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대해 언급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기대승의 이 작품에 대한 평은 “잡박무익(雜駁無益)”할 뿐 아니라 “심해의리(甚害義理)”라고 하는, 부정일변도의 것이었다. 그리고 기대승 이후에도 이 작품에 대하여 언급할 기회를 가졌던 조선시대의 유명 사대부들은 김만중과 같은 소수의 예외를 제하고는 언제나 기대승과 마찬가지로 강경한 부정론을 주장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근엄한 사대부들이 무어라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건 상관없이 다수의 독자들은 이 작품에 대하여 일관되게 열렬한 환호를 보내었다. 조선시대의 유명 사대부 치고는 드물게 이 작품에 대하여 애정 어린 평을 남기고 있는 김만중이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삼국지』는 “부녀자나 어린이들도 다 능히 외울(婦孺皆能誦說)” 정도로 이 나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 신재효에 의해 정리된 판소리의 대표적인 사설 여섯 마당 가운데 하나로 『삼국지』의 적벽대전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적벽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한 가지만을 보더라도 이 작품이 조선 시대의 이 나라 사람들에게서 누렸던 인기의 정도를 짐작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조선시대 후기에 씌어진 숱한 영웅소설들 가운데 대다수가 『삼국지』의 영향을 어떤 형태로든 받았다는 사실도 『삼국지』와 한국인들 사이에서 맺어진 애정의 강도를 확인시켜 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대한제국 시대에 나온 대표적인 몽유록 가운데 하나로 유원표의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1908)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과는 별도로, 『삼국지』가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얼마나 강렬한 존재로 각인되어 왔는가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삼국지』가 지난날 이 땅에서 누렸던 이러한 인기는 20세기를 거쳐 21세기로 넘어온 현재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변화 없이 지속되고 있다. 어느 누구에 의한 번역본이 가장 많은 독자층의 사랑을 받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시대에 따른 변화가 확인되지만, 『삼국지』를 찾는 독자의 수가 엄청나고 그 독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인생의 어느 기간 동안 여광여취(如狂如醉)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비상한 강도로 이 작품 속에 빨려들곤 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어서만은 50년 전이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등의 변화가 없다.
어이하여 『삼국지』는 이토록이나 매혹적인 존재로 이 땅의 독서대중 위에 군림해 올 수 있었던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가장 단순한 대답은, 『삼국지』가 지니고 있는 비상한 소설적 재미야말로 그 비밀이라는 것일 터이다. 실제 『삼국지』가 소설적 재미라는 측면에서 보여주는 매력은 좀처럼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수없이 많은 인물들이 일일이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등장하며, 그 다양한 개성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가운데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 모습은, 그것 자체로서 하나의 장관을 이룬다. 그리고 그처럼 끝도 없이 펼쳐지는 이야기란 또 얼마나 놀라운 지략과 모험의 드라마로 가득차 있는가!
이미 여러 사람들이 지적해 온 바이지만, 『삼국지』에서 전개되는 싸움의 이야기가 궁극적으로는 작품의 제목 자체가 말해주듯 3자 대결의 구도로 집약된다는 사실도 이 작품의 매력을 말하는 자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일 것이다. 『초한지(楚漢志)』의 경우처럼 2자 대결로 압축되면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고, 『열국지(列國志)』의 경우처럼 수많은 다자간의 대결로 전개되면 자칫 혼란스러워질 수 있는 반면, 3자 대결의 구도는 단조로움의 위험도 혼란스러움의 위험도 모두 피해 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삼국지』는 과연 이러한 이점을 놓치지 않고 십이분으로 활용하여 빛나는 소설적 매력의 원천으로 승화시켜 올린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삼국지』라는 소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이야기꾼들의 재능과 노력이 모이고 합쳐진 결과로 탄생된 것이다. 그 수많은 이야기꾼들은 대부분 거리에서, 시장판에서, 또는 극장에서 대중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삼국지』의 이야기를 만들고 보태고 다듬어 온 존재들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텍스트이니 만큼 『삼국지』 속에는 떠들썩한 시정(市井)의 활기로 살아 숨쉬는 민간대중예술의 정수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바로 이러한 민간대중예술의 정수로서의 면모가 『삼국지』의 ‘비상한 소설적 재미’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지』의 매력은 이러한 측면으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측면과 더불어, 역사의 본질이라든가, 정치의 원리라든가, 난세에 있어서 지식인이 선택해야 할 길이라든가 하는 등의 엄숙하고 거창한 주제들을 놓고 진지한 사색을 거듭하는, 고급한 지적 담론으로서의 면모가 이 작품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또한 놓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지』의 경우 이러한 지적 담론으로서의 면모는 결코 생경한 추상론으로 나타나는 법이 없으며, 언제나 구체적인 인물의 형상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가운데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사건의 전개와 적절하게 결합되는 가운데에서 제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소박한 대중 독자들이 느끼는 감흥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지식층에 속하는 독자들에게는 단순한 소설적 재미라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좀더 복합적이고 긴장감 있는 지적 흥미를 선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양면을 자연스럽게 결합시켜 가지고 있는 『삼국지』는 궁극적인 차원에서 보면, 일찍이 김필년이 잘 지적해 준 바와 같이,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의 문학세계에서는 유례를 보기 드문 감동적인 비극으로서의 면모를 획득하고 있으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세계문학 전체의 역사 속에서도 확고한 독자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될 만하다.
