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토론
문예지 홍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새로운 문예지 창간, 다양한 입장의 공존과 경쟁의 징표

  • 쟁점토론
  • 2003년 가을호 (통권 9호)
문예지 홍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새로운 문예지 창간, 다양한 입장의 공존과 경쟁의 징표

   아주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문학의 위기를 지적하는 담론이 끊이지 않는 와중에서 문예지 출간이 속속 이어지고 있다. 2, 3년 전부터 『문학과경계』, 『문학/판』, 『문학인』, 『문학수첩』 등등이 새로이 선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비록 『문학인』은 출판 외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잠시 접게 되었지만, 나머지 문예지들은 활발하게 움직이며 분명한 자기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들려오는 얘기로는 두어군데 출판사에서 또 새로운 문예지 창간을 준비하거나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문학 출판의 미래에 대해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진단이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새로운 문예지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우선 우리의 현대문학의 역사 자체가 문예지와 동인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창조』, 『폐허』, 『백조』와 같은 동인지에서부터 『소년』, 『청춘』, 『개벽』, 『조선문단』과 같은 잡지를 빼놓고는 한국 현대문학의 출발을 말하기가 어렵다. 물론 이러한 ‘문단의 역사’가 반드시 ‘문학의 역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문예지가 문학의 역사를 낳은 산실인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하여 문학적 경향이든, 혹은 인간적 관계이든, 이러저러한 연유로 작가들은 문예지를 중심으로 모였고, 그곳에서 제각기 문학의 ‘작은’ 역사를 만들어왔다. 이 전통이 『현대문학』과 『문학사상』 등의 월간지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으로부터 『문학과사회』로 이어지는 계간지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문예지는 크게 두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편집동인 체제의 잡지로서, 분명한 문학적 입장을 표명하고, 그 입장에 걸맞은 작가를 적극 지원 발굴하는 것이다.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그리고 『문학동네』 등이 그러한 성격의 계간지다. 다른 하나는 종합지로서, 특별한 문학적 이념을 내세우기보다는 다양한 입장의 작가들에게 활동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다. 편집동인 체제와 굳이 비교하여 말하자면, 편집위원 체제의 이 잡지는 위의 세 계간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계간지와 월간지가 이에 해당된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문학적 입장을 지켜나가기 위한 편집동인 체제의 문예지와, 다른 한편 여러 입장이 공존하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편집위원 체제의 문예지가 서로 경쟁하면서 우리 문학을 가꾸고 지켜나가는 터전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문학적 관점과 달리 출판의 관점에서 문예지를 생각할 수 있다. 서양의 경우처럼 완성된 원고를 출판사에 투고하고 그것을 검토하여 책을 내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면 어느 면에서 문예지는 불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문예지가 새로운 원고와 작가를 확보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다. 그렇기에 문학 출판사로서는 적지 않은 물질적 출혈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작가를 발굴하고 새로운 원고를 찾기 위해서라도 문예지를 만들 필요가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문학상이나 신인상 수상 제도가 문예지 없이는 유지되기 힘든 점도 문예지 창간을 부추기는 주요한 요인이다. 결론적으로 문학적으로나 출판의 관점에서 보나 문예지는 나름의 명확한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런데 현존하는 문예지가 실제적으로 요청받고 있는 문예지의 존재 이유를 다 채워주지 못한다. 앞서도 밝힌 것처럼 동인 체제의 잡지는 불과 세개에 불과하다. 그나마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는 동인이 바뀌면서, 그리고 『문학동네』는 시간이 흐르면서 동인지와 일반 문예지의 성격이 뒤섞이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문학적 입장을 지향하는 사람들로서는 자신들을 대변해 줄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것이 문학 출판 시장에 새로 진입하려는 출판사의 이해 관계와 맞아떨어지면서 문예지 창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예지 사이에 분명한 미학적 거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적인 차원에서의 패권 의지가 두드러진 나머지 문학적 이념을 심화시키는 데까지는 아직 제대로 이르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문학/판』은 『문학과사회』와 적지 않게 겹치며, 『실천문학』은 『창작과 비평』의 어느 부분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문학수첩』과 『문학동네』의 거리 또한 크게 멀지 않다. 그 점은 각기 문예지에 수록되는 작품의 작가들을 살피면 쉽게 드러나는 일이다. 새로운 문예지들이 선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이런 점에서 선택의 곤란을 겪을 수 있다.

  현대문학의 근본적인 의의는 독창성과 다양함이다. 문학은 결코 몇개의 코드로 요약되지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문학이 제도로 순치되지 않는 전복적 사유의 자리가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함을 포용하지 못하는 현재의 문예지는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다. 물량 패권주의를 버리고, 질적인 다양성의 세계로 분화할 때가 온 것이다. 새로운 문예지들이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창간의 의의는 충분하다. 다양한 문학적 입장의 공존과 경쟁은 우리 문학의 건강을 보여주는 징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종합 문예지의 다양성만이 아니라 동시에 소설 전문지, 비평 전문지 등으로의 분화 또한 적절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독자들이 그러한 질적 분화를 소화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선된 다(多)품종 소량 생산의 문예지를 지향한다면 틈새 시장을 충분히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시 전문지는 적지 않게 있다. 아마 시라는 장르 자체의 특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시인들에게 지면을 개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시 전문지의 존립을 가능케 할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월간(月刊)을 지향하면서 상당수의 잡지들이 원고료를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차라리 격월간 등으로 발행비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면, 그 비용으로 원고료 지급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계간 시전문지 『시인세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잡지는 물량 패권주의 대신 원고의 질적 특성을 추구하면서 종합 문예지 못지않은 원고료를 지급하고 있다.

  따라서 길은 하나다. 더 다양하게 전문화하고, 보다 질적인 심화를 더 이룰 것. 이 방향 위에 서 있다면 새로운 문예지는 얼마든지 환영받을 수 있다. 우리 문학의 다양성과 성숙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인 것이다. 








박철화
글 / 박철화_평론가. 1965년생. 평론집 『감각의 실존』 『관계의 언어』 『우리 문학에 대한 질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