에게 자신이 사는 곳의 물과 산을 자랑하였다. 하얗게 튀어오르는 폭포의 포말로 인하여 어두침침한 산도 훤하다. 비록 궁벽진 곳에 살지만 마음은 편하다는 뜻이리라. 시끄럽게 울던 매미가 잠시 울음을 그치자 온 산은 정막에 쌓인다. 소란한 도성에서 살다 얻은 한적함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졸리면 바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시흥이 일면 벽에다가 아무렇게나 갈려 써본다. 하늘이 내린 이런 팔자를 즐길 것이라 하였다. 벼슬에서 내쫓긴 사람의 말이다. 이러한 한가함을 자랑하던 정조 9년(1785) 여름 아들 채홍원(蔡弘遠), 서자 채홍근(蔡弘謹), 생질 이유상(李儒尙), 문인 권필전(權弼銓), 겸인(傔人) 김상겸(金相謙), 승려 경총(敬聰) 등과 함께 회룡사의 폭포를 구경하러 갔다. 폭포는 벼슬에 내쫓긴 자의 울분을 풀기에 좋다. 그래서 간 것이리라. 

 

  하루는 폭우가 쏟아져 밤새 그치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에야 비가 그칠 기색이 있었다. 회룡사 앞 폭포가 매우 장대하다는 말을 들었다. 어렵게 가마를 준비하여 물을 건너 넝쿨풀을 잡고 올라갔다. 날리는 포말이 사람을 쏘아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폭포 왼쪽 길을 따라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버리고 떠나가는 듯하였다. 가볍게 올라가니 원류를 만나게 되었다. 그다지 세차게 흐르지는 않았다. 비로소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고 물을 건넜다. 벼랑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오른편으로 폭포를 끼고 바위 위에 앉아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도봉산에서 발원한 물이 10여 리쯤 흘러내리다가, 여기에 이르러 갑자기 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위는 높이가 거의 5~6길 정도인데 물이 부득불 출구를 다투다 보니 다발로 묶인 듯 흐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물이 뛰어올라 흩어지는 것도 있고, 서서 뛰는 것도 있으며, 넘어져 옆으로 떨어지는 것도 있고, 빠르게 곧바로 쏟아지는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빙빙 돌기도 하고, 어떤 것은 치면서 부서지기도 하였다. 수량이 풍부한 것은 수천 말의 용기에 담겨 있는 구슬과 같고, 소리가 요란한 것은 만 개의 우레가 치는 듯하였다.

- 채제공, 「회룡사 폭포를 구경한 글(回龍寺觀瀑記)」 



  채제공 일행은 회룡사 앞의 폭포를 찾았지만, 폭포에서 튀어오르는 물방울 때문에 가까이서 볼 수가 없었다. 폭포를 제대로 보기 위하여 폭포 왼편을 끼고 올라가서 개울을 건너 반대편으로 내려와서 온전한 폭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봉산에서 발원한 물이 10리를 뛰어내려오다가 갑자기 대여섯 길 되는 높은 바위를 만나니, 이 때문에 바위에 물이 부딪혀 장관을 연출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산을 찾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광을 찾는다. 거센 폭포라도 보면 기이하다고 탄성을 지르게 된다. 이는 보통 사람들의 일이다. 그러나 채제공은 사물의 겉면만을 보지 않았다. 이면을 통하여 하늘의 이치를 살폈다. 채제공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처럼 폭포를 보고 놀랐다. 그러다 한참 후 조용히 생각하였다.    


  하늘이 물을 만들 때 어찌 이와 같이 만들었겠는가? 물의 본성은 그저 아래로 흘러갈 뿐이다. 비어 있으면서도 차 있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 순리를 좇기 때문에 흐르지 못하게 하여도 흘러가는 것, 이것이 바로 물의 상도다. 지금은 물이 바위에 속아서, 그 기세가 크게 다투어가는 듯하고, 그 모습이 크게 미친 듯한 것이다. 사람들 중에 이를 보는 자들은 물이 본성을 잃은 것이 개탄할 만한 일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박수를 치면서 기이하다 하니,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내 보니, 오늘날의 사람들 중에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을 보존할 수 없는 이가 많다. 폭포여, 폭포여. 내가 너에게 무엇을 탓하랴.

- 채제공, 앞의 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맹자(孟子)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사람의 성품이 선한 것이라 하였다. 물은 순간적으로는 높은 곳으로 튀어오를 수 있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아래로 흐른다. 물이 웅덩이를 만나면 그곳을 채우느라 멈추지만 다 채우고 나면 다시 아래로 흐른다. 노자(老子)는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물이지만 가장 강하다고 하였다. 물을 막는 어떠한 것도 흐르고자 하는 물의 성질을 막을 수 없다. 그런데 물이 잠시 비뚤어진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좋다고 하니 어리석은 짓이다.

  폭포를 보고 채제공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였다. 자신은 순리를 좇아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적들은 자신을 몰아붙였고 끝내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채제공은 처음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 마음의 상태는 격렬한 폭포와 같았으리라. 채제공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물이 바위를 만난 폭포라 위안하였다. 그러나 물이 바위를 만나 격렬하게 튀어오르는 것은 물의 본래적인 성질이 아니다. 폭포 아래의 웅덩이를 채우고 평평한 땅을 만나면 다시 평온해지듯, 자신이 생각하는 천리(天理)는 회복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과연 채제공은 산을 다녀오고 3년이 지난 1788년 정조가 친필로 그를 불러 우의정에 임용하였다. 자신이 생각한 천리가 회복된 것이다. 이후 좌의정에 오른 채제공은 영의정과 우의정이 결석인 상황에서 독상(獨相)으로 정사를 좌우하였다. 만인지상(萬人之上) 일인지하(一人之下)의 자리인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종묵
글 / 이종묵_서울대 국문과 교수. 1961년생. 저서 『한국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해동강서시파연구』, 편역서 『누워서 노니는 산수』 『부휴자담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