지금까지 『삼국지』가 유달리 매혹적인 존재로 수많은 독서대중 위에 군림해 올 수 있었던 이유의 일단에 대한 설명을 시도해 보았거니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제시된 설명은 중국의 독서대중과 한국의 독서대중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삼국지』는 말할 나위도 없이 중국소설이다. 중국의 소설인 『삼국지』가 지금까지 이 글에서 설명된 바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중국의 독서대중에게 대단한 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항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구체적인 통계를 댈 수는 없지만,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로 미루어 보건대, 한국의 독서대중이 『삼국지』에 매료된 정도는 중국의 독서대중이 같은 작품에 매료된 정도와 비교할 때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그러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가 하면, 그 매료의 <성격>에 있어서도 중국의 독서대중과 한국의 독서대중 사이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중국의 독서대중은 당연히 『삼국지』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생각하며 읽어 오고 있는 것인데, 한국의 독서대중을 보면, 『삼국지』의 이야기를 물론 중국인들처럼 온전한 자신의 이야기로 생각하며 읽지야 않지만, 반드시 남의 이야기로 생각하며 읽게 되는 것 같지도 않다는 말이다. 이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이 글에서 이야기되어 온 내용과는 별도의 보충적인 논의를 필요로 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조선시대는 아직 근대적인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가 형성되지 않은 시절이었고, 유교에 바탕을 둔 보편주의적 ‘천하’ 개념이 압도적으로 지배한 시절이었던 만큼, 그 당시 이 땅에 살면서 『삼국지』를 읽었던 사람들은 지금 내가 거론하고 있는 문제점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근대적 국가주의․민족주의가 확립된 - 아니, 그저 ‘확립된’ 정도가 아니라, 압도적인 위력을 가지고 군림하기에 이른 - 20세기에 이르러서 『삼국지』를 읽게 된 한국 독자들에게는, 이러한 사정이 문제점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근대적 국가주의․민족주의가 20세기에 발휘한 그처럼 압도적인 위력에도 불구하고 『삼국지』를 읽는 한국인 독자들이 『삼국지』의 이야기를 완전한 남의 이야기로 인식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삼국지』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유교적 세계관․정치관․도덕관․역사관이 중국 전통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면서 동시에 한국 전통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삼국지』에 나오는 모든 인명과 지명이, 한자가 문어의 차원에서는 동아시아 유교문명권 전체의 공동문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과 연결되면서,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어디까지나 중국식 발음이 아닌 한국식 발음으로 읽혀지는 가운데 이 작품에 대한 독서가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두번째 사항은 얼핏 보면 사소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절대로 사소하지 않은 사항으로서, 어떤 면에서 보면 한국인이 중국(특히 과거의 중국)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기묘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함축을 가진 착종관계의 한 상징적인 사례로 지적될 수도 있을 듯하다.
- 이동하
- 글 / 이동하_평론가, 서울시립대 국문과 교수. 1955년생. 평론집 『한국문학과 비판적 지성』 『한국문학을 보는 새로운 시각』 등.